여차여차
곽호 썰, 소설 올리는 블로그 @tarack_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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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재 완 결 단 편 기 타 방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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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평소에 7시 30분이 되어서야 느즈막히 일어나 등교 준비는 15분 안에 끝내는 편이었는데 오늘은 6시에 눈을 떴다. 바깥은 아직 어둠이 완전히 걷히지 않는 상태다. 덜 쳐진 커튼 사이에 보이는 창문으로 몰려오는 먹구름이 보였다. 일어나기엔 이른 시간이었지만 후거는 7시 30분에 일어나던 예전보다 훨씬 빨리 침대에서 벗어났다. 씻는 것도 없다. 교복으로 갈아입고 여분의 양말을 가방에 넣고는 조심스레 문고리를 돌린다. 혹시나 엄마가 벌써 깨어 났을까봐 심장이 쿵쾅쿵쾅 뛰어 제 기능을 하지도 못 할 것 같았으나, 다행이도 거실은 어두컴컴했고 안방에서의 소리도 없다.

발뒤꿈치를 들어 살금살금 거실을 지나치고, 신발장 옆에서 우산도 챙겨든다. 소리는 최소한으로. 움직임도 최소한으로. 눈은 자꾸 안방에 닿고, 저 문이 벌컥 열리고 엄마가 나타날까봐 무서워 심장이 콩알 만해진다. 다행이도 현관문을 나올 때 까지도 엄마는 깨어나지 않았다. 집에서 완전히 벗어나 코너를 꺾어서야 마음이 놓인다. 돌아봐도 더 이상 집이 보이지 않았다. 

하아아....

가슴을 크게 쓸어내리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찌푸린 눈가에 안개처럼 가벼운 물방울이 사뿐히 내려앉았다. 비 오네. 손을 들어 손바닥을 대어 봐도 마찬가지다. 밖에 오래 서있으면 몰라도, 고작 몇 분 걸을 건데 이정도 비면 굳이 우산을 쓰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렇게 기껏 가져온 우산은 가지런히 접힌 채로 들고 다녔다. 조금만 걸으면 형의 집이 나온다. 형네 집에 가서 씻고 밥 먹고 학교 가야지. 어차피 수업이 끝나면 다시 집으로 가야겠지만, 일단 지금은 숨이 턱턱 막히는 상상 따위는 접을 계획이다.



***



형네 집에서 느긋하게 씻으려고 했는데, 열쇠로 조심스레 열고 안에 들어가자마자 형이 보고 싶어져서 발을 동동 굴렸다. 아직 자고 있을 텐데. 굳이 피곤에 쪄들어 사는 고등학생을 새벽녘부터 깨우고 싶진 않다. 그치만 보고 싶다. 어제부터 보고 싶었는데 못 봤잖아. 잠은 안 깨게 잠깐만. 문 열어서 잠깐만 봐야지.... 했는데. 문을 열어 본 건화의 얼굴은 언제나 그렇듯 늘 여전히 잘생겼지만 문제가 생겼다. 누가 봐도 고열에 펄펄 끓고 감기몸살에 걸린 꼴이다. 후거가 자주 걸리니 본인이 제일 잘 안다. 병에 걸린 저를 건화가 간호해준 적은 몇 번 있어도 저가 건화를 간호해준 적은 형이 축구공에 머리를 맞고 기절 했을 때 밖에 없다. 무엇보다 곽건화는 한겨울에 후드티 입고 운동하는 인간이니 감기에 걸린 꼴을 본 적이 없었다.


“형, 형 괜찮아?”


척 봐도 안 괜찮아 보이지만, 나오는 말이 그것뿐이니.


건화는 이미 후거가 방 안에 들어 왔을 때부터 깬 것 같았으나 정신을 못 차리는 듯 웅얼거리는 소리만 낸다. 고개를 숙여 귀를 가까이대도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다. 형 엄청 아픈가봐. 말도 못하네.


“어떡하지. 아직 병원도 약국도 문 안 열었을 텐데.”


내가 아플 때 형은 뭐 해줬더라.

제일 최근의 기억을 떠올려본다. 몇 달 전이었다. 형이랑 싸우기 얼마 전. 그 때 형은 몸이 안 좋은 후거를 침대에 눕히고 옆에 끼어들어서 키스했다. 물론 그 때는 끙끙 앓을 정도의 병이 아니긴 했지만 돌이켜보니 괘씸하다. 아프다는데 스킨십이나 하고 말이야. 후거도 다 때려 치고 옆에 달라붙어 꽉 끌어안고 치대기나 하려다가도,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찌푸린 채 누워있는 형을 보니 못된 마음이 좁은 굴속으로 들어가 문을 턱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는다.


살짝 쳐진 눈매 끝에 걱정이 매달렸다. 당장 매고 있는 가방을 내려두고 두꺼운 점퍼와 교복 자켓도 벗어 책상 위에 걸쳐둔다. 뭐부터 해야 하지. 아. 일단은 땀부터 닦아주는 게 좋을 것 같다. 손등으로 뺨과 이마를 만지자마자 축축하게 묻어나는 땀에 속이 타들어갔다. 건화는 꼭 하지마라는 듯이 팔을 들었다. 말려도 들을 생각 없다. 욕실로 달려간 후거는 욕실 찬장에서 수건을 꺼내 미지근한 물에 적셨다. 아침부터 이게 무슨 일이야, 대체. 


