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차여차
곽호 썰, 소설 올리는 블로그 @tarack_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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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재 완 결 단 편 기 타 방명록



   여차여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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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까지 함께해주신 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달아주시는 댓글과 메세지도 너무 감사드려요 제가 비록 대댓은 못달아드리고 있지만 8ㅅ8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15.


아이들은 잘못이 없다.


유난히 어른스러운 아이들이 있다. 남을 배려하고, 떼쓰지도 않으며 말썽도 부리지 않는다. 갖고 싶은 것이 많을 나이인데 사달라는 요구조차 없으며 부모님을 위로까지 해주는. 그러나 그건 어른스러운 게 아니라 곪아있을 뿐이며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의 욕구보다 다른 이의 감정을 우선시하고 눈치 보느라 아무 말 못하는 것뿐이다.

어른스러운 것이 아니라 차마 아이들처럼 굴지 못하는 것이다. 전혀 기뻐하고 칭찬해줄만한 일이 못된다.


물리적인 폭력만이 아니다. 어린아이들에겐 감정을 불안케하는 모든 것들이 학대였다. 부모들의 불화, 아이에게 쏟아내는 한탄. 그런 것들은 어른스러운 아이를 만들어낸다. 


건화는 어른스러운 아이였다. 부모님 모두 자신을 떠나고 할머니에게 맡겨졌을 때도 불평 하나 하지 않았다. 사실 부모님을 붙잡고 울며 제발 가지 말라 소리치고 싶었지만 홀가분해 보이는 두 분의 얼굴을 보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들에게 자신이 짐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감정을 표현하는 것도 힘들다. 누군가 건화에게 무얼 좋아하냐고 물으면,, 건화는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망설였다. 우선은 내가 뭘 좋아하는지 가늠이 오지 않았고 , 둘째로 좋아한다고 한들 표현하는 게 쉽지 않다. 결국 글쎄. 하고 얼버무리는 것이 현실이었다.


후거를 좋아한다고 처음 느꼈을 때도 그랬다. 후거는 매사에 밝고 웃음이 많으며 적극적인 성격이었다. 낯을 가리더라도 금방 친해진다. 햇살 같다. 그 뒤를 따라다니는 음울한 그림자가 되고 싶지 않아서 건화는 일부러 후거 앞에서는 자신을 과장되게 표현했다. 무뚝뚝한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후거에겐 먼저 장난을 치고 손도 잡아보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눈다. 처음에는 꿈에서도 연기해야 할 정도로 힘든 일이었지만 곧 익숙해지고, 후거 앞에선 감정을 숨기고 억누르는 것을 그만뒀다. 좋아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었다. 



감기는 금방 나았다. 오랜만에 호되게 앓았는데, 그만큼 떨어지는 것도 쉽게 떨어져서 다행이다. 다만 후거의 표정은 여전히 나아지지 않아서, 후거가 아직도 부모님과 화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느꼈다.

그 사이 건화에겐 어머니의 전화가 두 번 왔고, 아버지에게는 결혼한다는 문자를 받았다. [재혼할 것 같다.] 용건만 담은 짧은 문장 아래에는, 수험생이라 공부에 바쁠 테니 굳이 오지 않아도 된다고 덧붙여있었다. 배려가 담긴 듯한 문장의 속 뜻을 파악햇다. 결국 오지마라는 말이었다. 결혼식장에 전처와 낳은 다 큰 아들이 있는 건 좀 곤란할 테니. 


[네. 그때는 시험공부 때문에 좀 바쁠 것 같아요.]


무던한 말투로 보냈으나 그 때 건화는 울고 있었다. 




부모님 두 분 다 온전히 살아계시지만, 건화는 열다섯에 부모님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후거가 부모님께 사랑받는 것이 좋다. 대리만족이라기 보단 내가 널 좋아하니, 너는 온전히 행복해야한다는 것에 가까웠다. 후거는 행복해야한다. 그늘진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 가족의 일이니 개입할 수 없어 속만 타들어간다. 


“주말에 우리 집 올래?”

“형네 집에서 뭐하는데?”

“그냥...”


그냥 같이 있고 싶어서 한 말 인데, 세세하게 물으니 대답할 말이 없네. 하긴. 스스로가 답답하기도 하다. 데이트 신청을 해야 하는데, 하루 종일 운동장 아니면 농구코트에 있었다 보니 남들은 뭘 하며 데이트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집에 오라는 소리만 하지. 그렇다고 후거와 농구를 할 수는 없고...


“알았어. 갈게.”

“진짜? 몇 시에 볼까?”

“음. 열두시? 아니면 한시?”

“편한 대로 와.”

“알았어.”


생각보다 쉽게 승낙해서 긴장한 보람이 없다. 은근히 무얼 바란 건지 어쩐지 허탈한 감정이 들어 바람 빠진 웃음을 내자 후거의 쳐진 눈매가 위로 솟는다. 왜 웃어? 새치름히 뱉는 목소리가 건화를 더 기쁘게 했다. 후거와 별 것 아닌 잡담을 나눌 수 있는 것에 감사하다. 건화의 인생에 감사한 것은 농구의 즐거움을 알게 된 것이고 또 하나는 후거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후거에 대한 사랑은. 건화의 마음속 저 끄트머리에 자리 잡은 검은바다를 잊게 해준다. 내 발 밑이 어쩌면 벼랑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멈추도록 만들었다.


“게임기 가져갈래.”

“게임 하지 말자.”

“왜?”

“그냥. 너랑 이야기하고 싶어.”

“뭐야. 기분 이상하게...”


텅 빈 강당 안에 떨떠름해 하는 목소리가 울린다. 후거는 뭐가 그리 부끄러운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곤 쑥스러운 말투를 애써 감추고 볼멘소리를 냈다. “난로 때문에 다리만 뜨거워.” 벤치 앞에 켜둔 전기난로를 보며 하는 말이다. 원래는 쓰면 안 되는 건데, 지금은 관리실에 아무도 없으니 괜찮다. 점심시간이니까 다들 점심 먹으러 식당에 갔고, 강당은 원래 수업시간이 아니면 대체로 비어있는 편이었다.

 

식당에 있어야 할 점심시간에 단 둘이서 강당에 앉아있는 이유는, 건화가 급식 식단표를 보더니 오늘 반찬들이 죄다 고기만 가득한 것을 보고 미리 도시락을 싸왔기 때문이었다. 사실 후거는 별 생각도 없었다. 애초에 심각하게 진지한 마음으로 채식을 하는 것도 아니라서. 곽건화가 설마 도시락까지 싸왔을 줄이야, 그리고 그 도시락이 꽤 볼만한 모양을 띠고 있을 거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다..


“뜨거워?”

“아니. 됐어.”

“아깐 뜨겁다며.”

“갑자기 된 것 같아...”


애초에 난로는 꽤 멀리 떨어져 있어서 뜨거울 만큼 열기가 강하지 않았다. 뜨거운 쪽은 다른 쪽이다.


도우미 아주머니가 많-이 도와주셨다는 도시락. 그 중에서도 건화는 손도 못 댔다던 호박말이를 젓가락으로 집어 건화의 입에 대어준다. 자꾸 느끼한 소리 하려는 입을 막으려는 속셈이었는데, 건화는 “잠깐만.” 하고 말하며 후거의 손을 내리더니 예쁜 눈을 느리게 깜빡이다 얼굴을 가까이한다. 천천히 건화의 얼굴이 다가올 때부터 느꼈다. 깜짝 놀라 눈알은 데그르르 굴러 창밖을 향하는데, 입술이 겹쳐지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란다. 누가볼까 당황한 후거는 입술이 부딪치는 상황에도 두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둘러보려다, 양 뺨을 붙잡고 다시 입 맞추는 건화 때문에 딴청을 필수가 없다. 결국 후거도 포기하고 눈을 질끈 감으며 건화의 팔을 조심스레 붙잡는다.


