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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세상에서 가장 추운 겨울이다.

북쪽과 비교하면 상해는 비교적 따뜻한 겨울을 보내는 거라지만 후거는 이 이상 추울 수가 없다. 온 몸이 얼어붙는 것 같다. 눈물이 흘러내린 뺨 위에 성에가 일고, 손끝과 발끝은 하얗게 굳어가는 것 같다. 모두 후거의 생각일 뿐이지만.


원홍의 집에는 8시가 넘어서야 도착했다. 집의 벨을 누르기 전, 10분여간 눈물을 닦고, 코를 훔치고 마음을 진정시켰다. 울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후거는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보호받는 존재로 여겨졌지만 실은 후거는 그런 보호가 필요 없다. 강한 사람이고 혼자서도 이겨낼 수 있다. 걱정 끼치고 싶지도 않고 걱정을 받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빨갛게 끝이 서린 손으로 쉴 새 없이 눈물을 닦아내고 웅크려 있다가 벨을 눌렀다. 누구냐고 묻지도 않고 대문이 열렸다. 


어쩐지 얘가 너무 쉽게 승낙을 하더라니. 부모님은 큰집에 내려가셔서 집안에 얘 하나 밖에 없다. “심심해 죽는 줄 알았다니까.” 탁자에 발까지 올려놓고 티비로 드라마 보고 있으면서 뭐가 심심해. 그래도 내심 눈치가 보였는데 부모님이 안계시다니 조금은 마음이 놓인다. 휴우. 원홍이 듣지 못하도록 작게 한숨을 쉰 후에 가방을 내렸다. 가방에 잠깐 그의 시선이 닿았으나, 잔소리 할 줄 알았던 녀석은 아무 말 없이 티비로 고개를 돌린다. 드라마에 완전히 빠졌네.


원홍의 방에 들어가 가방에 물건을 정리하고 바로 씻고 나왔다. 정말 오랜만에 느긋하게 씻은 후에 가방에 챙겨둔 잠옷으로 갈아입고 나오자 드라마가 끝났는지 거실의 불을 끄고 기지개를 펴던 녀석이 혀를 차며 후거를 놀린다. “야. 가출이라도 했냐? 무슨 잠옷까지 챙겨와.” 찔린 마음에 대꾸를 않고 쪼르륵 방으로 도망쳤다. 잔소리쟁이면서 바닥에 요까지 깔아놨네. 푹신한 요 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스탠드를 아래로 내려 플러그도 다시 꽂는다. 후거가 하는 행동을 힐끗 본 원홍은 별 말 없이 욕실로 들어갔다. 쟤가 공부에 환장한건 이미 안지 몇 년이 지났으니 유난일 것도 없다.


물론 후거도 친구 집까지 와서 공부를 하고 싶지는 않지만, 내일 수학쪽지 시험이 있는데 어제 오늘 공부를 거의 못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원래 계획은 학교에서 늦게까지 공부하려던 거였는데 곽건화가 보고 싶어서 심란한 마음에 수업이 끝나자마자 가방을 챙겼다. 이게 다 곽건화 때문이다. 내일 수학시험 망쳐서 빽빽이 쓰게 되면 그것도 다 곽건화 때문이야. 멍청이. 겁쟁이.


엎드려 책을 펴서 문제를 푸는데 영 머리에 안 들어온다. 간단한 계산도 복잡한 문제처럼 헷갈렸다. 7...1...... 숫자를 쓰면서도 자꾸만 좀 전의 일이 되살아난다. 십. 구. 팔.. 칠... 일... 열을 셀 때 까지 아무 말도 못하던 곽건화.


“으...”


진짜 너무 못났다. 왜 좋아했는지도 모르겠어. 안 좋아할 거야. 진짜로. 정말로.

문제를 풀이하던 노트 위에 건화의 이름을 빨간색 볼펜으로 적으며 맹세했다. 오늘부터 절대로 좋아하지 않겠다고. 보고 싶어 하지도 않겠다고. 그렇게 다짐한지 1분이 지났을 때. 씻고나온 원홍이 묻는 한 마디에 맹세한 것은 어디로 홀랑 달아나고 없다.


“너 근데 왜 건화형이랑 싸웠냐?”

“어?”

“싸웠잖아. 요새 둘이 말도 안 한다며.”

“너한테까지 소문 다 돌았어?”

