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차여차
곽호 썰, 소설 올리는 블로그 @tarack_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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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차여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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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아파?


하고 걱정스레 물을 상황도, 마음도 아니라 상처 난 뺨을 눈으로 훑기만 하고 걱정을 그만뒀다. 손을 거둔 후거는 다시금 젖은 제 눈가를 문지르고, 벌써 새카매진 창밖을 본다. 형을 좋아하는 것이 현실이 부딪쳤을 때부터 후거에게 낮은 없었다. 전등을 비추지 않으면 한치 앞도 위험한 밤뿐이다. 하다못해 어스푸름 해지는 새벽이 언제 올지 조차 모르겠다.


“말해봐.”


그간 형에게 받아온 상처를 보상하라면 한도 끝도 없다.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듣고 싶을 뿐이었다.


“나한테 왜 그랬는지, 설명 해봐.”


목이 메여 드문드문 나오는 목소리. 건화는 축축해져 무거워진 눈꺼풀을 든다.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쉽사리 입술이 열리진 않는다. 후거는 차분히 기다렸다. 곽건화가 제 마음을 보이는 데까지 두 달이 걸렸는데, 고작 오 분, 십분. 기다리지 못 할 리가 없다.


“....아빠가 되고 싶었어.”


한참을 뜸을 들이다 하는 말이 아빠가 되고 싶었다는 말. 하나도 놀랍지 않았다. 형은 종종 나중에 커서 아이를 낳게 되면 아이와 하고 싶은 일들을 말했었다. 저녁 늦게까지 놀이공원에서 놀아주기. 봄에 도시락 싸서 소풍가기.


“꿈이라곤 그런 것들뿐이어서. 더 인정하기 싫었던 거 같아.”


건화가 바라던 것은 크거나 어려운 것들이 아니었다. 좋은 사람과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아서 소중하게 키우는 것. 마주보고 웃으며 이야기하고 혼자가 아닌 삶. 하지만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것들도 이렇게나 어렵다. 


“결혼도 하고 싶었고.. 무엇보다 부모님께 완전히... 버려질까봐... 무서웠어.”

“.....”

“...미안하다.”


결국 어떤 말을 한다한들. 어떤 배경이 있었다 한들 내가 결정하고 행동했다. 변명을 늘어놓고 싶지 않았다.

꺼져가는 불씨처럼 약해지는 건화의 목소리. 후거는 말라붙은 눈물을 닦아내고 숨을 골랐다.

형이 가지는 두려움이 어떤 건진 대충 알고 있었다. 


“미안해. 내가 미안해. 내가, 너무.. 늦게 말했지.”

“.....”


생채기가 잘게 난 뺨 위로 눈물이 미끄러지고 방울진 피와 섞여 목덜미 아래로 뚝뚝 흐른다. 형은 떨고 있었다. 울음을 참아내려 힘쓰고, 의연한 모습을 보이려 애쓰지만 무릎 위로 꽉 쥔 손도 떨리고, 어깨는 그보다 더 애처롭게 흔들린다. 그런 것들을 먼 산 보듯, 남의 일을 보듯 할 수 없다. 곽건화의 모든 것이 저에게 흘러든다. 형의 괴로움, 미안함, 자괴감. 눈으로만 봐도 훤히 드러나는 감정들이 후거의 속으로도 파고들었다.


“알면 됐어.”

“안 됐잖아.”


툭 던져 나온 후거의 말에, 건화는 꼭 절망스런 얼굴을 하며 대답했다. 무심한 후거의 말투가 겁이 난다. 이대로 “난 이제 형이랑 별 상관없으니까.” 하고 말하고는 그를 무참히 버려두고 사라질 것 같았다.


“그럼 지금 당장 나보고 화를 풀라는 거야?”

“아니, 아니야.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아.”

“알았으니까 울지 마.”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목소리가 꽤나 냉정하게 나간다. 어쩔 수 없었다. 이미 후거는 안에 담고 있던 모든 감정을 배출시킨 후 였고, 지금은 조그마한 감정들마저 피곤하게 느껴진다. 사실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후거가 건화에게 좋아한다고 말한 순간부터, 형은 멀어져있었다. 코앞에 있어도 함께 있는 것 같지 않고 후거에게서 점점 멀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버티고 버티던 후거가 포기하고 마찬가지로 헤어지는 연습을 준비하자 건화가 붙잡는다.