"나 오늘 학교 가지 말까? 학교 안 갈래."


방으로 돌아온 후거는 찬물에 깨끗이 빨아 물기를 꾹 짜낸 수건을 형의 이마 위에 올리며 중얼거렸다. 가만히 감고 있던 건화의 눈이 후거를 향해 걷힌다. 몸이 아파 반쯤 감긴 눈을 물끄러미 보자 후거는 갑작스레 울음이 차오르는 것 같다. 목이 아파 아무 말 못하는 주제에 말은 하고 싶은지 입술이 우물거렸다. 그 입술 위에 검지를 꾹 누르며 고개를 젓는다. 


"형이 안 된대도 학교 안 갈 거야. 뭐 했는데 몸이 이래."


발가벗고 뛰다 온 거야? 아님 노숙이라도 한 거야? 이것저것 물어도 대답이 없다. 어차피 목 부어서 말 못하는 거지만. 형이 이렇게까지 아픈 걸 보니까 속상한 마음에 설움이 폭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화가 나서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죄다 부셔버리고 싶으나 내 집이 아니니 물수건이 찢어질 정도로 쭈욱쭈욱 짜내는 것으로 대신한다.


건화는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하는 후거가 신경 쓰이는지 방 안에 돌아다니는 후거를 따라 시선을 옮기다, 그 마저도 힘들어 그냥 눈을 감았다. 내 몸은 튼튼하다는 자만심을 가지고 어제 내내 밖에서 추위가 무서운 줄 모르고 서 있었더니, 잠 들 준비를 하면서부터 몸이 안 좋은 걸 느꼈다. 따뜻한 곳에서 괜찮겠지. 그 안일한 생각으로 약하나 챙겨 먹지도 않고 자버렸는데 몸이 이 꼴이 됐다. 아니. 어떻게 목소리가 안 나와. 하루 종일 서 있었던 것도 아니고 고작 두세 시간 동안 밖에 서 있었다고 이렇게 되는 건 너무한 거 아닌가.

후거의 걱정과 짐을 덜어주어야 하는데 이건 오히려 짐을 하나 더 얹어준 격이다. 혀 깨물고 죽고 싶었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거냐 곽건화.


후거가 건화의 감기에 대한 분노로 손바닥이 얼얼할 때 까지 꽈악 짜낸 바람에 수건에는 물기가 거의 없다. 뜨끈뜨끈한 이마에 금세 식어버렸다. 하얀 수건 위에 손가락을 톡톡 대어보는데 차가운 기운이라곤 요만큼도 없다. 다시 물수건을 만들어와 갈아준다. 건화는 간호해주는 후거가 영 불편한 안색이었으면서 금방 잠들었다. 후거가 해준 것이라곤 머리에 물수건 하나 얹어준 것 밖에 없는데 그래도 그게 도움이 되는지 처음 봤을 때 보단 얼굴이 많이 나아졌다. 찡그린 미간도 편안해졌고. 

책상의자를 당겨 코앞에 앉아 형의 얼굴을 본다. 심란하다. 이번에야 후거가 찾아와서 알았다지만 만약에 그냥 제시간에 등교했으면 형이 아픈지도 모르고 넘어갔을 수도 있다. 거기다 태어나서 처음 아픈 것도 아닐 테고, 형이 혼자가 된 이후로 한두 번쯤은 분명 앓은 일이 있을 게 분명하다. 굳이 감기가 아니라도, 가벼운 기침이나, 두통 같은 것들이라도.


침대 위에 손을 올린다. 형의 조금이라도 건드렸다간 바로 깨버릴 것 같아서 이불을 조금 쥐는 게 고작이었다. 후거가 아플 땐 엄마나 아빠가 늘 걱정을 해주었다. 이마를 쥐고 체온을 확인하고, 찡얼대는 후거에게 따듯한 물과 약을 챙겨주고 잠드는 것을 확인해준다. 후거에겐 당연한 것이라 한 번도 감사하다거나 고맙다고 생각해본 적 없다. 하지만 형에게는 그 무엇도 당연한 게 아니겠지.


후거가 처음으로 건화의 집안 사정을 알았던 것은 중학교 1학년 때였다. 몇 번 봤던 형의 부모님이 갑자기 사라졌을 때. 형에게 부모님은 어디 가셨냐고 물었을 때 얼버무리던 것. 가만히 집에 돌아와 밤을 새며 되돌리고, 되풀이하고, 되새겨본 후에야 깨달았다. 이혼하시고 두 분 다 형을 데리고 가는 걸 거부하신거구나. 깨달은 순간 몇 번 본 적도 없는 형의 부모님이 미웠다. 


이해가 안가.