“내가 모를 리가.”


머리에 수건을 얹은 채로 욕실에서 나온 원홍은 그대로 엎드린 후거 옆에 앉아 턱을 괸다. 왜 싸웠는데?


“머리나 닦아.”

“네가 좀 닦아주라.”

“아, 저리 꺼져. 책에 물 떨어지잖아.”

“하여튼 공부에 미쳐가지고..”


타박하는 소리에 엉덩이를 뒤로 빼 물러나긴 하는데, 그러면서도 계속해서 건화와는 왜 사이가 나빠진 거냐고 묻는다. 대답하기 싫었다. 쟤가 저러니까 공부도 하나도 안 되고. 결국엔 소득 없이 책과 공책을 닫아 한곳에 가지런히 두고 이불로 몸을 둘둘 감고 입술만 달싹인다. 원홍은 더 이상 재촉하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후거만 바라본다. 그게 더 부담스럽다. 장난이라도 좀 치지. 

이불 속에 숨긴 두 손을 꾹 쥐고, 눈을 둘 곳이 없어 벽에 시선을 뒀다. 덕지덕지 붙은 포스터들. 까만 배경 속, 조명 아래 노래를 부르는 남자 가수를 보다 한숨을 쉬었다. 어떡하지. 한참을 망설이던 후거는 두 눈을 질끈 감는다. 그래. 말하자.


“딴 사람한테는 말하지 마..”

“알았어. 말 안 해.”

“사실.... 나 게이야..”


나 사실 건화형 좋아해... 우울하게 이은 고백. 입술을 우물우물대던 후거는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리곤 차마 들 용기가 나지 않았다. 원홍이 이대로 쫓아 보낸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각오하고 한 말이니까. 그래도 얘라면 다른 곳에 소문은 내지 않을 것 같으니까. 욕하고 더럽다고 수모를 줘도 받아들여야겠지.


하지만 그렇게 끝과 끝까지 생각했던 후거의 상상과 달리 원홍은 완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다. 좀 전에 무릎에 팔을 대고, 턱을 괸 자세 그대로였다. 숨만 쉬고 있지. 친구가 아무런 대답이 없자 슬그머니 고개를 든 후거는 눈이 마주치고 어깨를 움츠렸다. 왜. 왜?


“너 설마.. 네가 형 좋아하는 걸 이제 안 건 아니지?”


자신 없는 목소리로 작아진 후거를 보며 묻는다. 쟤가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어..? 어? 


“그러게 내가 형이랑 친하게 지내지 말랬지.”

“너... 그거 어떻게 알았어?”

“척보면 척이지.”

“그럼 너 내가 게이인 것도 알고 있었어?”

“어.”


너무 쉽게 나오는데 대답이.

나는 얼마나 힘들게 말했는데.... 나도 몰랐던 걸 왜 네가 알아? 어! 나도 내가 게이인거 안지 얼마 안 됐는데 왜 네가 나에 대해서 알아! 놀라고 어이없는 마음에 이불을 뒤로 재끼며 흥분해 바닥을 두드렸다. 원홍은 얘가 왜 이러냐는 듯 자세를 고친다. 친구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후거 본인은 환장할 것 같다. 뭔데. 뭔데 나.. 나 막 티 나고 그래? 막 길 걷는데 위에 게이라고 글 써져있어? 누가 내 등 뒤에 붙여놓은 거 아냐? 혼자만의 상상으로 고개를 최대한 꺾어 등 뒤를 보려고 했지만 연체동물이 아닌 이상 등 뒤를 볼 수는 없다. 손을 뒤로 뻗어 만지는데 당연히 아무것도 없지.


“막.. 막.. 티나..? 내가 막.. 게이들처럼 말해?”

“야. 세상 게이라고 다 어머어머하고 다니겠냐.”

“난 하나도 모르겠어..”

“어른 되면 다 알게 될 거야.”

“지랄하지 마.”


지가 어른인 척 하고 있어. 무릎을 굽혀 당겨 안았다. 원홍이 하는 말이 잘 이해가 안 간다. 쟤는 그리고 왜 저렇게 멀쩡한 거지. 난 내 친구가 게이라고 하면 펄쩍 뛸 것 같은데. 쟤는 왜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아. 진짜 하나도 모르겠다. 하나도.


“아, 어쨌든. 형이랑 그래서 사이 나빠진 거야? 형이 네가 싫대?”