눈가가 상기된 건화는 후거의 기분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상처 위로 흐르는 눈물이 아파보이고 따가워 보이는데 본인은 느끼지도 못하는지 큰 눈을 반복적으로 깜빡깜빡. 이따금씩 입술만 말며 숨을 들이마신다.


“나한테 여기 오라고 한 이유는 뭔데.”

“다른 이유 없어. 위험하니까 오라고 한 거야..”

“언제부터 마음이 바뀐 거야?”

“....처음부터 마음은 계속 있었어. 그러다... 갈수록 네가 멀어져서...”

“형이 먼저 날 피했으니까.”

“알아. 그런데, 그래도 막상 네가 없으니까...”


내가 밀어내고, 내가 도망치고, 내가 피했으면서도 눈앞에 없는 후거에 외로움을 느꼈다. 머저리 같은 짓이라는 건 안다. 피할 당시에도 느꼈던 것이다. 후거에게 상처주고 나면 내가 수배로 아파질 거라는 걸 알면서도 당장 덮치는 두려움에 긴 생각을 하지 못했다.

공기는 점점 싸늘해져간다. 밤하늘도 새카맣게 물들이며 사물들을 그림자 속으로 숨겨둔다. 

세상 속에서도 그렇게 숨고 싶었다. 창피한 나로부터.


“뒤늦게 나 없으니까 죽을 거 같았어?”

“.....”

“막 숨 막히고, 죽고 싶고, 못 살 것 같았어?”

“....가끔.”

“그런 게 어디 있어. 난 엄마아빠 없이도 사는데.”


퉁명스레 굴지만 후거도 가끔은, 이렇게 된 이후로 가끔은, 완전히 먼지처럼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했다. 아주 죽을 것 같고, 아주 살 수 없을 것 같지만 가끔은 그런 어둠이 후거의 뒷덜미를 잡고 놔주지 않았다.


“그럼 형은 이제 어떻게 할 건데. 부모님한테 말 할 거야?”


형에게 커밍아웃을 강요할 생각은 없다. 내가 했다고 형까지 따라 할 필요는 없으니까. 아. 다시 복잡한 것들로 꽉 찬다. 머리가 혹사당하는 기분이다. 정확하겐 머리보다 정신이 소비당하고 낡아지는 것 같다. 

후거는 쪼그려 앉은 몸을 뒤로 당겨 벽에 등을 붙이고 무릎을 끌어안았다. 형은 턱 끝에 매달린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내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거라는 의미. 그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고 화들짝 놀라 어깨가 떨린다. 경련을 이는 것과 흡사했다. 동시에 몸을 갉아먹는 고통과 두려움을 감내하며 부모님께 편지를 쓰던 때가 떠오른다. 곧 닥칠 암울한 미래를 알면서도 내심 실낱같은 희망을 바랐다. 결국 그 희망은 없었지만.


“말하고 나면 다시는 부모님 못 볼지도 몰라.”

“상관없어.”

“왜 상관이 없어? 그게 무서워서 날 그렇게 피 말린 거면서.”

“그래도.. 너 없이 보낼 미래가 더 무서워.”


말은 잘 하지. 하지만 하나도 기쁘지 않고 하나도 원치 않는다. 마른 뺨을 쓸곤 다문 입술을 우물거렸다.


“말 안 해도 내가 용서해준다면?”

“너 혼자 힘들어하는 걸 앞으로도 계속 봐야해?”

“그렇다고 둘 다 괴로워질 필요는 없잖아

“그렇게라도 안하면 내가 더 힘들 것 같아. 죄책감에 시달려서 말라죽을지도 몰라.”


그래도 아냐. 말 안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버림받는 것은 한 번으로 족하다. 형이 두 번이나 버려지길 바라지 않았다. 남들이 보면 날 한심하다고 생각할까. 그렇게 당하고도 아직도 좋으냐고. 