가끔은 현실을 잊고 싶다. 공상 속에서 살아도 좋다고 생각했다. 슬플 일도, 부정 받을 일도 없는 곳에서.



***



엄마는 그 뒤로 별 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예전처럼 편안한 분위기가 조성되긴 힘들었다. 아침, 저녁식사 내내 어색하고 비틀린 분위기가 집안을 떠나질 않는다. 저녁을 먹은 뒤 가볍게 나누는 잡담도 없어지고, 후거는 집에서 더더욱 공부에 열중했다.

그거 외에는 할 만한 게 없었으니까. 건화의 증명사진을 들여다보다 샤프를 다시 쥐고, 해설집 페이지를 넘기다가도 불안한 마음에 문을 바라본다. 굳게 닫힌 문은 후거에게 있어 하나의 방패이며 담장이었다. 막아줄 것이라곤 그 것 하나 밖에 없는 약하디 약한 방어막. 


이대로 살아도 괜찮을지 모른다. 엄마는 이해해주는 모습을 보이진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냉랭하게 내치는 것도 아니고, 그것마저도 시간이 흐르면 무뎌질 테니 이렇게도 괜찮을지 모른다.


하지만 후거는 초조하고, 무서웠다. 변화하는 것 없이 하루하루 지나가는 것이 두렵다. 아무것도 바뀌는 것 없고, 나아지는 것도 없는 시간이. 


별일 없이 흐른다지만 마음은 썩어 문드러지고 매일 같이 팽팽하게 당겨진 얇은 신경줄 하나를 붙들고 사는 것 같다. 예전엔 안 그랬는데, 요즘은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울음부터 터져 나왔다. 속이 상해 견딜 수가 없다. 


아무것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데. 엄마도, 형도 포기할 수 없다. 둘 다 내 인생에서 빠뜨릴 수 없는 소중한 사람들이었다. 둘 중 한명이라도 없는 삶은 생각할 수 없다. 엄마가 들으면 괴로워하겠지만, 그래도 그만큼 건화는 중요한 사람이다. 건화를 사랑하는 후거의 감정도 부정당할만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다른 한편으론 칭찬받아 마땅하지 않을까. 그 괴로움 속에서도 끝까지 사랑했고, 건화의 잘못을 용서했다. 어린애들의 하찮은 소꿉놀이도 아니었고, 다 큰 어른이라고 쉽게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기말고사가 바로 며칠 뒤로 다가왔다. 기말이 끝나고 일주일이 흐르면 방학이었다. 그리고 내년이 되면 삼학년은 본격적으로 대입이나 취업준비를 하게 된다. 내년부턴 아무리 날라리 3학년인 곽건화라도 자주 보는 건 힘들 것 같다. 형도 그 좋아하는 농구부도 잠시 쉬어야겠지. 


농구하는 것보다 너와 있는 게 더 좋다던 건화는, 실제로 후거와 사귀기 시작한 후부터 농구를 하는 시간이 많이 줄었다. 그리고 동시에 잠도 줄었다. 반은 후거 생각하느라 누워서 공상하는 동안 시간이 너무 빠르게 가기 때문이었고, 이유의 반은 밤늦게 잠깐 짬을 내어 혼자 농구를 하느라 침대에 평소보다 늦게 자리하기 때문이었다. 


기말고사 준비를 하며, 평소에 공부를 안 하던 녀석도 한둘씩 공부하는 시간이 늘어난다. 기말고사 성적이 나오면 3학년들은 이번 학기 마지막 입시상담을 하기 때문에 뒤늦게라도 불이 붙은 모양이었다. 진급한 이후로 내내 취업을 하겠다고 고수했던 건화도 어울리지 않게 문제집을 펴본다. 요근래 생각이 바뀌었다. 애초에 지난번의 상담에서 선생님이 지적하셨던 대로, 막연히 취업할거란 말만 하지 아무런 준비 되어있는 게 없다는 게 사실이었다. 건화도 결국은 어린애라 뜬구름만 잡고 있었다. 딱히 더 공부할 생각도 없고, 욕심도 없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사회인이 되는 것과, 2년, 4년 더 학생으로 남아있는 건 다르다. 


부모님의 지원에서 벗어나 완전히 혼자 살고 싶다는 생각도 이제 와서는 조금 변화했다. 건화가 일부러 전화를 무시하고, 문자 메시지에도 대답하지 않아도 끈질기게 연락하는 어머니에게 마음을 조금 열고 난 뒤 부터였다. 네가 어릴 때 해주질 못한 걸 더 늦기 전에 해주고 싶다는 이야기에. 어리광을 부리기엔 이미 한참 자라 무뚝뚝하고 낯선 소년과 어른의 경계에 서 있기에 살가운 아들은 될 수 없지만, 지원을 해주고 싶어 하는 어머니의 소원을 들어줄 수는 있다. 

그리고 실은 다른 거창한 이유를 대기보단 후거와 함께 대학생이 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후거는 공부도 잘하고, 공부 욕심도 많으니 분명 좋은 대학을 갈 게 틀림없다. 마음 같아서는 같은 학교에 들어가 지금처럼 쉬는 시간에 만나거나 점심시간에 데이트를 하게 된다면 소원이 없을 텐데. 대학은 고등학교보다 훨씬 자유로우니 강당에서 몰래 만나는 것이 아니라 학교 근처 카페에서 나란히 앉아서 함께 과제를 하거나 공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공부와 담 쌓고 살았던 자신이 후거와 같은 학교에 갈 꿈은 버리는 게 낫다. 너무 높은 꿈은 꾸지 말자. 괜히 도중에 넘어져서 좌절하지 말고...



아버지의 재혼 선물은 결혼식에 참가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했다. 재혼하는 상대는 이미 건화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자리를 마련해서 식사라도 하자는 말이 있었지만 거절했다. 혼자만 울타리 밖에 다른 사람으로 만나고 싶지 않다. 다시 그 비참한 기분을 느끼고 싶지도 않았다.

아버지에 대한 기대는 버리려고 노력하는 것과는 별개로, 결혼식이 다가오면서 달력을 확인 할 때마다 땅으로 꺼지고 있던 기분은 최근에 ‘기말’이 가까워지며 상승기류에 올랐다. 건화가 대학에 진학하기로 결정했다는 말에 기뻐한 후거가 같이 공부하자는 제안을 했기 때문이었다. 중요한 건 ‘공부’가 아니라 ‘같이’다. 같이 하는데 뭔들 안 좋을까.


거기다 며칠 전엔 키스까지 했다. 마지막으로 언제 키스를 했는지 까마득했다. 먼저 입 맞추고 부끄러워하는 후거의 뺨을 잡고 집중하라 했었지만 사실 건화도 손이 덜덜 떨렸다. 마음이 맞은 이후에는 처음 하는 것이었다. 그 이전에 여러 번 했었다지만 익숙함이란 것은 꼭 후거 앞에서만 사라지는 듯 볼 때마다 가슴이 떨리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어 후거만 가득 차는 것 같다. 강당에서 키스한 그날 밤. 건화는 마주 닿았던 입술의 감촉과 후거의 숨소리가 자꾸만 반복 되어 눈조차 감을 수가 없다. 신기하게도 눈을 감으면 후거의 얼굴이 떠오르는 게 아니라, 후거의 목덜미에서 흐르는 풋내가 주변을 맴돌았다. 사용하는 비누나 샴푸의 풀 향이 남아있는 것일텐데, 한 밤 중에 기억난 그것은 이상하게 건화를 주체할 수 없게 만든다. 흥분케 했다. 본인의 의지와 다르게 부푼 앞섶에 탄식한 건화는, 그대로 수음을 할 수도 있었지만 원치 않았다. 차마 저 혼자서 후거를 성욕의 대상으로 두고 싶지 않다. 죄책감에 몸서리치며 이불 속에 틀어박혀 성기가 잦아들 때 까지 웅크렸다.