머리 복잡해 죽겠는데 왜 자꾸 형 이야기를 꺼내고 그래. 기운이 빠진 얼굴로 그냥 고개만 저어 대답했다. 살짝 흔들었는데 또 왜 머리가 아프냐... 사는 게 너무 복잡해. 어려워. 이불을 어깨 아래로 잡아당겼다.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위에 올라앉은 원홍은 고민하는 듯 눈동자만 위로 굴린다. 하. 한숨을 터뜨렸다.


“난 진짜 하나도 모르겠어. 그냥 곽건화는 멍청한 자식이야.”

“맞아.”

“뭐?”

“맞다고. 멍청한 거.”

“형 욕하지 마!”


너무 복잡하고 우울해서 욕을 좀 했더니 두말없이 튀어나온 맞장구에 후거의 미간이 팍 좁아진다. 어깨에 덮고 있던 이불까지 아래로 내리며 언성을 높이자 원홍은 억울하다는 듯 눈을 크게 키우며 흥분한다. 지가 먼저 욕해놓고 왜 나한테 뭐라고 하는데?


“미친놈이 진짜.. 편들어줘도 난리네.”

“몰라! 복잡해서 머리 터지겠으니까!”

“뭐가 복잡해? 내가 보기엔 네 문제집에 수학문제보다 쉬운 일인데.”

“넌 남이니까 그렇지. 당사자 돼봐. 하나도 안 쉽거든.”


에이씨. 수학이고 나발이고 다 꺼지라 그래. 쪽지시험도 대충 칠거야. 기쁘게 해드릴 부모님도 이제 없는데 성적이 무슨 상관이야.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여기 와서까지 공부를 하고 있냐. 신경질적으로 문제집을 발로 차 문 앞 까지 밀어버리고 이불을 몸에 둘둘 말아 누었다. 베개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뒤통수를 바닥에 박아 끙끙 거리는 소리를 내며 웅크렸다. 아파 죽겠네. 아이씨. 집 나가면 고생이라더니. 새삼 설움에 북받친다. 새우처럼 몸을 만 상태로 답답한 공기를 들이 마시고, 내쉬는 것을 반복하지만 숨을 쉬어도 쉰 것 같지가 않다. 폐부에 꽉 차도록 공기를 마신 후. 후거는 건화 생각에 잠겼다. 

긴 속눈썹. 끝으로 갈수록 넓어지는 쌍커풀. 동그란 코 끝. 매사에 무관심 하면서도 공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는 멍청이. 곽건화는 그래서 페페랑 친한가봐. 페페도 공만 보면 쫓아가느라 정신이 없는데. 


“야, 베개 저기 있어. 애벌레 돼서 움직이지도 못하겠다.”


후거가 베개를 찾아 이리저리 머리를 박는 것에 혀를 차며 침대에서 내려와 베개를 주워주는데, 어쩐지 애벌레 후거가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질 않는다. 원래라면 온 몸을 비틀며 아파죽겠다고 소리를 악을 썼을 애가 왜 이렇게 조용하지. 야. 후거. 베개를 바로 머리 위에 대며 후거의 몸을 흔드는데, 그 순간 울음소리가 섞여들었다. 흔들던 손이 멈춘다. 후거는 더 작게 몸을 말며, 삼키고 있던 숨을 한꺼번에 뱉으며 울먹인다. 흐윽. 이불 속에 파묻힌 후거가 울음 섞인 목소리를 내자마자 원홍은 순식간에 굳어 버벅인다. 


쪽팔려서 친구 앞에서 울지 말아야함에도 불구하고, 그 감정보다도 곽건화에 대한 미움과 스스로가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다. 곽건화가 너무 싫다. 너무 싫고 밉다. 걷어차고 밀어내고 모든 설움을 쏟아 붓고 싶었으나, 그보다도 곽건화가 좋다. 미워하면서도 좋아하는 마음을 포기하지 못하는 자신이 싫었다. 곽건화가 뭐라고. 그렇게 겁쟁이에, 용기 없는 멍청이가 뭐가 그렇게 좋다고 나는 가출까지 하고, 이러고 친구 앞에서 울고 있을까. 모든 것을 멀리 떨어져서 제 3자의 눈으로, 객관적으로 보려 해도 소용이 없다. 나는 당사자고, 곽건화는 내 삶에 있어서 또 다른 주인공이었다.