“미안해...”

“됐다니까.”

“후거. 미안해.”


마음 약해지게 진짜...

됐다는데도 자꾸 미안하단 말만 반복하는 형이 싫다. 눈을 치켜뜨고 매섭게 노려봐도, 건화는 비 맞은 강아지마냥 처량한 꼴로 마주보기만 한다. 실은 눈도 못 마주치고 있다. 답답하고 열 받아서 몸 자체를 빙 돌려 벽을 보고 앉는다. 후거가 아예 등을 돌리자, 젖은 눈꺼풀이 끔뻑끔뻑 천천히 깜빡이더니 상심에 물든 얼굴은 더더욱 굳어졌다. 후거의 마음을 되돌릴 수 없을 것 같아 입안이 마르고, 뒷목은 서늘하게 식어가는 것 같다.


쉽게 마음을 풀고 싶지 않다. 이렇게 금방 형을 용서하고 싶지 않았다. 그간 얼마나 외로웠고, 얼마나 아팠는데. 마음속으로 형을 얼마나 불렀는데. 같이 있어달라고. 불쑥 나타나서 끌어안아달라고.


건화에게 거절당한 것이 3번. 그 세 번간 후거는 변화했다. 처음은 억지를 부리고, 두 번째는 말하지 못하고 있던 마음을 고백하고, 세 번째는 스스로 책임을 지겠다고 했다. 건화의 짐까지 본인이 지겠다고. 하지만 그 세 번간 건화는 바뀌지 않았다.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다.


과거를 생각하고 떠올릴수록 용서하고자 하는 마음이 쏙 들어가, 이따금씩 뚝뚝 흐르는 눈물을 손날로 대충 문질러 닦아내곤 몸이 더더욱 구석으로 파고들어갔다. 방해되는 가방도 저기로 밀어버리고 모서리에 이마를 대고 길게 입술을 다물었다. 바로 한걸음 뒤에 형이 있다. 아니 한걸음이 아닐 수도 있지. 한 뼘. 반 뼘. 


“미안해.. 잘못했어.”

“그만해.”


전에는 형이 내 앞에서 울면서 무릎 꿇고 사과는 해야 이 마음이 좀 풀릴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막상 현실로 다가와도 조금도 반갑지 않다.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다분히 형을 미워하고 속상해 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마음이, 이제 형에 대한 애증과 측은한 마음까지 얹어진다. 감당하기 버거워 가슴을 주먹으로 쿵쿵 쳐보지만 도움이 되지 않았다.


뜨끈한 두 손바닥에 젖은 얼굴을 파묻었다. 이제 후거를 대신해 길을 알려주고 방향을 가리켜줄 사람은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서 결정해야했다. 형을 용서하는 것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오로지 혼자서 끝내야한다.


“...내가 싫지.”


쌕쌕 숨만 내쉬던 건화가 구석에서 몸을 말며 작아진 후거의 굽은 등을 보며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자조적인 목소리였다. 네가 당연히 그럴 거란 확신을 담고 물은 것이기도 하고. 다만 그 확신이 있어도 후거의 입에서 싫다는 말이 나오면 비수가 되어 온 몸에 상처를 입힌다. 알면서도 물었다. 내 몸을 갉아낼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하지만 후거는 대답이 없다. 미동도 없고, 가만히 구겨져 있을 뿐이다. 차라리 좀 전처럼 화를 내고 울분을 터뜨리는 모습이 나아 보일 정도인데, 건화는 다가가 등을 두드릴 수도, 울음을 달래줄 수도 없었다. 그럴 주제도 아니었고, 후거의 허락 없이는 그래서도 안 된다. 그래서 건화는 손 하나 뻗지 못하고 후거가 앉은 부근으로 가라앉은 시선만 내렸다. 


이따금씩 창문에 스치는 바람소리만 들리는 방 안. 갑갑한 정적 속에서 후거는 건화가 물은 ‘내가 싫지.’ 라는 말을 마음속에서 되풀이했다. 내가 싫지. 내가 싫지. 대답을 못한 것도 그 때문이다. 형의 말에 싫다고 대답해야할지, 싫지 않다고 대답해야할지 가늠이 가지 않는다. 형의 미안하다는 말 한 번에 모든 걸 용서하고 싫지 않다고 말해도 되는 건지.