***



“나 왠지 기말은 잘 볼 것 같아.”

“하루 종일 공부만 하는데 어떻게 못 봐.”

“지금 나 욕하는 거야? 형이랑 안 놀아준다고?”


먼지를 안은 강풍에 눈이 따갑다. 시력이 좋아서 안경은 안 쓰는데, 이럴 때 안경 끼고 있으면 좀 나으려나. 먼지가 들어간 것 같아 눈을 인정사정없이 구기며 가볍게 물었는데 건화는 정말 기분이 나빠서 인상을 찡그린 줄 알고 오해하는지, 고개를 크게 가로 저으며 사과했다.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열심히 했으니까... 그래서 잘 볼 수 있는 거라고...” 고작 인상 좀 쓴 게 뭐가 어떻다고 이렇게까지 당황하는지. 형 은근 겁쟁이 같은 구석이 있어. 팔꿈치로 형을 툭 치곤 앞으로 나아갔다. 건화의 말은 사실이다. 요즘은 건화와 단 둘이 있을 때가 아니면 늘 공부만 하고 있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문제집을 계속 풀고, 요약본을 내내 외운 적이 없다. 열심히 하는 편이긴 하지만, 적당히 놀면서 했는데 이젠 게임기 잡아 본 적이 아득했다.


“나 요즘 집에서도 공부만 해. 책도 안보고 게임도 안하고 티비도 안 봐. 어때? 걱정 되지?”

“엄청 걱정 되지.”

“그럼 어떻게 해줄 거야?”

“음... 뭐 해줄까?”


진지하게 고민한다. 후거가 공부에만 매달리는 이유도 결국엔 부모님의 반대 때문이니 말을 꺼내는 것이 조심스러웠다. 겨울은 한참 깊어지는 중이라 여름이었다면 아직 따가운 햇볕에 허덕일 시간이지만 지금은 한 밤중과 다름없다. 지나가는 사람도 거의 없고, 있어도 어둠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을 테니 걷던 발걸음을 멈춰 뒤돌아본 건화는 주변을 확인하곤 후거의 손을 꾹 잡는다. 둘 다 장갑을 끼고 있는 상황이라 맨 살갗이 닿지 않았지만 남자 둘이서 이러고 있는 게 낯뜨겁다. 후거는 눈썹을 모으더니 입을 길게 다물었다. 집 근처에서 이러는 건 좀 곤란해.


“해준다는 게 이거야?”

“이건 그냥 손잡고 싶어서.”

“오 분만 걸으면 형네집 나오는데?”

“밤이라서 안 보일걸. 우리 옷도 까만색이잖아. 장갑도.”


가로등이라도 없으면 어둠에 완벽히 가려질지도 모른다. 은근히 귀가 얇은 후거는, 그래도 집 근처에서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어차피 곽건화가 손잡는 일이 한 두 번도 아니고, 누가 보면 그냥 장난이라고 둘러대면 되니까 괜찮겠지.... 하는 마음에 그냥 두기로 했다. 조금 지나서는 오히려 후거의 기분이 붕- 떠서 잡은 손을 앞뒤로 흔들기도 한다. 원래는 시험기간이 제일 짜증나야하는데 이번 기말은 빨리 해치우고 싶다. 이미 마음만으로는 1등이니까. 


“어. 저기 가로등 이젠 불 들어오네.”

“그러게. 안 들어온 지 한참 됐는데. 공무원들 일을 제대로 안 하네.”


가로등이 띄엄띄엄 있는 길인데 그 중에 하나라도 불이 꺼져 있으면 무섭다. 어둠이 유독 길었다. 한동안 불편했는데 늦게라도 제대로 고쳐져서 다행이다. 다른 가로등들 보다 유독 밝게 빛나는 새 가로등과의 거리가 좁혀지자, 불빛 아래에서 멈춰 선 후거는 잡고 있는 건화의 손을 잡아당겼다.


“어?”

“여기 서 봐봐.”

“응?”


갑자기 생각났다. 가타부타 말도 없이 건화를 가로등 아래에 세우더니 본인은 한 발짝 물러난다. 건화가 따라가려 하자 두 팔을 뻗으며 가만히 있으란 제스춰를 취했다. 그래도 마음이 안 드는지, 고개를 양 옆으로 까딱인다.


“형, 턱 조금만 들어봐.”


그림자가 져서 안보여. 

대체 뭘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턱을 들라고 하니 들어본다. 살짝만 고개를 드는데, 그 순간 후거의 입 꼬리가 당겨진다. 동시에 두 눈도 가늘게 휘어지며 미소가 번졌다. 시선이 닿아있던 건화의 슬쩍 감긴 속눈썹이 환한 빛 속에서 짧게 흔들린다. 카메라의 뷰 파인더에 담으면 틀림없이 빛망울이 촘촘하게 만들어 질 것 같다. 


“형 속눈썹 주황색 됐어.”

“그거 보려고 여기 서라고 한 거야?”

“어. 예쁘니까.”

“남자 눈이 예뻐서 뭐해.”

“뭐 어때 예쁘면 좋지.”


픽 웃는 건화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가로등 불빛이 내려앉은 속눈썹. 만지고 싶은 충동이 들어 조심스레 눈가를 더듬다 환한 불빛 아래서 이러는 게 멋쩍은 기분이라 손을 내렸다. 가만히 감고 있던 건화의 눈이 후거의 손을 따라 아래로 내려간다. 


“배고파. 빨리 가서 밥 먹고 공부할래.”

“지금 공부 말곤 아무 생각 없지?”

“형도 공부해야 해. 대학 간다며.”


공부하라는 잔소리가 왜 이렇게 기껍게 들릴까. 미소를 지으며 가로등 불빛에서 벗어나 후거의 손을 잡았다. 아무도 없어서 그럴까. 이제는 손잡는 것을 내치지 않아 기쁘다. 전에는 싫어할 게 당연하다 생각하면서도 손을 뿌리칠 때 마다 내심 서운했었다. 내가 아직 철이 없어서 그런 거겠지.


“몇 시까지 집에 가야해?”

“열시?”

“얼마 안 남았네.”

“자고 갈까?”

“아니. 집에 가. 갈 때 데려다줄게.”

“너무해.”


빈 말이라도 자고 가라고 해야지. 찌릿찌릿 노려보며 토라진 목소리를 낸다. 물론 자고 가라고 말해도 그럴 생각 없다. 이 상황에 외박을 했다간 엄마가 또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까. 


“내가 형 덮칠까봐 못 자게 해?”

“아니. 내가 떨려서 밤 샐까봐.”

“어후...”


괜히 말 꺼냈어. 속 간지러워서 발걸음이 저절로 빨라진다. 왜 이렇게 빨리 가느냐는 건화의 물음에도 입을 꾹 다물고 형을 잡아당겼다. 나 좋다는 말인데 들어도 들어도 익숙해지지가 않을까. 언젠가 익숙함을 무장하고 두 배로 더 느끼한 말로 형을 괴롭혀줄거라 다짐하며, 언 바람을 비집고 골목길을 나섰다. 





시간이 흐를수록 시계로 자꾸만 눈이 간다. 열시 십분. 아침에 등교 준비를 하면서 형이랑 밤늦게까지 공부하기로 했다고 말했으니 부모님이 걱정은 안 하시겠지만, 그래도 이 시간이면 집에 가긴 해야 한다. 원래 가려고 했던 시각이 지나기도 했고.

