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차여차
곽호 썰, 소설 올리는 블로그 @tarack_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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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재 완 결 단 편 기 타 방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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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그 날 저녁, 자습을 마치고 오랜만에 걷던 길 위를 걸었다. 혹여나 가는 도중에 엄마나 아빠를 보게 될까봐 마음이 초조하다. 괜히 후드를 꾹 눌러 쓰고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며 걷는다. 중년의 아주머니와, 아저씨들 뿐만 아니라, 곁에 사람만 지나가도 흠칫흠칫 놀란다. 아직까진 부모님을 볼 자신이 없다. 정확히는 부모님의, 후거를 향한 부모님의 시선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생각할 수록 후거의 어깨는 움츠러든다. 건화의 집까지 가던 도중 멈춰 서서 커다란 트럭 옆에 몸을 숨겼다. 마음이 불안해 나갈 수가 없다. 하지만 나가지 않으면 건화의 집이든, 어디든, 갈 수가 없다. 찬 바람을 피해 등을 돌리고 있다 겨우 발을 뻗었다. 전등이 깜빡이는 골목 안에는 아무도 없다. 을씨년스런 광경이나 차라리 이게 낫다. 보폭을 넓게 걷는다. 후거의 집은 건화의 집보다 학교와 더 멀었다. 더 멀다고 한들 고작 오 분 차이라 거기서 거기긴 하지만, 일분일초가 중요한 등교시간에는 그마저도 아쉽고 부러웠었다.



***



“형이랑 나랑 집 바꾸자.”

“어?”

“형네집이 학교랑 더 가깝잖아.”


뛰어서 오면 우리 집까지 삼분도 안 걸리잖아. 이어진 건화의 말에 후거는 전혀 동의하지 않고 손바닥을 흔들어 보이며 돌아섰다.


“일분 차이로 지각해서 벌금 내 봤어?”

“오분 일찍 출발하면 되잖아.”

“나도 지각 자주 안 해! 그냥 가끔, 아주 가끔 하는 거지.”


듣다보니 누굴 지각 상습범 취급하는 것 같아 짜증 나네. 후거가 열과 성을 다해 본인을 변호하자, 건화는 건성으로 그렇구나. 하고 대답하곤 지각 이야기를 하느라 어느새 꽤 넓게 벌어진 둘 사이의 공간을 줄이기 위해 점점 후거 옆으로 달라붙는다. 

지각 자주 안 해. 가끔 해. 알았지? 그래. 알아. 건화에게 확고한 대답을 받은 후거는 지각쟁이가 되지 않은 것에 좀 안심이 되는지 건화가 들러붙든 말든 멀어지든 조용히 길만 걸었다. 그러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온다.


“아, 맞아. 집 바꾸자니까?”

“그래. 바꾸자.”

“어어?”

“오늘부터 짐 싸면 되겠네. 네가 바꾸자고 한 거니까 내 짐은 니가 다 옮겨줄 거지?”

“으음...”


생각해보면 곽건화 집에 있는 물건을 다 우리 집으로 옮기고, 우리 집 물건을 다 곽건화네로 옮기는 과정에 드는 비용과 노동력과 시간을 하루 3분 내지 길게는 5분 차이와 비교해봤을 때, 그다지 매력적인 조건이 아닌 것 같다. 짐 옮기는 게 얼마나 힘든데. 짐 싸는 것도 장난이 아닌데... 별로 내 이득이 아닌 것 같아.