"야, 후거, 그만 울어. 네가 운다고 형이 알겠냐..."


후거와 친구가 되고 이렇게 서럽게 우는 것을 처음 보니 원홍은 쩔쩔매며 바닥에 웅크린 후거의 몸을 세웠다. 엉망이 된 머리카락. 이불 속에 푹 파묻힌 우는 얼굴. 건화 형만 만나고 오면 애가 기분이 두둥실 떠다녔었는데. 후거가 형을 좋아하는 건 이미 앳저녁에 알았다. 이렇게까지 좋아하는지는 몰랐지만. 

당황해 두 팔만 허공을 휘젓던 원홍은 결국 후거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인다. 흐윽, 흐.. 으윽... 꾸역꾸역 참아내는 울음이 귀에 크게 닿는다. 후거의 말이 맞다. 원홍은 당사자가 아니니 그 마음을 짐작할 수 없다. 그 크기가 얼마인지도, 얼마나 깊은지도.



흐윽, 흑 울던 후거도 마음이 진정이 되는지 섧게 우는 것을 멈추고 어깨만 이따금씩 딸꾹질에 맞춰 움찔거렸다. 다 큰 놈 둘이서 부둥켜 안고 하나는 울고, 하나는 달래주는 일련의 과정을 떠올리니 새삼 팔뚝에 닭살이 오소소 돋는 것 같아 원홍이 엉덩이를 바닥 위에 내리며 앉아 멀어진다. 후거는 흘러내려간 이불을 다시 여미며 입술만 우물댄다. 아직 축축히 물기가 남은 제 머리카락을 슥 넘겨 만진 원홍은, 망설이던 것을 입 밖으로 내었다.


"형도 너 좋아한대?"

".....그런 것 같은데.. 말을 안 해."


운다고 아무 대답도 안 할 줄 알았는데, 후거는 예상보다 쉽게 목소리를 내며 대답한다. 비록 아직 울음기가 섞여 코맹맹이 소리가 나긴 했지만. 그 꼴이 너무 애새끼 같아 놀리고 싶어도 지금 분위기에선 그러면 안 되겠지. 자세를 고쳐 잡아 앉았다. 후거도 원홍을 따라 고쳐 앉다 코를 훌쩍였다. 곽건화에게 어퍼컷을 날리고 싶다.


"형은 무서운가봐. 나도 무섭긴 한데.. 그래도, 형은 그래도..... 아. 모르겠다. 말 걸지 마."

"알았다. 그냥 잠이나 자라. 그만 울고. 우리 집 눈물바다 되겠다."


잠이나 자라고 하니 잠이나 자려고 꾸물꾸물 베개에 머리를 대고 몸을 뉘였다. 베갯잇 적시긴 싫은데. 양손을 곱게 모아 베개 위에 올리고 그 위에 뺨을 낸다. 손등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한숨을 속으로 삼키고 원홍이 불을 끈다. 이윽고 원홍도 침대에 눕는지 이불이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후거는 감은 눈을 슬쩍 뜬다. 까매서 아무 것도 안 보인다. 꼭 저의 하루하루처럼.



***



원홍네에서 일주일을 묵었다. 삼일간은 원홍이랑 단 둘이 있어서 편했지만 원홍의 부모님이 오신 이후부터는 아무래도 조금 불편했다. 그래도 두 분 다 좋으신 분이라 후거가 신세를 져도 아무 말씀 안하셨으나 일주일이 되니 후거가 불편하다. 휴대폰에선 역시나 부모님의 연락이 없다. 조용한 휴대폰에 하루에도 몇 번씩 울고 싶었지만 더 이상은 감정을 소모하는 것도 사치처럼 느껴져 그러지 않았다. 원홍은 며칠 더 있으라고 했으나, 후거는 딴 친구 집에 가겠다고 나왔다. 사실 갈 곳도 없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그 안일한 마음으로.


공부를 거의 안했는데 쪽지시험도 잘 봤고, 요즘은 몸 상태도 나쁘지 않다. 내면의 상태는 점점 안 좋아지는데 몸은 괜찮아 진다는 게 아이러니 하긴 한데. 