아. 집에 가기 싫다. 

나가기 싫어서 꼼지락대며 연습장 끄트머리만 구겼다. 건화가 슬슬 가야할 시간이 아니냐고 물어도, 곧 가야지. 하고 대답만 하고 엉덩이를 떨어뜨리지 않고 있다가 결국 건화에게 몸이 들려 억지로 쫓겨났다. 나 그냥 자고 갈까? 아니. 집에 가. 가자. 데려다줄게.


겨울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

마스크를 껴도 눈과 이마는 추워 죽겠다. 그래도 겨울방학이 지나면 좀 따뜻해지겠지. 건화와 손을 잡고 집 까지 걸어가는 길이 썩 만족스러운데, 지금은 둘이라서 무섭지 않지만 후거를 집에 데려다주고 혼자 되돌아가야하는 건화를 생각하면 걱정이 든다. 고작 5분 거리라지만 거리가 짧다고 위험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냥 혼자 갈 수 있다고 말하는 게 좋을 텐데 겁쟁이라 차마 입이 안 열린다. 미안한 마음에 아무 말 없이 걷기만 하자, 건화는 후거의 침묵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는지 캄캄한 집 담벼락 앞에 선다. 바닥만 보고 걷던 후거의 고개가 들렸다.


“걱정 있어?”

“응?”

“어머니 때문에 그래? 아직도 아무 말 없으시지?”

“아....”


완전히 잘못 짚었다. 좀 전의 후거의 고민에 엄마는 요만큼도 들어있지 않았다. 최근 들어 주로 후거의 우울함은 대부분이 엄마에 대한 것이었는데, 하필이면 타이밍이 안 맞아 헛다리를 짚고 있으니 고마움보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난다.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웃은 후거는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형 혼자 집에 가는 길 무서울까봐 걱정하고 있었는데.”

“난 걱정 안 해도 돼.”

“걱정이 되지... 엄마는... 엄마는 늘 그렇지 뭐. 그냥 이대로 시간만 보내는 게 답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


이대로 보내기만 하는 것도 무섭지만 차마 용기가 나지 않는다. 엄마의 무관심이 두려웠다. 


“어머니도 네 생각 많이 하시고, 걱정도 많이 하실 거야. 너한테 아무 말씀 안 하시는 게, 너 상처받을까봐 일부러 그러시는 거 아닐까.”

“...난 잘 모르겠어...”


늘 활력을 담아내던 목소리가, 기운 없이 쳐져있다. 어두워 윤곽만 겨우 보이는 와중에도 후거가 얼마나 슬픈 표정을 하고 있는지 느껴진다. 답답하다. 할 수 있는 것은 고작해야 옆에서 위로해주는 것뿐이다. 찬바람에 얼어있는 뺨을 감싸 쥐고 엄지로 눈가 아래를 문지른다. 물기는 없었다. 다행히 울지는 않지만, 이미 너무 익숙해져 울음조차 나오지 않을 시기가 있다. 건화가 겪어봐서 안다. 그래도, 후거는 저와는 다르다. 체념을 할 시기는 겪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만 했다. 후거의 어머니는 분명 아들을 충분히 사랑하시니, 곧 인정을 해주시거나 포기하실 게 분명하다. 

명치가 꽉 막힌다. 부모님이 이혼하기 전 어머니가 매일 같이 우울에 시달리는 모습을 볼 때도 그렇듯, 사랑하는 사람이 힘들어 하는 것을 보면 숨이 막혔다. 어머니는 나 때문에 힘들었다. 계획에 없던 임신으로 어머니가 꿈꾸던 삶이 비틀렸다. 나 때문이었다. 후거가 지금 겪는 고통도 내가 저지른 과오를 떨어뜨릴 수 없는 일이니, 역시나 반쯤은 나 때문이다.

내가 미안해.

말을 하면 분명 후거는 화를 내고, 나중에는 또 속상해하겠지. 내 잘못이 아니라며 울지도 모른다.

뜨거워지는 눈을 크게 떠 보이다 질끈 감는다. 울지 않으려 애쓰며 후거를 품에 가득 끌어안았다.



***



어제 일찍 자서 그런가. 학교 가던 평소의 시간대로 일어났다. 주말은 더 자야하는데. 억지로 잠을 청하려고 노력해도 정신만 도리어 맑아지니 포기하고 침대 밖으로 빠져나온다. 

잠옷 바람으로 스멀스멀 바닥으로 내려온 후거는 어제 대충 구석에 처박아뒀던 가방을 잡아 열었다. 어제는 형이랑 공부하려고 했는데, 형 얼굴만 훔쳐봤는지 진도가 거의 안 나갔다. 필요한 책들은 책상 위에 올려두고, 가방도 걸어두고 나자 할 일이 없어진다. 자연스레 눈은 문으로 닿았다. 그리고 다시,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방 밖으로 나가는 것이 무서워진다는 것은 정상적인 삶이 아니다. 후거 본인도 알고 있다. 저 방 밖에 엄마가 있기 때문에, 엄마와 마주하는 것이 무서운 것이었다. 정체된 삶을 살고 싶지 않으면서도, 완전히 바꾸기엔 용기가 나지 않는다.

벽에 머리를 대고 다리를 모아 웅크리고 눈을 감았다. 어제 집에 도착했을 때 엄마는 자고 있었고, 아빠 혼자 거실에서 티비를 보고 있었다. 많이 힘드냐는 아빠의 위로에,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괜찮다고 대답 했을 것 같다. 하나도 괜찮지 않지만. 


방 안에서 내내 버티기엔 도저히 배고픔이 해결 되지 않아 밖으로 나왔다. 꼬르륵 소리도 소리지만 뱃가죽이 들러붙는 것 같으니 버텨낼 수가. 생각해보면 어제 7시쯤 저녁을 먹고 나서는 물 한모금도 먹지 않았으니 배고픈 것이 당연하다. 다만 나오자마자 엄마를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빨리 일어났네.”

“배고파서...”

“앉아있어. 밥 차려줄게.”

“응...”


식탁에 앉아 고개를 숙였다. 집에서 밥 하나 먹는 것조차도 눈치가 보인다. 가슴이 꽈악 졸려 숨 쉴 수 없을 것처럼, 발이 땅에 닿지 않고 허공에 머무르는 것처럼 불안하다. 후거는 식탁 끝을 꽉 쥔 채로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딱히 시선을 둘만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뭐라도 하고 있어야 어색한 마음을 달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행동이다. 그리고 식탁 위에 차례차례로 반찬이 오르더니 마지막으로 밥그릇이 오르며 흐른 엄마의 말에 어깨를 움츠렸다. 


“언제까지 엄마랑 눈도 안 마주칠 거야?”

“.....”


그러고는 맞은편에 앉는다. 이건 밥 먹을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잖아. 이 상황에 목구멍으로 밥이 넘어갈 리가. 하필이면 지금 말을 걸어오는 엄마가 원망스럽다. 후거는 물 잔을 들어 물만 꼴깍 삼킨다. 엄마가 무슨 말을 꺼낼지 무섭다. 뒷목이 서늘해졌다.


“시험 다음 주지?”

“응..”

“공부도 쉬엄쉬엄해. 엄마는 너 몸 상해가면서까지 1등하는 거 안 바래.”

“응...”


손을 꼼지락댄다. 엄마는 크게 숨을 마시고 말을 이었다.


“엄마도 요 며칠... 생각 많이 하고 고민도 많이 했어. 지금은 내가 너한테 좀 전에 말한 것처럼 공부 하면서 몸 상하는 거 싫다고 했지만, 너 이 학교 입학할 때만해도 엄마가 너한테 공부하라고 강요 많이 했던 거 알아.”