또 슬그머니 손을 잡으려는 곽건화의 손등을 따갑게 꼬집고 한 걸음 앞서 나간다. 건화는 부러 엄살을 피며 후거의 등에 매달렸다. “후거, 형 손 아파서 걷질 못하겠다.”, “형은 손이랑 발이랑 연결돼있어?” 등에 매달린 김에 통통한 뺨도 좀 만져보려 했더니 기겁하며 도망가는 바람에 허탕을 친 건화는 뒤따라 뛰며 따라붙었다. 그러다 그를 피해 앞서 뛰던 후거가 바로 멈춰 서는 바람에 부딪치지 않으려고 바로 멈췄다가 다리가 꼬여 넘어질 수도 있는 위기의 상황을 마침 옆에 있던 전봇대를 붙잡는 것으로 무마했다. 다만 두 살 어린 동생 앞에서 멋있는 모습만 보여주려 했더니 휘청휘청 제 몸을 못 가누는 모습을 보여서 쪽팔렸는데, 후거는 건화가 이리 휘청, 저리 휘청, 하며 전혀 잘나지 못한 모습을 보인 것엔 요만큼도 관심이 없고 이사 대신 아주 효율적인 시간단축법이 떠올랐을 뿐이었다.


“내가 형네 집에 들어가면?”

“부모님이 허락은 해주시고?”

“우리 엄마랑 아빠 나보다 형을 더 좋아 할 걸.”

“그런 게 어딨어. 아들이 더 좋지.”


툴툴대는 말에 웃으며 대답하긴 했지만 건화의 뺨에는 아주 짧은 시간 우울함이 스쳐 지나간다. 후거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건화 스스로도 자각하기 힘든 일이었으니까.


“형네 집에 들어가면 엄청 편하겠다. 밥이랑 빨래랑 설거지랑 다 형이 해줘?”

“나도 안 하는데.”

“그럼 누가해? 귀신?”

“아주머니 오시잖아.”

“아.. 맞네. 난 또 형한테 우렁각시라도 있는 줄.”


전봇대를 짚고 선 건화는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히 걸으며 고개를 양 옆으로 까딱인다.


“난 우렁각시 필요 없는데. 내가 다 해줄게. 그럼 우리 집에 들어와 살 거야?”

“형 밥 잘해?”

“못 하는데. 저번에 볶음밥 먹어봤잖아.”

“나 그거 먹고 배탈 났잖아. 미쳤어?”


곽건화가 맛있는 거 해주겠다고 일요일 아침부터 깨워서 집에 오라더니 냉장고에 있는 재료란 재료는 다 때려 넣어서 볶음밥을 해줬었는데, 솔직히 맛이 없진 않았지만... 하긴 냉장고에 전복, 소고기, 새우 몸에 좋고 맛있는 건 다 넣었는데 맛이 없을 수가 없지. 맛은 멀쩡했는데 대체 이유가 뭔지 모르겠지만 그날 밤 배탈 나서 한숨도 못 잤다. 덕분에 월요일 자동 지각이었고. 

생각해보니 형 때문에 지각한 거네? 내가 참 어이가 없어서. 이쯤 되니까 복수를 위해서라도 형네 집에 눌러 앉아야겠어. 방 엄청 어지르고 잘 때 간지럽혀서 못자게 만들고 피를 말려야지.


“그럼 밥은 사서 먹자.”

“생각해볼게.”

“우리 집에 안 들어올 거야?”

“생각 좀 해보겠다니까.”

“생각 다 되면 전화 줘.”


왜 이렇게 집착해? 저 정도면 내가 형네 집에서 사는 게 복수가 아니라 형네 집에 안 들어가는 게 복수일 것 같아. 


“그냥 우리 집에서 다닐래.”

“밥 사준다니까.”

“됐어.”

“왜. 하루만 있어보지.”

“됐다니까 그러네.”



***



골목길이 꺾이는 지점, 가로등 앞에 서서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었다. 이러다 엄마나 아빠한테 들키기 딱 좋네. 목까지 올라온 점퍼 안으로 더 턱을 밀어 넣고 후드는 아래로 꽁꽁 내린다.


가기 싫어. 그런데 가고 싶다. 형이 싫은데, 형의 얼굴을 보고싶다. 모든 감정은 대립되고, 상충했다.  내가 정확히 뭘 원하는지 모르겠어. 나도 날 모르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의 감정을 알 수 있을까.