아무리 3학년 건물과 많이 떨어져있다 해도, 가끔씩은 형을 보게 됐다. 점심시간에 친구들과 축구하러 나왔을 땐 정말 보기 싫어도 눈이 갈 수 밖에 없다. 급식실을 나오면 바로 앞에 골대가 보이는 걸. 아무 생각 없이 채소만 쏙쏙 골라 밥을 먹고 나와서 바로 보는 게 공을 차고 골대로 돌진하는 곽건화면, 정말 그날 하루 종일 재수가 옴 붙는다. 머리에서 땀을 흘리는 곽건화가 사라지질 않았다. 거지같아. 짜증나. 원홍에게 곽건화가 재수 없다고 말하면, 원홍이 그 형은 원래 그랬다고 맞장구치는데, 또 맞장구를 치면 후거는 뿔이 나서 그런 사람 아니라고 대꾸했다. 본인도 본인이 이상한 거 안다. 근데 남이 우리 형 욕하면 짜증나는 걸 어떡해.


그렇게 곽건화를 보게 되면 짜증이 치민다는 후거는 그 마음과는 다르게 점심시간만 되면 운동장을 슥 보고 지나친다. 텅 비어있거나, 혹은 사람은 있는데 곽건화만 없는 날이면 재수 옴 붙은 날 보다 더 우울한 점심시간을 보낸다. 아니면 그런 날은 소화 좀 시키고 오겠다며 학교의 강당으로 향했다. 거긴 농구코트가 있으니까. 아무도 후거가 어딜 가는지, 목적이 뭔지 관심 없을 텐데 주변 눈치를 살피며 강당에 나 있는 창문 쪽에 얼굴을 댄다. 발꿈치 바짝 들어 올려 아슬아슬하게 서서 청소를 안 해 거의 불투명한 창문 안을 집중해 보는데, 아무 것도 안 보인다. 아씨! 여기는 왜 청소를 안 해서 유리가 왜 이렇게 더러워!


심술 맞게 강당 벽을 발로 차고 계단을 오르자마자 쿵, 쿵- 공이 바닥을 쿵쿵 때리는 소리가 들린다. 귀가 솔깃했다. 아. 안에 사람 있나보다. 몰래.. 조금만 보고 가야지. 조금만. 강당 문을 살포시 열고 눈만 갖다 댄다. 안에는 다른 사람 없이 오로지 곽건화 혼자만 있었다.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다. 

건화는 농구공 다섯 개를 발치에 두고, 가만히 서서 슛 연습만 하고 있었다. 말이 연습이지 넣는 것 마다 골대 안으로 들어간다. 아주 잠깐 보고 가야지. 하는 생각은 건화를 볼수록 5초만, 10초만, 30초만, 1분만. 하며 길어졌다. 아직 점심시간은 삼십분 넘게 남았잖아. 조금만. 조금만 더 보고 가자. 조금만. 그렇게 아주 조금만 더 보고가자고 생각한지 오 분. 강당 위를 나구르는 공들을 하나하나 주워오던 건화는 문 가까이 멈춰선 공을 향해 몸을 돌렸다. 후거가 아차. 하고 문을 닫으려 하기 전에. 한 템포 늦은 후거는 결국 건화와 눈이 마주쳤고, 깜짝 놀라 아무것도 못하고 달아나지도 못하고 얼음이 된 후거를 대신해 공을 주운 건화가 친히 강당의 문까지 안으로 열어줬다.


“추운데 거기서 뭐 해.”

“어...... 강당 들어가려고 했는데 형 있어서 망설이고 있, 었던 거야.”


지기 싫어서 말은 잘 나온다. 내친 김에 숙이고 있던 허리도 펴고 당당하게 강당 안으로 들어섰다. 근데 곽건화, 추운데 밖에서 뭐 하냐고 하더니 강당 안이랑 밖이랑 온도차이가 거의 안 느껴진다. 바람만 안 불 뿐이잖아.


농구공을 모아 텅 비어있는 공 바구니에 우르르 쏟아 넣은 건화는 그대로 뒤돌아 후거를 본다. 후거도 건화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왜. 뭘 봐. 왜. 뭐. 왜. 형은 나한테 감사한 줄 알아야해. 나처럼 착한 사람 아니었으면 벌써 오십대는 맞았어. 속으로 꿍얼꿍얼. 입술을 꾹꾹 문다. 건화는 바구니를 닫고 불안한 듯 그 위로 손을 두드린다. 둘은 한참 말이 없었다. 후거가 먼저 “이제 갈래.” 하고 혼잣말처럼 말 했을 때, 건화는 다급히 입술을 열었다.