밥 먹어도 돼. 먹으면서 들어.

식탁 아래로 가만히 손 내리고 듣기만 하고 있자, 밥을 먹으면서 들으라고 하지만 이대로 먹다간 분명히 체할 것 같다. 그렇다고 무시하고 가만히 있기에도 뭣해서, 젓가락을 들어 밥을 깨작댄다. 공부 이야기가 나와서 다행이면서도 한편으론 의아했다. 그런 쪽으로 투정부린 적은 없는데.


“엄마가 너 공부 잘한다고 주변에 자랑하고 다닌 게 너한테는 부담도 됐겠지.”

“... 아닌데..”

“왜 아니야. 그래도 엄마는... 네가 정말 자랑스러워서 그랬어. 내 아들이 이렇게 똑똑하다고 자랑하고 싶어서. 근데... 너 이렇게 돌아오고, 엄마랑 사이가 이렇게 나빠져서, 하루에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 나누는 상황이 오니까 너한테는 엄마가 좋은 엄마였는지 모르겠네.”

“....”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 걸까. 어떤 말이 나올지 몰라 초조하다. 젓가락으로 밥을 흐트러뜨리기만 하고 입에 대지는 않았다. 의자 다리에 대고 있던 발을 바닥에 콩콩 찧으며 입술을 물었다.


“네가 편지 쓰고 집 나갔을 때, 엄마랑 아빠가 얼마나 놀랐는데.”

“....”

“내 아들이 아닌 것 같았어. 우리 후거가 그럴 리가 없는데. 얼마나 말 잘 듣고 착한 아들인데. 그 생각부터 들었어, 엄마는. 엄마는.. 마흔 넘게 살면서 한 번도 그런 걸 본 적이 없거든. 남자가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본적이 없으니까 생각도 안하고 살았지. 설마 내 아들이 그럴 거라고 예상도 못했고... 다른 사람들이 알게 돼서 남들이 너 흉보면 어떡할까 겁부터 나. 내 아들이 이렇게 착한데 남들이...”

“나는 그런 거 괜찮아. 다 각오했어. 난 딴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 건 신경 안 써. 엄마가...”

“그래 알아. 엄마가 이러니까 니가 더 힘들겠지. 근데 엄마 마음은 또 안 그래. 내 자식 누가 욕하는 것도 걱정되고, 너 앞으로 당당해지지 못할까봐 걱정돼서 여기가 답답해서 못 살겠어. 숨 막혀.”


주먹으로 가슴을 친다. 느린 박자로 쿵- 쿵- 내려치는 무거운 소리에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 의문이 들었다. 이렇게 걱정하게 만들고, 괴롭게 하는 게 잘하고 있는 짓일까. 속이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커밍아웃을 한 게 오히려 부모님께 폐가 된 게 아닐까. 너무 섣부른 판단을 한 걸까.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나 혼자 힘든 건 이겨낼 수 있는데 주변사람들에게 까지 고통을 주고 싶진 않다. 눈가의 눈물을 훔쳐내곤 숨을 폐부 깊숙이 들이쉰다. 


“너 그렇게 집 나가고, 책도 찾아보고 인터넷에도 찾아봤어. 게이들이 어떻게 사는지. 엄마는 너 그렇게 크는 거 원하지 않아. 네가 평범하게 컸으면 좋겠어. 네가 공부 못해도 좋고 엄마 속 썩여도 좋으니까...”

“엄마 근데.. 나도 고민 엄청 많이 했어. 나도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 했는데, 어쩔 수가 없었어. 나는 남자를 좋아하는데, 엄마 말대로 평범하게 살기 위해서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랑 결혼하면 안 되잖아. 그게 더 나쁜 일이잖아.”

“...후거.. 너 지금 좋아하는 애 있지.”


엄마의 물음은 의문 보단 확신이 담긴 것이었다. 말투에서 묻어난다. 엄마가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게. 흐르던 눈물도 멈추고 손끝이 바짝 굳는다. 긴장되어 턱이 덜덜 떨릴 정도였다. 숨소리도 멎어들고, 귓가에 삐---- 이명소리와 함께 익숙한 이름 하나가 엄마의 입에서 흐른다. 건화. 곽건화.


“어제 학교에 너 데리러 가려는 길에 봤어. 건화랑 같이 있던데.”

“.....”

“그거 보고나서야 네가 친구네 집에서 공부하고 온다고 말한 게 기억났어. 어제 건화네 집에 있다 왔어?”

“......응... 엄마 근데, 나 형이랑 이상한 짓 안했어. 정말이야. 어제 정말로 그냥 공부만 하다 왔어. 진짜야...”


엄마가 어디서 봤는 진 모르겠다. 어차피 집에 오던 길이었고, 워낙 길이 많은 곳이니 어디서든 충분히 볼 수 있다. 그걸 모르고 있었다. 생각이 너무 짧았어. 깊게 고려하지 못하고 한치 앞만 보고 행동했다. 저린 손을 꽉 쥐었다 펴며, 횡설수설 말을 늘렸다. 너무 빠르게 말하느라 발음이 뭉개진 것이 대다수였고, 엄마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후거 혼자 변명했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어제 형과는 정말로 공부만 했다. 같이 밥 먹고, 숙제하고, 문제집을 풀었을 뿐이다. 엄마가 가지고 있을 편견과 오해와 비슷한 것들은 전혀 하지 않았다. 억울하다. 다른 무엇보다 그렇게 오해할까봐 마음이 무너졌다. 그런 의미로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후거는 건화와 영원히 섹스나 키스를 할 수 없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래도 좋다. 옆에 있을 수만 있어도 된다. 하지만 엄마가 그런 후거의 마음까지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엄마, 나는 형 진짜 좋아해. 예전부터 좋아했어. 내가 형을 더 좋아해. 우리 같이 놀아도 별 거 안 해. 같이 밥 먹거나, 학교 이야기만 하는데...”

“괜찮아. 너한테 그런 거 물으려고 한 말 아니야.”

“그래도... 그래도...”


멈췄던 눈물은 다시 속수무책으로 뺨을 타고 흐르고, 너무 놀란 나머지 딸꾹질까지 시작했다.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후거에게, 엄마가 물 잔을 내밀어 받아 마시면서도 머릿속은 엉망이다. 엄마가 형에게 나쁜 소리를 할까 무서웠다. 나와 만나지 말라고 한다거나, 혹은 반대로 형과 만나지 못하게 저지할까봐 머릿속이 하얗다. 입술만 덜덜 떤다. 엄마가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라고 해도, 귀로는 들었으면서 그것이 머리까진 향하지 않았다. 한모금도 남김없이 마신 물 잔을 테이블 위로 올린다. 가벼운 플라스틱 컵을 들고 있어도 손이 떨려 떨어뜨릴 것 같다. 두 손으로 겨우 잔을 내리고, 떨리는 손을 감추려 식탁 밑으로 감춘다. 그러나 겁에 질린 얼굴까진 감출 수 없었다. 흐려진 초점으로 굳은 얼굴.


“나쁜 의미로 한 말 아니야. 너나 건화한테 뭐라고 한 거 아니니까.. 응? 그런 의미가 아니라... 어제 건화랑 너랑 손잡고 길 걷는 걸 봤는데, 네가 너무 행복해보여서 그랬어. 너 집에서는 기죽어서 엄마 눈만 피해 다니고, 예전에는 학교 갔다 돌아오면 재잘재잘 떠들어대더니 요즘은 바로 네 방에 들어가서 밥 먹을 때 아니면 나오지도 않잖아. 근데 건화랑 있을 때는 시끄럽게 말도 많이 하고, 건화랑 손잡고 걸어 다니면서 웃는 거 보니까 엄마가 너한테 얼마나 모질게 굴었는지 깨달아서 그랬어. 왜 이렇게 떨어... 너한테 뭐라고 하는 게 아니야. 엄마가 너무 미안해서 그래.”