“하...”


아직 곽건화는 보지도 못했는데 온 기운이 다 빠지네. 툭툭. 콘크리트 바닥 위, 어디서 떨어져 나왔는지 모를 돌멩이를 발끝으로 굴리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언제까지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순 없다.




형의 집에는 불이 꺼져있었다. 연습한다고 늦게 들어올 수 있다더니. 진짜였나 보네. 

집안에는 아무도 없다지만 후거는 쉽사리 안으로 들어가기 힘들다. 몇 개는 텅 비어있는 화분들을 보며 서성이다 벤치에 앉는다. 손가락으로 슬쩍 만져보니 역시나 코팅이 다 일어나 있다. 하여튼 말도 안 듣지. 바니쉬 좀 칠해 놓으라고. 귀에 닳도록 말해도 안 듣고. 저번에 여기서 가시에 찔렸는데...


전에 찔렸던 왼쪽 손바닥을 슬그머니 보곤 고개를 내렸다. 들어가야 하는데. 자존심 굽히고 들어가겠다고 대답까지 했는데 왜 몸이 안 움직일까.


꼭 이곳에 들어가게 되면 형에게 지는 것 같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져주는 거라는데, 져주고 싶지 않아. 내가 형을 좋아하는 감정보다 형이 나를 좋아하는 감정이 더 컸으면 좋겠어. 


제 마음을 무어라 하나로 단정지을 수 없다. 원래 사는 게 다 그런거지. 형이 싫지만, 형의 모든 것이 밉진 않았다. 


나에게 좋아한다고 말하지 못하는 형은 싫지만, 농구를 하는 곽건화는 좋아한다. 농구 하다 말고 무슨 거지같은 소리를 지껄여도, 농구를 하고 있을 땐 멋있다. 


곽건화에게 내쳐진 게 세 번. 나이만 2년 더 먹은 겁쟁이 곽건화가 실망스러웠던 것이 2번. 형을 이해했던 것이 1번. 결국엔 같은 처지에 놓여있어서 형이 왜 그러는지 알 것 같고, 이해가 가서 아주 밉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미워하지 않을 수도 없는 거지. 나는 그렇게까지 착하지 않은 걸.


“춥다...”


밖에서 버티려고 했는데 못 버티겠네. 귀가 찢어질 것 같다. 목도리가 있으면 칭칭 동여매서 귀를 좀 가리면 나을 텐데. 머리를 기를까. 아니... 그건 좀 아닌 것 같아.


시답잖은 생각을 하면서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형이 준 열쇠는 주머니 안 쪽에 있다. 소중한 것을 만지는 것처럼 가만히 손 안에 조심스레 굴리다 주머니 밖으로 빼내어 현관문에 도달했다. 열쇠구멍에 열쇠를 맞춰 끼워 넣자 여전히 어두컴컴하고 차가운 집안이 드러난다. 형은 고3이 된 이후로 늘 이 곳에서 혼자였다. 외롭단 소리는 단 한 번도 하지 않았지만 아마 늘 외로웠을 거야. 부모님이 이혼하신 후 할머니와 단 둘이 살 때부터. 


아. 몰라. 그만 생각해. 왜 이렇게 복잡해. 짜증나게.


머리를 흔들면 꼭 그 안의 잡념들이 흩어질 것처럼 붕붕 휘저으며 신발을 벗다 중심을 잃어 앞으로 고꾸라질 뻔 했다. 와, 미친. 눈앞이 휘청- 하는데 간신히 벽을 붙잡아 서서 다행이지 곽건화 집 오자마자 못 볼 꼴 보일 뻔 했네.