완전히 남인 나도 형이 이렇게 좋은데. 왜 본인들 자식이면서 사랑해주질 않는 거지.


몇 달간 형 때문에 가슴앓이하고, 형을 미워하고 증오한 적도 있지만 어쨌든. 그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여전히 후거는 건화를 사랑했다. 단순히 그가 자신에게 잘해주기 때문이 아니었다. 작고 통통하던 후거는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키가 순식간에 자랐고, 뼈마디가 아파 우는 소리를 내면서 살이 빠지고, 이목구비의 태가 나기 시작하면서 늘 남들에게 주목 받았다. 많은 호의를 받았고, 관심 속에서 살았다. 건화만이 후거를 챙기고 아껴주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건화와 있으면 자신이 건화의 대단히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았고, 그건 후거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후거의 인생에 건화는 특별한 사람이다. 아는 형. 동네 형 따위로 치환 될 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무작정 모든 걸 없었던 일로 하자는 엄마의 목소리가 파고든다. 차라리 처음부터 화를 내는 게 낫다. 그렇게 없던 것처럼. 아니었던 것처럼 구는 건 후거에게 더 상처였다. 내가 사라지지 않는 한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은 될 수 없다. 내 성정체성이 그렇다고, 내가 말을 했는데 어떻게 그게 아닌 게 될 수 있을까. 과거와 미래는 몰라도 현재의 후거는 건화를 사랑한다. 아픈 형만 봐도 울음이 튀어나오고 마음이 먹먹했다. 없던 걸로 할 수 없다.

어쩌면 우리 부모님도 형네 부모님처럼, 날 버리고 떠나갈 수도 있을.... 

아. 더 깊이 생각하다간 우울의 파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아 머리를 흔든다. 애써 우울하고 괴로운 생각을 환기시키려 노력하나 눈앞에 보이는 것은 감기몸살을 앓는 건화의 모습이다. 이것도 저것도 죄다 후거를 슬프게 하는 것뿐이었다. 오늘 만나면 괴롭혀주기로 했는데. 이래서 뭘 괴롭혀. 속상해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일단은 7시가 되면 선생님께 전화를 해야겠다.



***



한껏 아픈 목소리를 꾸며낸 후거는 인생 연기의 혼을 담아 죽어가는 학생1을 연기했다. 멀쩡한 목을 쥐어짜며 다 쉰 목소리로 오늘은 못 가겠다고 한마디 던지자마자 휴대폰 너머에서 너 무슨 큰 병 걸린 거 아니냐는 걱정이 들려온다. 조금 양심에 찔렸지만, 어쩔 수 없다. 감기 걸린 3학년 건화 형에게 옮았다고 힘겹게 말하고 난 뒤, 푹 쉬라는 말에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전화를 한 번 더 해야 한다. 형의 담임선생님에게도. 그리고 아까와 마찬가지로 쉬어빠진 목소리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행정실에 연락해 담임선생님의 번호를 받고, 다시 그 분께 전화를 하고. 건화를 바꿔달라는 말에 망설이다 형의 어깨를 톡톡 두드려 깨웠다. “어...?” 잠깐 잠들었다고 그 사이에 몸이 좀 나아졌는지 바람소리만 나던 목에 드디어 소리가 난다. 하지만 후거의 짝퉁 감기와는 차원이 다른 목소리다. 듣던 후거도 놀라 어깨를 움츠렸고, 선생님은 더 했다. 한 이틀간 푹 쉬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건화는 다시 잠들었다. 


연기를 끝마치고 나니 후거도 지친다. 어제부터 정신적인 소모가 심해 움직이지 않아도 온 몸이 피곤에 찌들었다. 멀쩡한 의자를 옆에 두고 바닥에 널브러져 앉아 침대에 턱을 기댄다. 형 옆에서 자고 싶은데 지금 그러면 감기에 옮을 것 같아 못하겠다. 만약에 내가 감기에 걸렸는데 엄마와 아빠가 관심을 주지 않는다면 죽어버릴 것 같아서 아프기 싫다. 당분간은 누구보다도 건강해야했다. 


졸려.


어제 그렇게 잤는데.. 아까까지도 멀쩡하던 정신이 갑작스레 졸음에 엉겨든다. 눈을 끔뻑끔뻑. 잠을 깨보려 두 눈을 부릅뜨고 눈알이 말라갈 때 까지 참아내던 것도 결국 실패하고, 망설이던 후거는 건화가 내어준 방에 들어가 이불을 깔고 누웠다. 삼십분만 자야지.