정신이 없어서 혼란이 온다. 엄마가 뭐라고 하는 건지 정확하게 이해가 가질 않았다. 눈물을 닦아내면서도, 그만 떨라는 엄마의 말이 무색할 정도로 심하게 떤다. 잃고 싶지 않았다. 후거는 이미 한번 건화를 잃었었고,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엄마가 이해할게.”

“으응..?”

“다 이해 못 할 것 같은데.. 그래도 엄마가 노력해볼게. 네가 행복한 게 가장 중요하지 뭐가 중요하겠어... 내 눈엔 아직도 네가 걸음마 하는 어린애 같아도 이제 고등학생인데. 언제까지 내 마음대로 널 키우겠어. 그러니까 후거 너도 엄마 이해해줘. 엄마가 그동안 너한테 모질게 군 거 다 너 생각해서 마음아파서 그런 거야.”

“....나한테 화 안 났어?”

“지금은 아니야.”

“진짜?”

“그래....”

“형, 형한텐 아무 말도 안 할 거지?”


미안하다고, 이해해주겠다는 말을 들어도 걱정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두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배배꼬며 심장을 졸인다. 후거가 자꾸만 건화에 대한 걱정을 놓지 못하는 모습에 쓴웃음을 지은 그녀는, 헝클어진 아들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주고 어깨를 도닥인다. 키우면서 혼도 거의 내지 않았다. 혼 날만한 일도 저지르지 않았고, 그 누구보다 착하고 영리한 아들이었다. 그러니 가출에, 커밍아웃에, 돌아와서 반항하는 모습에 더 화가 났다. 생각해보면 그건 반항도 아니고 정당하게 의사를 표현한 것뿐인데. 언제까지 자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하나 돌봐줘야 하는 아기로 생각해서는 안됐지.  


“예전에도 말했잖아. 엄마는 건화 마음에 들어.”

“....엄마, 나 형 엄청 좋아해. 형도 나 되게 좋아하고...”

“알았어. 건화한텐 아무 말도 안 할 거야. 네가 나중에, 네가 그러고 싶으면 건화 데리고 집에 와서 저녁이라도 하자. 아빠한텐 엄마가 말해둘게.”


흐으- 흐으윽...

그제야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소리 없이 눈물방울만 뚝뚝 흐르던 눈물도 샘이 되어 뺨을 타고 줄줄 흘러내린다. 입을 꾹 다물고 몸을 떨던 후거는, 자리에서 일어나 반대편에 앉은 엄마에게 다가가 꽉 끌어안고 울음소리를 터뜨렸다. 미안해. 엄마 속상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작아진 엄마를 세게 끌어안으며, 내가 자란만큼 엄마는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파왔다. 가출하기 전 마지막으로 느꼈던 엄마의 마른 몸. 



***



수요일부터 시험인데 주말을 통으로 날려 보냈다. 두 달간 가족과 떨어져 지냈고,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섞여들지 못하고 겉돌았으니 하고 싶었던 말이 켜켜이 쌓여있었다. 급식이 점점 맛이 없어진다거나, 날씨가 춥다는 둥의 소소한 대화였다. 겪은 일상에서도 건화와 있었던 것만 쏙 뺐는데, 아직까진 엄마에게 형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건 불편하고 조심스럽다. 그건 엄마도 이해해줄 거라 생각했다.

물론 쌓아온 벽이 금방 허물어지긴 힘들다. 아직도 엄마가 어색하고 예전만큼 편하진 않았지만 건화와 금방 화해했듯, 엄마와도 금방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주말 밤 내내 침대에 누워 건화에게 속닥속닥 엄마 일을 해결했다고 자랑했고, 건화는 삼십분 간 몰아치듯 쏟아지는 후거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휴대폰이 뜨거워서 잠시 허공 위에 휘휘 흔들어 별 의미 없을 것 같은 식힘 후에 형의 비밀을 듣게 됐다. 몇 년간 거의 연락이 없었던 어머니와 연락이 닿았고, 아버지는 재혼을 한다는 소식이었다. 어머니 이야기는 축하해줘야 마땅했지만 곧이어 나오는 재혼 소식에 입이 다물린다.  “들은 지 좀 됐어. 이번 달 안에 결혼하셔.” 무덤덤한 목소리에 왜 이야기 하지 않았냐는 물음은 나오지 않았다. 왜 형이 그동안 숨기고 있었을지는 뻔했으니까.


- 너무 걱정 안 해도 돼. 난 별로 신경 안 써.

“정말이야..?”

- 정말이지. 아빠랑 떨어져 산지 몇 년인데 뭐. 재혼이 나쁜 것도 아니고 나 때문에 재혼하지 말, …라고도 할 수 없잖아.


건화의 머릿속에 들어가 보진 못했으나 왜 말을 하다 멈칫한 건지 가늠이 간다. 형이 아버지에게 하지 말라 말을 한들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새삼 느껴지는 부조리한 사실에 울컥 울분이 솟는다. 울지도 않고 담담하게 뱉는 형을 대신해 울고 싶다. 하지만 후거가 건화에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기로 결정한 이상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 후거가 그렇듯, 건화도 후거의 약한 모습을 보면 배려만 하게 되고, 본인의 감정을 감추기 시작할 것이 분명했다.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애써 눈물을 팔뚝에 훔치곤 코를 킁- 풀어낸다. 수화기 너머 웃음소리가 들렸다. 또 감기에 걸렸냐는 목소리에 다시 코를 풀어낸 후거는 볼멘소리를 낸다. 감기에 호되게 걸려서 나한테 간호 받은 건 어디의 누구인데 감쪽같이 잊은 것 마냥 말을 할까.


“난 누구랑 달리 감기 걸려서 앓아눕진 않아.”

- 아닌 것 같은데.

“아니야. 맞아. 형이 나보다 더 약해.”

- 그래. 그런 걸로 치자. 내일 학교 가야하는데 이제 자야하지 않아?

“아직 열한시잖아. 형은 벌써 자? 할아버지야?”

- 몸이 약해서 일찍 자야겠어.

“삐쳤어?”


픽,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 아니라고 가볍게 대꾸한 건화는 곧 부모님과 화해해서 다행이라는 말을 하며 조용해진다. 잠든 건 아닌 것 같고, 침대에 눕는 것 같다. 부스럭 거리는 잡음이 들린다. 베개 위에 휴대폰을 내려두고 눈을 감았다. 오래 지나지 않아 다시 목소리가 들려온다.


- 아까 내가 한 말, 정말 별 거 아니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알았어.”

- 나도 어머니랑 다시 연락하고, 내년 보러 오신다고도 하셨어. 이제 별로 걱정도 없고, 아. 대학 걱정은 남았네...

“지금까지 안 한 거 몰아서 하는 거야.”

- 그런가.


이번엔 다른 의미로 힘이 빠진 웃음이었다. 형도 드디어 입시 스트레스에 쌓이는 구나.


- 우리 진짜 전화 끊자. 내일 지각 안 하려면 일찍 자야해.

“나는 아직 자기 싫은데?”

- 너 그러고 전화 끊으면 바로 잘 거잖아.

“아니야. 나 지금 눈 엄청 말똥말똥해.”

- 공부해. 그럼.

“아니이이. 그런 게 아니라 통화를 계속 해줘야지. 이럴 땐 내가 잠들 때 까지 계속 통화해야하는 거야.”

-그럼 나는 언제 자는데?