멀쩡한 평지에서 두 손으로 벽을 꼭 쥐고 선 제 자신의 모습이 얼마나 멍청해보일지 굳이 가늠하지 않아도 알겠다. 이런 꼴 보여줬으면 집안에 있는 거 다 부셔버리고 도망갔을 거야. 그래도 혹시 몰라 슬그머니 뒤를 돌아보니 여전히 현관문은 닫혀있다. 다행이다... 


막상 들어왔지만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형은 그냥 알아서 들어가라며 열쇠나 하나 달랑 주고. 혼자 살기엔 큰 주택이라 방은 많은데 집주인이 없으니까 아무데나 들어갈 수도 없고. 거실의 불을 켜고 집 안을 쭉 훑어보다 형의 방문에 눈이 닿는다. 안 돼. 안 돼. 들어가면 안 돼. 억지로 고개를 돌렸다. 

히터도 틀까 고민하다가 어차피 좀 뒤에 형 올 테니까 틀어 놓는 게 낫겠지. 히터를 적당한 온도에 맞춰 틀어놓곤 거실 소파에 멀거니 앉아서 째깍째깍 초침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다보니 저 소리 때문에 정신병 걸릴 것 같다. 엄마 닮아서 시계 소리도 거슬려. 아. 엄마... 아직도 후거의 휴대폰에는 부모님의 연락이 없다. 

왜 연락을 안 하는 걸까. 정말로 날 버린 걸까.

부모님 생각만 하면 우울해진다. 한 시간 전에 갑자기 울리는 진동에 혹시나 엄마가 문자를 했을까봐 놀라 휴대폰을 열었더니 원홍의 문자였다. 지금 어디 있냐고.

아쉬운 마음을 접어두고 곽건화 집에 간다고 답장을 하니 바로 전화해서 노발대발을 하던데 거기 아님 갈 데도 없다고 말하니까 아무 말을 않는다. 맞아. 형에게 지고 싶지 않지만 여기 아니면 더 이상 갈 곳이 없어. 다시 내발로 스스로 집으로 돌아가고 싶진 않다. 

실은 아직 실감나지 않고, 외면하고 싶은 것이다. 어쩌면 부모님이 나를 포기하신 건지도 모른다고. 나를 버린 건지도. 이대로 영원히 부모님의 연락은 닿지 않고, 영원히 나를 보고 싶어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형을 좋아하는 것은 시작일 뿐이다. 곽건화가 좋다는 걸 부정하고, 인정하게 되는 그 과정은 앞으로 있을 절벽 같은 미래의 작은 한 발자국일 뿐이었다. 힘들게, 두려움을 이겨내고 절벽을 올라선다한들 내 머리 위로 남은 벽은 끝도 없다. 아무리 고개를 들어도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아주 약간의 실수만으로도 나는 저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되는데 절벽 위로 올라서는 것은 쉽지도 않고 가능해보이지도 않았다.


또 시간만 나면 우울해져. 소파 한 켠의 쿠션을 끌어당겨 안는다. 쿠션 위에 턱을 대고 눈을 감았다. 하나도 졸리지 않는다. 슬쩍 눈만 들어 벽에 걸린 시계를 보자 7시 30분. 형은 언제 올 셈이지. 안 들어오는 거 아냐? 나 있다고.. 아냐.. 그러면 날 왜 오라고 했겠어. 


가방이나 정리하자. 오늘 숙제 뭐 있더라. 수학이던가. 아. 수학 오답노트 세 번씩 적으라고 하셨지. 바닥에 내려둔 가방을 열었다. 후거의 가방 안은 늘 책으로 가득 차 있었다. 형이 네가 자세가 구부정한 건 가방 때문이라고 해도 가방은 무거워야한다. 그래야 공부를 하는 기분이 들었다. 가방 안에 든 여섯 권의 책 중에서 수학책과 노트를 꺼내고 필통까지 든다. 노트를 펼치고 틀린 문제도 가지런히 두곤 후거는 숫자가 아닌 다른 글자를 쓴다.


곽건화.