그리고 네 시간 반이 지나 일어났다. 구름에 가려져 흐리던 아침은 어디로 가고, 우산을 챙긴 보람도 없게 따갑게 얼굴로 내리쬐는 햇빛에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낮잠 치곤 이르지만, 꼭 낮잠을 길게 자고 일어나면 두통에 더 피곤해진다. 차가운 벽에다가 머리를 쿵쿵 박고 여전히 졸린 뇌를 조금 깨운 후에야 일어났다. 이미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교복은 구석의 책상 위에 곱게 접어놨다. 그러고 보니 좀 전 까진 몰랐는데, 오늘 일어나서 식사는커녕 물 한 방울도 넘기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어쩐지 목이 칼칼하더라. 깨닫고 나니 무섭도록 목이 말랐다. 목구멍 안이 쩍쩍 갈라지는 것 같다. 서둘러 문 밖을 나서 냉장고에서 문을 열어 물을 꺼내 마시면서도 눈은 형의 방에 닿아있다. 형은 아직 자고 있으려나. 아, 지금쯤이면 약국도 문 열었겠지. 병원에 가는 게 제일 좋을 것 같지만 지금 형의 상태로는 두발로 걸어서 병원까지 못 간다. 형 상태만 좀 보고 약국에서 약 사와야지. 입가를 타고 흐른 물방울을 손등으로 닦아내고 형의 방으로 향했다. 조심조심 문을 열어 안으로 고개를 빼꼼 넣어봤더니 침대에 앉아 휴대폰을 보고 있는 형에 놀라 문을 벌컥 열었다. 건화는 조금도 놀라지 않은 얼굴로 후거를 본다. 꼼짝도 못하던 인간이 갑자기 앉아있어서 후거도 당황하긴 했으나 건화의 안색은 여전히 병자의 그것이었다. 안 그래도 허연 얼굴에 생기라곤 쭉 빠져있다. 후거가 안으로 쪼로록 다가간다.


“언제 일어났어?”

“한 시간 전에.”

“그럼 나 깨우지...”

“뭐 하러 깨워.”

“아니이이... 그럼 나 약 사올까?”

“방금 사왔어. 안 그래도 돼.”

“아프면서 혼자 약국까지 갔어?”


고작 몇 시간 잤다고 그렇게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낫는 거야? 영 미심쩍은데 침대 맡에 약봉지가 보이니 믿을 수밖에 없다. 가까이 다가온 후거는 건화의 이마를 짚고, 제 이마도 짚으며 진지한 얼굴을 한다. 열이.. 열이 좀 내린 것 같긴 한데. 그렇긴 한데 아직 목소리는 갔네.


“어제 뭐했어?”

“어제.. 어제 창문 열고 자서 그런가봐.”

“바보야?”

“어.”

“허어어.”


창문을 얼마나 열고 잤기에 이래? 침대 맞은편에 있는 창문은 좀 큰 편이긴 하나 커튼도 있고, 이중으로 만든 창이라 바람도 잘 막아줄 터였다. 저걸 완전히 활짝 열고 잔 게 아닌 이상 이렇게까지 감기가 걸릴 일은 없잖아.


“진짜야?”

“진짜지. 내가 뭐 하러 널 속여.”

“그렇긴 한데...”

“학교 안 가 봐도 돼?”

“그냥 오늘 쉴래.”


하긴 맞다. 형이 날 속일 이유가 없구나. 쉽게 납득한 후거는 은근슬쩍 대화의 주제를 바꾸는 걸 눈치 채지 못하고 홀딱 넘어갔다.


“부모님은 뭐라셔?”

“음...”

“아니다. 말하기 힘들면 하지 마.”

“그건 형이 그래야 할 것 같은데.”


형 목소리 지금 어엄청 이상해. 막 갈고리로 퍽퍽 긁는 느낌이야. 후거의 적나라한 감상에 웃음이 터졌다. 병자의 얼굴로 두 눈을 접으며 웃던 건화는 곧 이어 터져 나오는 기침에 콜록대며 허리를 접었다. 벌떡 일어난 후거가 거실로 나가 얼른 물 한잔을 가져왔고, 그 물을 받아 마시고도 한참 뒤에야 기침이 멎는다. 그러는 내내 후거의 발이 동동 굴렀다. 일곱 살짜리 자식이 감기에 걸려도 이러진 않을 일이다.  


“이제 말하지 마! 나 혼자 말할래!”

“말 안 해도 기침 나오는데..”

“아, 시끄러.”

“알았어.”


어디 내가 말을 하지 말라는데 토를 달아! 앉아있겠다는 형을 굳이 침대에 눕히고, 덥다는데 이불도 목 아래까지 바짝 당겨 덮어주더니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이불장에서 두꺼운 이불을 하나 더 꺼내 위에 올렸다. 건화의 질린 얼굴이 더 사색이 된다. “너 나 깔아뭉개서 죽일 셈이야?” 하고 묻자, 후거는 짐짓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반복적으로 말했다. 말하지 말랬잖아!


이불 두 겹을 만들고 나니 조금 안심이 된다. 그래도 혹시 몰라 따뜻한 물을 준비해야하나 싶어 갈등하다 벌떡 일어나는데, 간신히 무거운 솜이불에서 팔을 빼낸 건화가 후거의 손을 잡았다. 말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려서 입은 못 떼고, 손을 붙잡는 것으로 표현하는 ‘옆에 있어 달라.’ 는 의미였다. 따뜻한 물주고 싶은데. 잠깐 닫힌 문을 보고 갈등하던 후거는 그대로 의자에 앉았다. 그리곤 입술을 오물대다 손가락을 꿈지럭거렸다. 형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아무 말도 안 했지만 실은 털어놓을 곳이 필요하다. 어쩌면 형이 붙잡은 것도 그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참을 말할지 말지 고민하던 후거는 “있잖아.” 하고 입을 떼고는 다시 뜸을 들인다. 이야기가 시작된 건 한참 후 였다.