와. 진짜 대화가 안 통하네. 형 여태껏 연애 한 번 못해본 것도 아니고 어떻게 저렇게 아무 것도 모를 수가 있을까. 답답해서 정말 잠이 홀라당 깼다. 벌떡 일어나 벽에 머리를 처박았다.


“내가 잠이 안 온다고 하면 자장가를 불러준다거나, 어? 아니면 우리 집에 오는 성의를 보여야지.”

- 저번에 그러다 감기 걸렸는데...

“어?”

- 아니, 아니야...

“형 설마.. 저번에 감기 걸린 거...

- 아닌데. 아니야... 내가 말했잖아. 그거... 창문 열고 자서 그런 거라고.


어쩐지 이상하더라...

곽건화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 말에 해답을 찾았다. 고작 창문 조금 열고 잤다고 24시간 내내 밖에서 추위와 맨몸으로 맞대결 한 사람 마냥 벌벌 떨고 몸이 불덩이였던 이유가, 나 때문에 밖에 내내 있었던 바람에 감기에 걸린 게 분명했다.


“왜 말 안 했어??”

- 진짜 아니야. 우리 자자. 잠 온다. 그치?

“잠 안 오는데?”

- 난 일찍 자야겠다. 그래야 키 크거든.

“형..!”


씨이... 더 클 키도 없으면서. 매정하게 끊어진 휴대폰을 내려다보곤 베개 밑으로 쑥 넣어버렸다. 내가 왜 형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을까. 하아... 그렇다고 이미 나은 감기를 어떻게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거고. 그러게 왜 쓸 데 없는 짓을 했어. 괜히 감기나 걸리고. 아, 복잡해. 나도 그냥 잠이나 잘래. 조금도 졸리지 않지만 눈 감고 있다 보면 언젠간 잠들겠지. 

꾸역꾸역 양을 세며 잠든 후거는 다음날 저녁 건화에게 화분을 하나 선물했다. 감기에 걸리게 한 장본인이니 미안한 마음에 주는 것이었다. 




***



아침은 식탁 위가 온통 달걀이었다. 나는 프라이가 먹고 싶다고 했을 뿐인데, 엄마와 아빠는 할 수 있는 모든 달걀요리를 해서 식탁에 올렸고, 그 모든 달걀을 모두 먹어치워야 했다. 애인이 있어 한창 예민하고 관리 할 시기인 후거는 최대한 오랫동안 양치하고, 섬유향수도 허공에 뿌려 잽싸게 뛰어 향수가 점점이 내리는 공간으로 몸을 넣었다. 그래도 몸에도 달걀 냄새가 날까 걱정이다. 엄마는 유난 떨지 말라고 했지만 유난이 아닌 걸.


시험 마지막 날이었고, 후거가 제일 자신 있는 과목들만 치는 시간표에 다음 주면 방학이다. 게다가 금요일이니 오전에 시험만 치고 오후부터 쭉 놀 수 있다. 기분이 좋지 않을 수가 없다. 중간고사는 울면서 쳤는데, 덕분에 성적도 말아먹었지만. 기말고사는 느낌이 좋다.


시험이 끝나면 형이랑 만나기로 했다. 시험 치기 전날에 약속했던 건데, 연애 처음 하는 것도 아니고 고작 데이트 약속 하나에 설레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리고 말이 데이트지, 실제론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눈에 보이는 곳에 앉아서 대화하는 게 끝인데 뭐. 그런 건 데이트라고 할 수 없어. 기대도 말아야지. 했지만 어제 잠들기 전에도 기대했고, 그 전날 저녁에도 설렜고 데이트 약속을 잡은 그 순간도 기분이 좋았다. 불치병인가보다. 낫기는 글렀다. 


무난하게 시험을 마무리한 후거는 일부러 반 애들이 다 나갈 때 까지 기다렸다 제일 마지막에 빠져나왔다. 그리고 건화와 만나기로 약속한, 운동장에서 제일 큰 나무 밑 벤치로 향한다. 형은 아직 못 마쳤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미 앉아있다. 저기 멀리에서도 곽건화의 뒤통수는 특별하다. 고작해야 커다란 점으로 밖에 보이지 않아도 구분할 수 있었다. 

와악-!

하고 깜짝 놀래켜주고 싶은데. 살금살금 가까이 다가가서 보자 통화중이다. 아쉽네. 통화 중에 장난치면 민폐니까, 조심스레 걸어온 것이 무색하게 팔을 뻗어 건화의 시선을 돌린 후에 “안녕.” 하고 인사하고서 얌전히 옆자리에 앉았다. 그것도 방해될까봐 벤치 맨 끝에 앉아 힐끔힐끔 쳐다본다. 건화는 괜찮다며 옆에 앉으라고 옆자리를 툭툭 치지만, 학교 안이니 아직은 내외하기로 했다.


“네. 네 끊을게요. 네. …네. 네.”


누구랑 통화길래 저렇게 딱딱하게 받지. 아직 학교 졸업도 못했으면서 무슨 직장인 업무 통화 하는 것처럼. 

모처럼 가벼워진 가방을 옆자리에 내려앉고 다리를 살랑살랑 흔든다. 무슨 바람으로 오늘은 날씨까지 좋다. 하늘도 맑고, 비교적 따뜻한 겨울이다. 장갑과 목도리를 하지 않아도 춥지 않았다. 고개를 높이 꺾어 하늘을 올려다보다 교문으로 눈을 돌렸다. 우르르 빠져나가던 우리 엄마의 말로는 “쥐색” 교복무리들도 잦아들었다. 시험을 끝마친 날 까지 학교에 오래 머물 사람은 없으니까. 다시 다리를 흔들며 건화를 본다. 건화는 막 휴대폰을 끊어 슬라이드를 내린다. 한손으로 툭 무심하게 내리는 그 모습이 후거를 꽤나 부끄럽게 했는데, 그것보단 고작 휴대폰 닫는 걸 보고 새삼 반하는 제 자신이 더 부끄럽다. 그래서 입을 쭉 내밀었다.


“뽀뽀해달라고?”

“아닌데?”

“그럼 입은 왜 내밀어?”

“내가 내 입 내미는데 뭐.”

“아니면 말고.”


부끄러워서 쭉 내민 입술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건화가 엉덩이를 옆으로 옮겨 가까이 오려고 하기에 가방으로 재빨리 막았다. 내외해야한다. 강당에서 키스한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그 때는 아무도 없었다. 여기처럼 탁 트인 곳도 아니었고. 물론 그렇다고 건화가 진심으로 뽀뽀하려고 한 건 아니겠지만.


“형 시험 잘 쳤어?”

“말 하지 마..”

“올해 대학 못 가겠다.”

“안 그래도 그럴 것 같아.”


공부에 손 놓고 살았으니 올해에 대학 가는 건 글렀다. 애초에 기대도 안 했던 부분이었다. 선생님과 제일 최근 입시 상담했을 때도 들은 이야기였고.


“괜찮아. 형은 잘생겨서 조금 늦게 대학가도 인기 많...”


조금 풀이 죽어 보이는 건화의 어깨를 조물조물 주물러주며 기운을 북돋아주려 했던 후거는, 술술 나오던 이야기를 멈추고 얼굴을 굳혔다. 대학 가서 인기가 많아지면 어떡하지. 지금도 화이트데이다, 발렌타인이다, 하면 다른 학교에서까지 찾아와서 선물 안겨주고 가는데 대학가서 인기가 많아지면 정말 어떡하나. 없어도 걱정, 있어도 걱정이다. 후거도 인기가 없는 사람이 아니니, 그 은근한 기분이란 걸 안다. 피곤하고 귀찮을 때도 많지만 그렇다고 아무도 관심을 안주면 내심 섭섭해진다. 마치 매일같이 손잡자고 집요하게 굴던 곽건화가 오늘따라 한 뼘 떨어져서 걸으면 속상하고 집에 가서도 내내 마음에 걸려 혼자 끙끙 앓다 못해 일기장까지 꺼냈던 것처럼. 