굳은 고개를 들었다. 뜨겁게 달아 오른 게 느껴진 뺨을 차가운 손등으로 쓸고 아무것도 없는 흰 벽을 본다. 형과 화해해도 예전처럼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다. 고민 걱정 없이 그저 형을 좋아하기만 하는 삶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형에게 상처를 냈었던 손을 물끄러미 보다 바닥 위로 손을 미끄러뜨리며 내민다. 시야 안에 들어오는 후거의 상기 된 손에, 건화는 잠긴 눈을 들어 후거의 목과 등을 보곤 쉽사리 이해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울긋불긋한 손. 건화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후거는 몸을 뒤척이며 손등을 아래로 하며 손바닥을 보인다. 무거운 속눈썹이 나풀댄다. 보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생각하는 의미가 맞을지 확신이 서지 않아 목울대만 삼키며 어쩌지 못했다. 후거도 형이 가만히 있는 이유를 안다. 다만 이 이상 나서진 않을 생각이었다. 이것조차도 형이 스스로 하지 못하면, 앞으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테니까.


생각의 방향이 우울한 곳으로 닿을 때 쯤, 내민 손바닥 위로 마주 닿는 손이 있었다. 조심스럽게 잠깐 스치듯 손바닥 위로 손가락의 여린 살이 닿았다가, 후거가 거부하지 않자 망설이면서도 손가락 사이사이를 마주하며 꽈악 움켜쥔다. 도드라진 손마디가 하얗게 저렸다. 아픔에 움찔거리면서도 후거는 손을 빼내지 않는다. 겨우 말랐던 눈꺼풀이 다시 무겁게 젖어가고, 건화는 울음을 터뜨리는 대신 후거의 마른 등을 감싸 안고 부쩍 야위어진 어깨 위에 고개를 내렸다.


“잘못했어..”

“그만...”

“사랑해.”


벌써 귀에 지겹게 박히는 "미안해" 란 말이 듣기 싫어 눈 앞매를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만 좀 해. 하고 말하려고 했는데, 이어진 건화의 말은 뜻밖의 표현이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에, 예상하지 못했던 말들에 복잡하던 머리가 하얗게 빈다. 무슨 반응을 해야 할지,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저릿저릿한 손의 감각도 무뎌진다. 귓가에는 건화의 숨소리만 닿았다. 


“전에는... 말하면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어. 그 말 하나만 꺼내면 세상 모두가 날 미워하고, 또 버려진다고....”


울음에 매여 잠긴 형의 목소리. 건화는 드문드문 숨을 크게 삼키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내 한마디에 당장 바뀌는 건 세상이 아니라 너와 내 관계인데...”


어깨가 젖어 들어간다. 하얀 셔츠를 뜨겁게 적시던 눈물은 금세 차갑게 식었다. 건화는 몸을 잘게 떨면서도 후거의 셔츠 아랫단을 구겨지게 붙잡는다. 마음은 허리를 끌어안고 싶었지만 후거가 불쾌해 할까봐 겨우 셔츠를 잡는 것으로 멀어질까 겁나는 마음을 다잡는 것이었다.


“그때는...”


그때는 내 두려움에만 급급해 후거를 생각하지 못했던 자신이 너무 창피하고 미안하다. 미안함이 너무 커서, 시간이 흐를수록 중첩되고 심화되는 죄책감과 미련에 더욱 더 숨어들어갔다.


 누구나 기회와 시간이 필요하다. 건화에겐 용기를 낼 시간이 늦게 찾아온 것이고, 때문에 그 시간 내내 아팠을 뿐이었다. 뒤늦게 자라면 그만큼 더 큰 각오가 필요하다. 그간 아프게 했던 것에 대한 사죄. 그 시간들 동안 자라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 죄책감, 고통.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용기는 점점 더 작아진다. 이미 깨닫고 있지만 입 밖으로 터뜨릴 수가 없다. 내가 소리 내어 말하기 시작하면, 그동안 내가 저질렀던 모든 것을 책임져야하기 때문에. 수배로 견뎌내야 하기 때문에.