“엄마랑 집에 갔는데. 엄마가 내가 게이인 이야기를 조금도 안 하는 거야.”

“응.”

“아, 형은 말하지 말라고.”

“.....”


착잡한 와중에도 그건 귀에 들려온다. 건화는 결국 입을 지퍼로 잠그는 흉내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귀여워서 뽀뽀라도 해주고 싶으나 지금 뽀뽀하면 감기를 완전히 옮겨 받을 것 같아 사양이다.


“그래서.. 내가 말했거든. 왜 게이이야기를 피하냐고. 그러니까 엄마가 그건 못 들은 걸로 하겠다는 거야. 아예 없었던 일로 하재. 근데.. 근데 그게 어떻게 돼. 이미 저지른 일이고. 그게 난데.”


그래. 그게 맞다. 그게 나이기 때문에 되돌릴 수 없다. 되돌린다 한들 똑같은 일만 반복 될 뿐이다. 없어질 수 있는 게 아니다. 후거는 한 때 [완전히 먼지처럼 사라지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싶지도 아무에게도 기억에 남지 않는 먼지가 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엄마한테 화나서 방 들어가서 문 잠그고.. 형이랑 통화 끝내고 바로 잤어.”


너무 화나서 잠도 안 올 줄 알았는데 되게 잘 잤어. 나 되게 이상해. 발끝으로 침대 발을 툭 친다. 건화는 입을 지퍼로 잠갔으니 아무런 대답을 못해준다. 대신 후거의 손을 잡고 그 위에 제 손을 올렸다. 열이 손까지 올라 뜨끈뜨끈하다. 너무 뜨거워서 슬며시 빼고 싶은 마음이 들어도 손을 얌전히 둔다. 목덜미가 간질간질하다. 형은 왜 하필 오늘 감기에 걸렸을까. 대체 어제 뭐 한 거야. 진짜 알몸으로 밖에서 냉수샤워 한 걸지도 몰라. 바보.


“집에 가기 싫어.”

“그럼 여기 있어.”

“그래도 집에 가야해...”


입을 삐죽 내밀며 우울한 목소리를 꺼냈다. 건화는 지퍼로 잠근 것도 잊고 대답한다. 눈초리를 주려던 후거도 더 이상은 포기한 듯 잔소리가 없다. 집에 가기 싫은데 집에 가야해. 엄마를 보기 싫지만 엄마를 피하면 안 돼.


“내가.. 같이 갈까?”

“형이 왜 같이 가.”

“내가 찾아가서 빌까? 무릎 꿇고...”

“형 드라마를 너무 많이 봤네.”


어쩐지 저녁마다 문자에 대답을 안 하더라. 맨날 드라마 보는 거였어.


“그래도.. 내가 뭐라도...”

“나 혼자서 해결할 수 있어. 형은 그냥 감기 안 걸린 몸으로 내 옆에 있어주기만 하면 되는 거야. 알아들었어?”

“..응..”


감기 걸린 곽건화는 필요 없다. 이번엔 처음이니까 간호해주는 거야. 다음에 또 감기 걸리면 이열치열이라고 확 밖에 내보내버릴 거야.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지껄였다. 엄마 생각을 하자마자 또 눈가가 찡 울리는 것 같아 쉴 새 없이 눈을 깜빡이고 머리로 기억도 못할 말들을 주절주절 뱉는다. 건화는 후거의 아무 말에도 꼬박꼬박 대답하며, 이따금씩 기침을 하다 물을 얻어먹었다.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어.”


혼자 머릿속에 되새기듯 중얼거렸다. 혼자 할 수 있다. 혼자서 해야 한다. 나와 엄마의 일이다. 



***



학교가 마칠 시간에 맞춰 집으로 향했다. 어느 때 보다 발걸음이 느리다. 당장이라도 발길을 돌려 뛰어가고 싶은 마음이 가득이었다. 스스로 도망치면 안 된다고 마음먹었으니 차마 그러진 못했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속도는 점점 더뎌진다. 고작 오 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돌고 돌아 십오분 만에 도착했다. 문 앞에서도 차마 문고리를 돌리지 못하고 서성이다 겨우 문을 열었다. 거실은 비어있었다. 없는 건가. 막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 할 때, 화장실 문이 열리며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아. 아.....


“학교 갔다 왔어?”


예상 외로 엄마는 평범한 주제로 말을 걸어왔다. 어떻게 대꾸하지. 오는 내내 머리가 꽉 차서 미칠 것만 같았는데 막상 닥쳐오자 아무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좀 전에 한 고민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었다.


“응.”

“씻어.”

“엄마 나랑 이야기 해.”

“씻고 이야기 해. 이따 아빠 오니까.”