“집에 가자.”


형이 인기 많아지는 건 좀 고려를 해보는 게 좋겠다. 아직까지는 나의 배포가 좁아 받아들일 수가 없다. 먼저 가방을 매고 일어서 성큼성큼 걸었다. 뒤 늦게 상황을 파악한 건화가 뛰어와 자긴 인기 같은 거에 관심 없고 오늘 후거랑 뭘 먹고 놀아야할까 생각 밖에 없다고 갖은 어필을 한 후에야 혼자서 삐친 마음이 풀렸다. 이미 대부분 다 하교를 마친 시간이라, 매일 걷는 골목길에도 인적이 드물다. 모퉁이를 돌아 정말 아무도 걷지 않는 것을 확인 하고나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깍지를 끼고 걷는다. 잡은 두 손이 빙빙 허공 위에서 흔들렸다.


“형, 이번 주 주말에 뭐해?”

“내일?”

“엉.”

“후거가 내일 약속을 언제 잡을까 기다릴 예정인데.”


눈 하나 깜빡 없이 요상한 소리를 잘도 한다. 오죽하면 잡은 손도 빼버리고 싶었다. 


“아아. 그런 거 말고오.”

“왜에.”


원래는 주말 내내 집에 박혀있을 생각이었다. 시험기간도 끝나고 했으니 후거랑 노는 게 당연했지만 토요일은 아버지의 결혼식이 있다. 어차피 가지 않을 거지만 기분이 뒤숭숭해서 후거와 함께 있어도 제대로 놀아주지 못할 것 같아 다른 스케쥴이 있다고 말하려고 했으나 막상 후거가 비는 시간을 묻자 그런 대답을 할 수가 없다.


“음, 형 맨날 농구 같이하던 친구들이랑은 이제 안 놀아?”

“학교에서 놀지.”

“아아.... 그럼 주말에 농구하러 안 가?”

“안 가.”

“왜?”

“너 약속 기다릴 예정이라고 했잖아.”


그나저나 농구는 이야기만 나와도 싫어하더니 왜 갑자기 농구 이야기를 할까. 다시는 농구하지 말고, 그 친구들 이랑도 어울리지 마라는 소리를 할 것 같아서 조금 겁이 난다. 길을 멈춰 선 건화는 목울대를 넘기며 아랫입술을 물었다. 후거가 정말로 하지 말라고 하면, 차마 그러지 못하겠단 대답을 못 할 것 같다. 긴장된 모습을 감추지 못하고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후거는 낙서가 그려진 담벼락을 보더니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러면 나랑 농구할래?”

“...어?”


예상 밖의 제안이었다. 농구하는 걸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녀석이.


“농구하는 거 싫어하잖아?”

“하는 게 싫은 게 아니라 못해서 싫은 거지. 난 완벽주의자라서 그런 거 못 참아.”


흥흥. 팔짱을 끼고 고개를 가로 지으며 싫은 티를 낸다. 그러면 왜 하자는 걸까. 한 달 넘게 공부만 해왔으니 갑자기 농구 실력이 껑충 뛰어 이제는 잘하는 것도 아닐 테고. 여전히 못 할 텐데.


“으음....”

“형이 나 가르쳐주면 되잖아.”

“그래도 돼?”

“어. 얼마나 잘 가르치는지 볼래.”

“좋아. 잘 가르쳐줄 수 있어.”


농구만으로도 좋은데 거기에 후거까지 있으면 행복하지 않을 수가 없다. 긴장했던 조금 전의 상황을 잊은 듯 입술을 당겨 웃은 건화는 후거의 손을 잡으며 앞장섰다. 내일? 내일 몇 시에? 글쎄. 점심 먹고 만날까? 그래도 되지. 어디서 봐? 학교에서 봐? 아님 공원? 마음대로. 공원에서 할래. 좋아.


“근데 농구는 왜 갑자기?”

“완벽주의자라서 농구 못하는 걸 못 참겠어.”

“으음...”

“나 케익 먹고 싶어.”

“사러갈까? 저기 베이커리 있네.”

“그래.”


건화가 후거의 ‘농구’에 대해 의문을 품으려 하니 재빨리 대화의 주제를 바꿨다. 건화는 금세 넘어갔다. 아마도 내일 후거와 농구를 할 생각에 부풀어 정신이 없는 듯 했다. 좋아하는 형을 보니 내일 끔찍한 농구를 해야 한다는 생각도 좀 긍정적으로 변하는 것 같긴 하다. 베이커리 쪽으로 걸음을 옮기며 잡은 손을 꿈지럭댄다. 후거가 갑작스레 농구를 하자고 제안한 것은 순전히 건화가 저 때문에 그 좋아하는 농구를 참고 사는 것이 싫어서였다. 후거야 건화가 밤잠 줄여가며 겨우겨우 농구를 하는 걸 모르니.

아니, 농구하러 간다고 역성 내는 것도 아닌데 나랑 있겠다고 취미를 포기하는 건 앞서가도 너무 앞서갔다. 그런데 또, 형이 친구들과 농구하러 가서 혼자 남는 것도 싫다. 결국 답은 하나였다. 농구를 함께 하는 것. 진짜 농구에는 재주가 요만큼도 없어서 내일 형의 농구 과외가 조금 걱정되긴 하지만.... 그래도 농구하면서 도시락도 까먹고 손도 잡고 사람들 없을 때 몰래 뽀뽀도 할 계획이라 괜찮아. 농구는 그냥 거들 뿐이다. 


“형 어머니는 언제 오셔?”

“아. 음, 겨울방학 중순쯤에?”

“나랑 사귀는 거 말 했어?”

“너 인건 말 안 했어.”

“말해도 돼.”

“그래? 그래도 되나..?”


응. 우리 엄마는 형이 나랑 사귀는 거 아니까. 목구멍이 간질간질하다. 아직 형한테는 말을 안 했다. 엄마는 자꾸 건화 한 번 보자고 이야기 하는데, 나도 부담스럽고, 형도 부담스러울 것 같아서.


“형이 말했을 때, 어머니가 괜찮다고 말씀하셨다며.”

“그렇긴 한데.”

“어차피 미국? 아, 캐나다에 계신다고 했잖아. 자주 오시는 것도 아닌데.”

“그래...?”


우리엄마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형의 엄마도 알고 있는 게 공평할거야. 후거가 건화에게 말해도 된다고 하는 것은 순전히 자신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서다. 실제로 별 상관도 없긴 한데. 그런데 건화의 표정이 이상하다. 본인은 애써 표정 관리를 하려고 노력하지만 자꾸만 뺨이 위로 솟는다. 오묘한 표정에 그 잘난 얼굴도 조금 못나 보일 것 같아서, 건화 얼굴의 열성팬인 후거는 기분이 상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누가 그 얼굴 그렇게 쓰래.


“나 요새 공부했다고 선물 주는 거야? 선인장처럼?”

“그게 뭐가 선물이야.”

“그냥 기분이 좋아서.”

“기분 좋으면 형이 케익 사줘?”

“그건 원래 사주는 거지”


나 한 조각 말고 한판 다 먹을 건데? 후거의 기세등등한 협박해도 건화는 기분 좋게 웃으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베이커리만 아니면 다 사줄게.” 덕분에 찡그리던 후거의 얼굴도 풀려 헤실헤실 얼굴이 녹아난다. 들뜬 기분으로 꽉 잡고 있던 손을 베이커리 안에 들어갈 땐 놓아야했지만, 둘 다 개의치 않기로 했다. 남들에게 감춰야한다고해서 사랑이 아닌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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