이미 회색으로 얼룩진 셔츠를 손으로 문질러 닦아낸다. 고개를 당긴 건화는 후거의 옷을 더럽힌 것이 미안해 속상한 낯을 하며 “미안.” 입안에서 우물우물 중얼댄다. 


‘내 한마디에 당장 바뀌는 건 세상이 아니라 너와 내 관계인데...’


사랑한다는 말보다, 이어진 건화의 말이 유독 더 뜨겁게 후거를 감쌌다. 뼈저리게 이해한다. 후거의 커밍아웃으로 세상이 바뀌는 건 없다. 그저 혼자 버려질 뿐이었다. 달라지는 게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닌 줄 알았는데. 꼬리를 물고 흐르는 부모님에 대한 생각에 울음이 쏟아지고, 무릎으로 기어 몸을 돌린 후거는 건화를 마주 안으며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는다.


형이 사과한 순간부터 내내 갈팡질팡하던 마음은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로 멈춰 섰다. 더 이상 형을 미워하기엔 후거는 약해졌다. 형을 미워하는 데에도 많은 정신력이 소모되고, 약한 마음이 상처 입는다. 더 이상 혼자 있고 싶지도 않았고, 먼발치에서 형의 뒷모습을 보며 울고 싶지도 않다.


힘이 빠진 손가락으로 건화의 등을 더듬는다. "힘들게 해서 미안해.." 물기가 섞인 건화의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더 강하게 그 품에 파고든다. 

좋아한다는 게 원래 이렇게 힘들고 아픈 걸까. 다른 사람들도 다 나만큼 괴로운 걸까. 혼자서 고민 해봐도 모든게 다 처음이라 알 수가 없다. 



***



서로 껴안은 팔을 풀자마자 어색해졌다. 숨 막히는 정적을 먼저 깬 것은 후거였는데, 애석하게도 잘 테니 나가라는 말이었다. 잔뜩 긴장한 얼굴로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건화는 제 방에서 뜬 눈으로 밤을 지새다 새벽녘에야 겨우 잠들었다. 잘 준비야 이른 저녁부터 했는데 침대 위에 누워서 한 것이라곤 온통 후거에 대한 것들뿐이다. 미안한 짓을 했던 과거, 그리고 후거가 앞으로 그에게 어떻게 대할지. 계속 후거를 좋아해도 되는 건지. 해결된 건 단 요만큼도 없는 것 같아 마음이 초조하다. 그래서 잠에 들 수가 없었다.


하지만 긴 밤 끝을 붙잡으며 겨우 잠들었어도 남아있는 무거운 마음은 여전해 짧은 잠도 설쳤다. 꿈에서 내내 후거의 차가운 시선을 감내하던 건화는 오전 9시. 고작 네 시간만 자고서 잠에서 깬다. 


“아....”


눈꺼풀이 무겁다. 다시 눈을 감으면 잠들 수 있을 것 같아 억지로 눈을 감고 몸을 뒤척여보나, 이불을 어깨 위 까지 덮은 순간 후거의 얼굴이 까만 눈꺼풀 위로 솟았다.


천근만근인 눈꺼풀은 본인의 의지와 다르게 다시 올라가고, 결국 잠을 잔 것도, 안 잔 것도 아닌 몸뚱이는 손끝부터 축축 쳐지며 컨디션이 말이 아니다. 혼자였다면 주말이니 다 무시하고 이불 속에서 나오지 않았겠지만 후거가 있으니 안 된다. 침대에서 일어나 씻기도 전에 새 옷으로 갈아입고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한 후에 문을 열었다. 커튼을 쳐둔 덕에 거실은 아직도 한밤중이고, 차갑고, 아무도 없다. 

밖에 후거가 있을까봐 일어나자마자 머리 정돈을 했는데 걱정과는 달랐지만, 또 반대로 비어있는 거실에 심장이 쿵 떨어진다. 혹시나 후거가 그가 자는 사이에 가버렸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눈을 현관 앞을 쫓았다.