아빠.

아. 잊고 있었어. 아빠도 있었지. 나 진짜 멍청이인가. 바보는 형이 아니라 나일지도 몰라. 아빠도 반대하면 어떡하지. 어떻게 된 게 문제가 하나 생기면 꼬리를 물고 달려들었다. 길을 가로막는 산맥들이 하나, 둘 줄을 이어 나타나니 시작도 전에 질려서 지친다. 고개를 끄덕인 후거는 바로 방안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오늘 한 거라곤 낮잠 자고, 형이랑 이야기한 것 밖에 없는데 벌써 피곤하다.


씻은 후에 잠깐만, 아주 잠깐만 누워 있을 생각으로 침대 안으로 기어들어갔다가 나도 모르게 잠들었다. 낮에 한참 잤는데.... 눕자마자 몸이 무거워지더니 순식간에 기억을 잃었다. 후거가 다시 깨어난 것은 뺨을 만지는 손길 때문이었다. 뺨이 간질간질하다. 그러더니 곧 억세게 뺨을 문지른다. 짜증과 함께 어떤 성추행 범인지 가만히 안 두려고 눈을 번쩍 뜨는데, 아빠였다.


“아빠?”

“깼어? 어제 집에 왔다며, 이 놈아.”

“출장 갔다 왔어?”

“넌 아빠 오랜만에 보고도 반갑지도 않아? 출장 갔다 왔어가 다야? 아빠는 너 보고 눈물이 다 나는데... 다 큰 놈이 아빠 속이나 썩히고...”


어제 엄마와 한탕 했더니 사실 모든 게 다 미적지근하다. 하긴, 거의 한두 달 만에 봤는데 너무 어젯밤에도 본 것 같은 반응이긴 했다. 몸을 일으킨 후거는 아빠의 목을 끌어안아 당기며 보고 싶었다고 꽤 깜찍한 소리를 하며 칭얼댔다. 조금 열린 문 밖이 환하다. 거실은 여전히 불이 켜져 있고, 아마 엄마도 저곳에 있을 것이다. 후거의 뺨에 잔뜩 뽀뽀하는 아빠의 품에서 이리저리 비틀어 빠져나오고 춥다고 변명하며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갑자기 거북해졌다. 아빠도 엄마처럼, 언제 돌변할지 몰라서. 이렇게 예뻐 해주다 어느 순간 후거의 본성을 무시하고 없는 체 할지도 모른다.


“저녁은 먹었어?”

“안 먹을래.”

“왜 안 먹냐. 어? 오랜만에 아빠랑 저녁 먹자.”

“...아빠. 문 좀 닫아봐.”

“왜?”

“할 말 있어.”


아빠가 먼저 후거에게 상처를 주기 전에, 스스로 먼저 방어를 하기로 했다. 무슨 말을 하든 의연하게 넘기려면, 갑작스런 상황을 겪으면 안 된다. 모두 후거가 의도한대로 흘러야만 가능했다. 얼굴 보자마자 이런 말 하는 게 좀 힘들 순 있지만. 어쩔 수 없다. 이불로 몸을 꽁꽁 여민 후거는 아빠가 방의 불을 켜고, 문을 닫은 후에 가까이 와 앉은 순간 입을 열었다.


“아빠. 내가.... 가출할 때 쓴 편지 봤어?”

“...보긴 봤지.”

“아빠는... 날 어떻게 생각해?”

“어?”

“혹시.. 내가 더럽게 느껴져?”


동시에 아빠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내가 무슨 소리를 들은 거냐는 반응이었다. 당황한 그는 눈을 끔뻑끔뻑 크게 떠 보이며 후거의 어깨를 붙잡는다. 정작 기가 막히고 뒷목이 당길만한 소리를 뱉은 아들은 멀쩡하게 앉아있는데 듣는 사람의 손이 벌벌 떨렸다. 최대한 침착하게 뱉으려 했지만 마음과 다르데 침착은 개나 주고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는다.


“무, 무, 무슨.... 네가 왜 더러워?”

“나 게이잖아..”

“아니, 그래도... 그래도 그건 아니야. 그런 생각하면 못 써.”

“엄마는 그렇게 생각 안하는 것 같은데.”

“...엄마가 뭐라고 했는데?”

“가서 물어 봐.”


시무룩한 아들의 대답에 피가 쭉 씻겨 내려가는 것 같다. 후거는 아빠가 그렇지 않다고, 아니라고 말해줘도 마음이 안 놓인다. 더럽다고 하는 것 보단 낫지만 이제와 감정이 무뎌지기라도 했는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아빠의 성격을 알아서 그런 걸 수도 있지. 아빠는 싸움을 싫어한다. 나와도 싸우기 싫어서 괜찮은 척 하는 걸지도 모른다. 


“엄마가 뭐라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빠가 잘 타일러볼게.”

“그게 타이른다고 되는 건가.”

“왜 또 그런 소리를 해. 그러니까 밥도 안 먹고 초저녁부터 자고 있었던 거네. 그렇지?”

“몰라..”