텅 빈 머리로 저도 모르게 건화의 이름을 쓰곤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필이면 샤프도 아니고 볼펜으로 써서 지워지지도 않아. 씨. 곽건화는 대체 나랑 전생에 무슨 연이라 내 머릿속에서 이렇게 빠져나가질 않는지. 수학공부 하기 싫어. 숙제도 하기 싫어. 


7시 40분.

형 언제 와?


곽건화가 쪼끔 미운 건 미운 거지만 보고 싶은 것도 보고 싶은 거야. 겨우 내가 자존심 구기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왜 자기가 뭐라고 일찍 안 와? 자기가 오라고 했으면 맛있는 거 해놓고 방안도 따뜻하게 해놓고 기다려야하는 거 아닌가.


“이씨.”


이젠 곽건화가 날 좋아하는지도 모르겠어. 그냥 날 동생이라고 생각하는 거 아닐까? 그냥 남동생. 만약 그렇다면... 다리를 분질러 버릴 거야. 농구 못하게. 농구를 못하면...


건화의 이름을 쓴 그 위에, 동그라미를 반복적으로 그리던 후거는 현관문 쪽에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든다. 형 왔나봐. 그렇게 자각하자마자 문이 열리고 찬바람과 함께 건화가 들어섰다. 그리곤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거실의 후거를 본다. 어딘가 믿기지 않아 하는 얼굴이기도 하고, 본인이 오라고 해놓고 잊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마 후자에 가깝지 않을까. 그 생각에 미쳐 후거는 뚱한 목소리로 인사한다.


“왜 늦게 왔어?”

“....오다가.. 페페 간식 좀 사느라.. 기다렸어?”

“....누가 기다렸대? 그게 아니라.. 집 주인이 안 오니까 그렇지 뭐.”


기다렸냐고 물으니까 또 좀 기분이 이상하네. 기다린 게 아니라.. 그래 기다린 거 아니거든. 집주인이 집에 안 오니까 그냥 뭐 궁금하고.. 뭐.... 아니 형 기다린 거 맞는 거 같은데.


건화는 후거의 속마음을 알 수 없는데, 그가 들여다본 것 마냥 창피하고 부끄러워져 날 선 손길로 책장을 넘겼다. 종이가 휙휙 구겨져도 조금도 개의치 않고 의미 없이 페이지만 계속 넘기고, 건화는 후거를 보다 현관문을 닫는다. 자기 집임에도 불구하고 어색하게 한복판에 서 있다, 건너편 방문을 열어 그 안에 들어간다. 거긴 형네 방 아닌데. 텅 빈 방 아닌가 거기.


“아.”


난방도 때우지 않아 차가운 방 안에 들어선 건화는 잡다한 것들이 대충 쌓여있는 경관에 다시 몸을 돌렸다. 여기 아니지. 원래 큰방에서 이불 꺼내려고 했는데 내가 왜 이 방에 들어왔지. 정신이 하늘 위로 떠올라 사라진 것 같다. 후거 쪽으로 고개를 슬그머니 돌리다 눈이 마주치곤 미간을 좁혔다. 후거가 이 곳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오라고 했을 때 알겠다는 대답을 듣긴 했으나 후거에게 잘못한 것이 많으니 올 거란 기대도 없었는데.. 불러 놓고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좀 웃기긴 한데. 


“방은 저 방 쓰면 돼. 다 치워져있으니까 들어가 봐.”


옆방을 가리키며 말했다. 후거는 건화의 말을 듣자마자 풀어 헤친 짐을 다시 가방 안에 넣어 끌어안곤 일언반구 없이 빈방 안으로 사라졌다. 

방은 조금 늦게 알려줄걸 그랬나. 듣자마자 홀라당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버리니 말을 걸 기회도 사라졌다. 건화는 떨어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떼며 제 방 안으로 들어간다. 갑자기 후거가 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가 떠올랐다.




***



후거가 우리 학교에 왔다.