“지금은 어디서 지내?”

“왜. 내가 왜 말해줘야 하는데?”

“우리 집에 와서 있어.”

“싫다고 했잖아.”

“너 이제 더 신세질 친구도 없잖아.”

“..씨이..”


곽건화는 나에 대해서 너무 잘 알아. 아마 내가 누구의 집에서 며칠간 신세를 졌는지 말 안 해도 대충 눈치 채고 있겠지. 매일 같이 조잘조잘 곽건화한테 그 날 하루 있었던 일을 모조리 말했던 지난 과거가 걸림돌이 되도 한참 됐다. 짜증나네. 근데 지가 나한테 왜 이렇게 관심을 가져. 좋아한다는 말 하나 못하는 멍청이가 어디서 형인 척 하고 그래.


“나한테 말 걸지 마.”

“말 안 걸 테니까 우리 집에 들어와.”

“지금도 말 걸고 있잖아?”

“장난치는 거 아니야.”

“나도 형이랑 장난 칠 기분 안 들어. 이제 형이랑 나랑 아무 사이 아니니까 나랑 아는 척 하지 말라고.”

“...형동생은 아니게 되더라도 학교 선후배정돈 될 수 있잖아. 아직은.”


진짜 답답해서 때리고 싶어. 어퍼컷은 무슨. 묶어서 마구 때리고 괴롭히고 싶다. 속에서 불이 끓는 것 같아 크게 심호흡한다. 저 입을 콱 막아 버리고 싶은데 그럴 수 없으니 속만 타들어가지.

건화는 바닥에 던져둔 교복 자켓을 들어 가까이 다가왔다. 마음은 뒤로 물러서 그와 멀어지고 있지만 겉으로는 쎄 보이고 싶어 꿈쩍도 안한다.


“나 이제 형 싫어해.”

“....”

“겁쟁이 같은 형 싫으니까 옆에 있기도 싫어.”


그 말을 하는데 어쩐지 마음속에서 울컥한다. 파도가 이는 것 같다. 바짝 말라있던 모래사장이 바닷물에 흠뻑 적셔졌다. 스스로 말하고도 속이 상해 고개를 돌렸다.


“나도 알아. 그래도 현실적으로 생각해. 우리 집엔 부모님도 없고, 나 혼자 살고, 집도 크니까 너한테 방도 따로 줄 수 있어. 네가 뭐하는지 신경 안 쓸 게. 말도 안 걸 테니까 우리 집에 들어 와.”

“싫다니까.”

“너 당장 잠 잘 곳도 없잖아. 뻐기지 마.”

“형이 싫어.”

“알아. 하지만 싫은 거랑 어쩔 수 없는 것도 구분해야 해.”


다 아는 척 하지 마. 형은 하나도 모르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하지만 건화의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었다. 당장 오늘부터 머물 곳이 없다. 후거도 알면서도 자존심 때문에 뻐기고 있는 중이니까. 하지만 형네 집에 들어가는 건 싫어. 싫은데. 


곽건화가 밉다. 모든 걸 그의 탓으로 돌리고 싶다. 내가 이렇게 된 게. 내가 집을 나온 것도 다. 다. 내 일은 내가 책임지겠다고 나온 건데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그 마음이 약해진다. 원망을 돌릴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점심시간은 이제 10분도 채 남지 않았다. 초침 없이 흘러가는 커다란 시계를 보다 고개를 내린 후거는 한참을 망설이다 “알았어.” 하고 수긍한다. 그러자 더 가까이 다가온 건화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후거에게 내밀었다.


“난 연습한다고 좀 늦게 갈 수도 있으니까. 열쇠 받아가. 나한테 여분 열쇠 있어.”


이미 가겠다고 했으니 여기서 받기 싫다고 할 수도 없다. 후거가 그저 말없이 손을 내밀자, 그 위에 열쇠가 가볍게 떨어진다. 손끼리 닿은 접촉은 하나도 없었다. 전에는 손잡고 싶어 안달이던 곽건화가. 새삼 달라진 관계와 거리감이 느껴져 숨이 막혀왔지만, 후거는 애써 표정을 갈무리한다. 내가 형을 좋아한다고 형에게 약자일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되고 싶지도 않고. 다만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더라도, 그 속마음까진 감추기 힘들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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