하아...

다행히도 현관에는 여전히 후거의 신발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심장이 두개라도 아까는 죽을 뻔 했다. 후거가 그대로 사라졌다면 건화는 정말 죄책감에 울다 지쳐 말라 죽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아직 후거가 가지 않았음에 감사하고, 그대로 앞에 쪼그려 앉아 한쪽이 뒤집어진 후거의 신발을 가지런히 정리한다. 신발을 정리하면서도 건화의 표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어제 후거는 그가 말하는 "사랑해"에 대답하지 않았다. 끌어안아주고 함께 울어줬지만 후거의 침묵이 그를 완전히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의미일까 봐 겁이 났다. 후거가 말했듯이, 이제 정말 본인에게 애정은 조금도 남아있지 않는 걸까.


사실 그렇다 해도 할 말은 없다. 자신이 후거에게 얼마나 잔인했는지, 아직 열일곱 밖에 안 된 후거가 그간  혼자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면서도 외면했다. 


늦은 저녁, 농구코트에서 만났을 때.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만 하면 된다는 후거의 말에 대답하지 못했던 것이 가장 한으로 남는다. 그 말이 왜 그렇게 힘들었을까. 


멀거니 후거의 신발을 내려 본다. 후거는 신발도 저를 닮아 귀여운 것들만 신었다. 앞코가 동그란 운동화. 발 작아보여서 싫다고 성질 부렸던 신발 같은데. 건화가 보기엔 귀여워서 좋기만 한데. 그리고 후거 발은 이미 키에 비해 충분히 작기 때문에 더 작아 보일 수도 없다. 


전엔 큰 신발 신고 다니면서 발 키울 거라고 하다가 많이 넘어졌지. 고등학교 입학하고 며칠 되지 않아서 길 걷다 넘어지는 바람에 교복 무릎이 찢어지는 불상사를 겪어 부모님께 혼이 난 후에는 제 사이즈를 신는 것 같다. 후거는 머리카락 한 올부터가 귀여우니 하는 짓이 귀엽지 않을 수가 없다.


“내 신발 보면서 뭐 해?”


고작 운동화 하나로 시작해서 후거는 머리 끝 부터 발끝까지 귀엽다는 생각으로 넘어갔을 때였다. 건화는 뒤에서 들리는 후거의 목소리에 놀라 파드득 떨며 엉덩방아를 찧는다. 꼭 누구와 하는 짓이 똑 닮았다.


그래도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놀란 마음을 가다듬으며 느리게 아침안부부터 묻는다. 후거는 입술을 쭉 내밀고는 긴 팔을 쭉 뻗으며 기지개를 편다. 형의 고리타분한 아침인사에는 대답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소파에 앉아 더듬더듬 리모컨을 찾아 티비를 켠다. 의식 없이 채널만 돌렸다. 띄엄띄엄, 말 한마디씩 튀어나오곤 사라지는 티비의 소리가 들리긴 하지만 여전히 어제 오후처럼 숨 막히는 정적이었다. 괜스레 이리저리 자세를 바꿔 앉으며 부스럭대는 소음을 낸다. 주저앉고 있었던 건화는 그 사이 일어나 거실의 넓은 창을 가리고 있는 두꺼운 커튼을 젖혔다. 얼마나 제 역할을 잘 하고 있었던 건지, 커튼을 걷자마자 유리창 너머로 환한 햇살이 들어와 두 눈을 잔뜩 찌푸리며 비명을 질렀다.


“눈 따가워!!!”

“아침인데 커튼은 걷어야지.”


그래도 눈이 익숙할 시간은 줘야할 것 아냐! 밤과 구분이 없던 거실이 순식간에 햇빛에 점렴 당했다. 후거는 손으로 눈 위를 가리곤 투덜투덜. 눈이 아파 죽겠다며 혼자 짜증을 내다 이윽고 조용해졌다. 