여기오지 말고 더 좋은 학교에 가라고 했지만 막상 우리 학교로 결정되었을 때 느꼈던 그 간질간질한 설레임은 솔직히 감추기가 너무 힘들었다.


새 학기가 시작 되고 3학년이 되어 처음 등교하는 날. 건화는 새 학기, 새 학년, 새로운 반이 아니라 후거와 함께 등교할 수 있다는 것에 흥분했다. 오죽하면 수학여행을 앞둔 학생마냥 전날 밤에 잠을 못 이뤘을까. 그러나 애석하게도 1학년과 3학년의 등교시간이 달라 지각을 감수하더라도 도저히 함께 등교할 수가 없다. 


또, 마음은 매일 같이 1학년 교실에 머물러 있으나 후거는 건화가 찾아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형이 학교에서 유명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미 본인만으로 주목 받아서 힘들어 죽겠는데 곽건화까지 끼면 곤란하다. 그러니 같은 학교에 다니면 뭐하나. 얼굴 보는게 쉽지 않다. 2학년은 1학년 건물이랑 함께 있어서 계단만 올라가면 되는데 3학년은 공부하라고 운동장을 사이에 두고 저기 멀리까지 떨어져있다.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안 드네.


그렇게 잔잔한 가을의 날씨가 점점 매섭게 변할 시기, 먹은 음식이 소화되기도 전에 급식실에서 나와 공부터 붙잡은 건화는 매일같이 함께 운동하는 무리들과 함께 축구를 시작했다. 아무래도 점심시간에 농구는 좀 그렇고. 뱃속이 무거우면 점프가 안 돼.


한참 집중해서 본인 팀이 흐름을 빼앗아가던 찰나, 공을 향해 뛰던 건화는 손바닥만한 책을 보며 걷는 후거를 발견했다. 소화라도 시키려는지 운동장 주변 산책로를 천천히 걷고 있었다. 친구는 안 보이는데. 혼자 산책중인가. 문자해도 대답없던데, 휴대폰을 두고 온 거야, 아니면 그냥 내 연락을 무시한 거야? 

누가 수석입학 아니랄까봐 걸을 때도 책에서 눈을 못 떼네. 저러다 넘어지는데. 공을 보며 뛰던 건화도 어느새 자리에 멈춰 서서 후거에게 시선을 고정한다. 후거가 걷는 방향으로 눈도, 목도, 몸도 따라갔다. 후거는 건화가 있는지도 모르고 책만 보며 걸을 뿐인데. 그러다 한참 걷던 후거가 방향을 잘못 틀어 나무가 서있는 쪽으로 향해간다. 어어.. 저기로 가면 이마 박을 텐데. 


“후거!!”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건화는 긴 생각을 거칠 틈도 없어 후거의 이름부터 불렀다. 꽤 멀리 떨어져있어서 듣지 못할까 걱정이었는데, 이어폰을 끼고 있지는 않은지 후거의 고개가 건화 쪽으로 돌려진다. 차분히 앞으로 나가던 발걸음도 멈췄다. 둥그렇게 눈을 뜨고 놀란 듯 보는 후거와 눈을 마주치자, 건화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벅찬 감정이 폐부에 스며드는 것이 느껴진다. 괜히 뿌듯하고, 괜스레 뒷목덜미가 간지럽다. 후거는 그냥 불러서 쳐다보는 것뿐인데도 네가 날 향하고 있다는 게 기뻐 몸둘 바를 모르겠다.


그리고 건화가 후거의 대한 감정으로 벅차오르고 있을 때, 친구들이 다급하게 건화의 이름을 부른다. 동그란 눈을 하고 있던 후거도 손에 쥔 책까지 떨어뜨리며 뛰었다. 


“왜?”


그리고 건화가 왜 그러냐 물으며 후거에게 팔을 뻗는 순간, 머리로 공이 날아왔다. 아,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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