“엄마도 지금은 너무 놀라서 그런 걸 거야. 솔직히 아빠도 그래.

“그건 나도 알아.”


나도 안다.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다. 하지만 알아도 괴로우니 어쩔 수 없어서 그렇지.


“엄마가 너 나가고 얼마나 아팠는데...”

“왜 나 찾으러 안 왔어?”

“처음에는 우리도 화가 나서 그랬지. 너도 금방 들어올 줄 알았고... 벌레 하나 못 잡는 놈이 대체 무슨 마음으로 그렇게 오래 가출을 해.”


물론 후거도 그렇게 오래 가출 해 있을 생각은 없었다. 부모님이 금방 찾으러 오실 줄 알았다. 뻔히 학교를 나가는데, 휴대폰도 늘 충전해 놓고 가지고 다니는데. 그렇게 오랫동안 후거를 내버려둘 줄 몰랐다. 아무리 아빠에게 설명을 들어도 후거는 부모가 아니라 자식이니 이해할 수 없다. 속상한 마음에 손등으로 뺨을 닦아낸다.


“그러다가 네 엄마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고. 네 친구가 너 친구 집에 지내면서 학교 잘 다닌다고 말해줘서 몰래 점심시간에 좀 보긴 했어. 그래 뭐.. 솔직히 말하면 아빠나 엄마나 너한테 져주기 싫어서 네가 먼저 들어오길 바랐던 거야. 부모가 자식한테 져주는 게 맞는데...”

“.....”

“네 아빠나 네 엄마나 둘 다 아직 한참 멀었다. 안 그래?”

“...몰라. 잘래.”


부러 눈을 비비며 졸린 목소리를 꾸며낸다. 이어 아빠가 방금 일어나놓고 뭘 다시 자냐고 타박했지만, 일어나 불을 끄는 것을 보니 자라는 의미나 다름없다. 아빠가 왜 저러는 지 안다. 원래라면 날 자지 못하게 해야 했으나, 아빠의 머릿속도 후거처럼 가득 차서 버틸 재간이 없어 그러는 것이다. 저러고 나가서 엄마랑 이야기를 하겠지. 잘 자란 말도 없이 허둥지둥 나간 아빠는 조심스레 문을 닫을 여력도 없었나보다. 쿵, 제법 큰 소리로 닫힌 문. 여전히 거실의 빛이 빠져나온다. 이불에서 벗어난 후거는 문을 걸어 잠갔다. 그리고 조심스레 침대 위에 앉는다. 거실에선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마 안방에서 이야기를 하나보다. 거실 밖으로 나가 안방의 문 위에 귀를 대어보면 대화가 들릴 법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 어차피 두 분이서 할 이야기는 뻔한 것이니까. 



***



어제와 달리 도통 잠이 오질 않는다. 침대 위에서 벌써 네 시간을 보낸 후거는 사람이 취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자세로 누워보다 포기했다.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려 해도 손에 안 잡힌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마음이 뒤숭숭하고 머리가 꽉 차있다. 붕붕 머리를 흔든다고 빠져나오는 것들도 아니었다.


“하...”


추위에 시린 발을 의자 위에 올려 쪼그려 앉고는 담요에 완전히 푹 파묻혔다. 문제는 영 안 풀리는 것 같으니 영어 단어라도 외우려고 단어장을 펴놓고 보는데 역시나 외워지질 않았다. 고작 20개를 반복해서 읽는데 기억에 남는 것은 그 중에서 몇 개 안 된다. 머리가 굳었나봐. 바보가 됐나봐. 억지로 연습장에 따라 쓰고 입모양으로 읽으면서 머리는 딴 생각이다. 엄마랑 아빠가 싸웠을지 걱정 되고, 또 다른 한 편으론 앞으로 어떻게 해야 상황이 나아질지 고민이었다. 그리고 그 고민이 역시나 ‘지금은 모르겠다.’로 귀결되는 순간 건화생각이 불쑥 든다. 서랍에 든 곽건화 증명사진. 번뜩 든 생각에 바로 제일 아랫서랍을 열었다. 그 곳에는 여전히 건화의 사진이 들어있다. 어둠 속에서 꺼내 스탠드 불 빛 아래 사진을 관찰한다. 형은 대충 찍어도 잘생겼다. 자다 깬 얼굴도 잘생겼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곽건화는 좀 별로라서, 유독 증명사진 속 건강한 곽건화가 더 잘생겨보이는 바람에 도통 눈을 뗄 수가 없다. 공부는 완전히 뒷전으로 밀려나 영어 단어 대신 곽건화의 얼굴을 외우는 것과 같이 뚫어져라 쳐다본다. 이내 후거의 뺨은 화끈해졌다. 전에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형이랑 며칠 지내고 나니 얼른 졸업해서 같이 살고 싶다는 마음이 솟는다. 물론.. 모든 게 해결 된 이후에야 가능하겠지만. 그런 날이 오기나 할까. 아아.....