다시 어색한 기류가 흐른다. 건화는 후거에게 어떻게 대해야할지 감도 안 잡히는 와중이었고, 후거는 최대한 싸우기 이전처럼 행동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가 바로 바뀔 순 없었다. 멀뚱히 서 있던 건화가 소파로 다가오고, 흘끗 올려다본 후거는 소파 위에 길게 뻗고 있던 다리를 거두어 소파 끝으로 이동해 엉덩이를 붙였다. 옆에 형이 앉는다. 처음 보는 사람도 아닌데 입안이 마르는 것 같아 입술을 축이곤 손가락을 말아 당겼다.


이 시간에 하는 프로그램이라고 해봤자 재방송 밖에 없는데, 건화는 누군지도 모르는 아기가 나오는 티비에 시선을 두곤 정신은 온통 옆자리에 팔려있다. 후거의 숨소리. 움직이는 기척. 감기에 걸린 건지 이따금씩 켈록켈록 기침을 하는 것 까지. 생강차라도 마시는 게 어떻겠냐고 물으려던 마음을 꾹꾹 누른다. 먼저 말을 걸어도 될지 모르겠다. 모든 것이 조심스러웠다.


말 한마디 거는 것도 용기를 내야하는 건화와, 그 사이에도 콜록콜록 기침을 하던 후거는 주먹으로 입을 가리면서 흘끗 옆 자리의 건화를 본다. 일부러 기침을 하는 중이었다. 분명 곽건화라면 이쯤에 ‘따뜻한 거라도 좀 마셔, 아니면 약 사올까?’ 하고 물었을 텐데 티비만 보고 있는 걸 보니  나한테 관심이 없는 건지 답답하다. 눈을 크게 반 바퀴 굴린 후거는 다시 연기를 시작했다.


“큭, 켁, 아, 아.. 기침...”

“....감기 걸렸어?”


기침소리가 점점 커져가니 눈치만 보고 있던 건화의 입술도 떨어진다. 드디어 감기 이야기가 나왔다. 내가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어색한 분위기를 없애려고 노력하는 내 마음을 곽건화는 알까. 저렇게 기가 죽어서 눈치만 보는 꼴을 보니 답답하면서도 슬프고, 어제 울며 사랑한다고 고백하던 것이 떠올라 이번에는 정말로 기침이 나왔다. 켁켁 고개를 돌리고 기침하는 후거를 보며 안절부절한 그는 거실서랍 어딘가에 둔 구급약통을 찾아 헤맨다. 잠깐만. 약 줄게. 약...


“됐어. 나 감기 아니야.”

“기침 심한데 무슨 감기가 아니야.”

“내가 기침이라도 안 했으면 오늘 형 나한테 말 한마디도 못 걸었을 걸.”

“......”


입은 소리 없이 벙긋벙긋. 후거가 한 말이 사실이라 아니라고 대답할 주제가 못 된다. 열어둔 두 번째 서랍을 도로 닫은 건화는 여기서 무슨 말을 꺼내야 자연스러울지 고민한다. 후거를 처음 봤을 때도 하지 않은 고민이었다. 낯을 많이 가리는 건화가, 아무리 어린애였다 한들 후거와는 순식간에 친해졌었다.


“앉아봐.”


또 어색하게 구는 건화를 옆자리를 톡톡 치며 불러낸 후거는, 건화가 옆자리에 앉자마자 그의 어깨 위로 고개를 내렸다. 가볍게 머리를 기대자마자 어깨가 움찔 하더니 딱딱하게 굳는다. 전에는 이보다 더한 것도 아무렇지 않게 했는데. 씁쓸한 마음에 입매를 길게 다물다 눈을 감았다.


“이제 형 안 미워할 거야.”

“....”

“그러니까 눈치 보지 마.”


여전히 눈은 뜨지 않았다.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대로 바로 낮잠에 드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건화가 고개를 돌려 저를 보고 있는 게 느껴지지만, 가만히 졸음 속으로 빠져든다. 후거를 의식해 띄엄띄엄 짧게 흐르던 건화의 호흡이 안정을 찾고, 둘 사이의 정적이 숨통을 틀어막는 대신 편안하게 자리 잡았을 때, 비로소 후거에게 용서받았다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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