형의 사진을 보고 나서 좀 나았던 마음이 다시 우중충해졌다. 혹시 어릴 때처럼 구석진 곳에 파묻히면 좀 나을까 싶어 의자를 밖으로 빼내고 책상 아래에 기어 들어가 보기도 한다. 추워서 중간에 나와 담요를 두르고 책상 아래에 쪼그려 앉았다.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며 따라 하기엔 벌써 키가 180인 후거의 몸에는 조금 버겁다. 아무리 몸을 구기고 구겨도 정수리가 책상상판에 닿는다. 이럴 때마다 키가 큰 게 서럽다. 키 크고 싶다고 생각도 한 적 없는데. 이게 다 아빠가 키가 커서 그래. 


양팔에 이마를 대고 그 안에서 꾸역꾸역 버티다 목이 말라 기어서 책상 밖으로 나왔다. 사실 조금 부끄럽기도 했다. 아무도 안보지만 그냥....

집에 주스 있을까. 주스 먹고 싶은데. 물 말고.


살며시 문을 열어 빼꼼 고개를 내다보니 역시 아무도 없다. 하긴. 2시인데 엄마아빠가 안 자고 있을 리가 없지. 발끝을 들어 조심조심 나가 주방으로 향한다. 냉장고 문을 조용히 여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최대한 적은 힘으로 살며시 열어보려 했으나 결국에 힘 조절이 실패하고 퍼억 문을 열었다. 심장이 바닥에 가라앉을 뻔 했네. 어깨를 완전히 움츠리고 고개를 돌려본다. 아무도 못 들은 것 같다. 하아아. 냉장고 안에 주스는 커녕 물도 고작해야 컵 하나에 가득 따르면 다 말라버릴 양 밖에 없다. 이거라도 마셔야지 뭐....

컵 가져와서 마시면 귀찮으니까 그냥 병째로 마실래. 뚜껑을 열어 병을 들고 넘긴다. 병 크기가 작아서 그런가, 후거의 생각보다 물 양이 더 적다. 몇 모금 안 마셨는데 남은 게 요만큼도 안 돼서 그냥 나머지도 다 마셔버리고 탁- 냉장고를 닫고 도는데 맞은편 안방 문 앞에 사람이 서 있어서 비명소리도 못 내고 놀라 다리를 후들후들 떨었다. 냉장고를 짚고 서 있지 않았다면 그대로 뒤로 넘어졌을 지도 모른다. 


입만 뻐끔뻐끔. 놀란 마음에 손까지 벌벌 떨리는데, 문 앞에 선 사람이 엄마라는 것을 인지한 후에도 바뀌는 건 없다. 도둑만큼 무서운 게 엄마였다. 엄마는 가만히 서 있다 "왜 안 자." 한마디만 하며 주방으로 들어섰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엄마도 안 잔 것 같은데. 다가오는 엄마를 위해 자리를 피해주던 후거는 슬그머니 식탁 위에 물병을 내렸다. 평소의 엄마라면 제발 컵에 좀 따라 마시라고 잔소리 했을 테였다. 오늘은 입 대고 물 마시는 꼴을 봤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말이 없다.


“....”


엄마가 차라리 내게 관심을 거둬주길 바라면서도 완전히 관심이 사라지니 못내 속상하고 서럽다. 후거가 바라는 것은 결국 관심을 거두는 것이 아니다. 엄마가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후거에게 다가와 안아주는 것이다. 


엄마는 이 야밤에 커피라도 마시려는 것 같다. 커피포트 앞에 서서 갈아 놓은 원두와 거름망을 꺼낸다. 식탁 앞에 서서 입을 달싹이던 후거는 마음에 걸리던 질문을 겨우 꺼낸다. 한참이나 속 안에서 나를 괴롭히던 것이었다.


“엄마는 내가 밉지?”


적막한 새벽에 나온 물음은 천천히 엄마의 등 뒤에 닿았다. 엄마는 고개 하나 돌리지 않고 대꾸 한다.


“그래. 미워.”


그럴 줄 알았다. 실제로 듣고 나니 마음이 더 아프지만 다 예상했던 것이다. 엄마의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어주질 않으니 미운 게 틀림없다. 울지 않으려 했는데, 눈꼬리에 슬쩍 맺힌 눈물방울만은 어찌 할 수가 없어서 눈꼬리를 슥 닦고 대답했다.


“나는 엄마 안 미워.”


불과 몇 달 전의 후거만 해도 지금의 후거를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자기 자신이라도 그렇다. 그러니 엄마가 못 받아들이는 건 어쩔 수 없다. 설령 그게 아니라도 후거는 엄마를 미워할 수 없었다. 실은 조금 밉지만, 그 마음보다 나를 받아주길 바라는 간절한 바람이 더 크다. 


“자러 갈게.”


멀쩡하게 자리 잡은 의자를 괜히 다시 빼고, 안에 넣어두곤 뒤로 물러났다. 후거는 빠르게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다. 주방에 남은 것은 후거의 엄마 혼자였다. 커피가 담긴 통을 열던 손이 그대로 굳어 움직이질 않는다. 꽤 오랫동안 그 앞에 서서, 울음소리를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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