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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곽건화는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바래다줄게.”, “필요 없어.” 건화의 손을 뿌리치고 혼자 집을 향해 걸었다. 쓰고 있던 모자는 벤치 위에 성의 없이 내팽겨 친 후였다. 둔탁한 발걸음으로 대문을 나섰으면서, 얼마가지 못해 주춤하더니 뒤돌아본다. 건화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걸음을 멈췄다. 건화도 후거를 보고 있을 것이다. 그가 와서 안아주길 바랬지만, 건화는 그러지 않았다.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간다. 닫히는 현관문에 확인사살 당한 후거는 눈물을 훔치며 그림자가 점점 옅어지는 저녁, 축축해진 발걸음을 빨리했다.

 



그 이후였다.

거의 일주일간 형을 만나지 못했다. 농구부 전국체전과 훈련 때문에 타 지역으로 합숙을 갔기 때문이었다. 대입 시험이 두어달 앞으로 다가와도 곽건화는 아예 농구에 빠져서 산다. 어차피 형은 대학에 관심도 없어보였지만.


차라리 잠시 떨어져 있는 게 다행이라 생각했다. 후거에게도, 건화에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

중간고사도 끝났고, 학교에서도 느슨하게 풀려져있는 시점, 후거는 집에 돌아와 짬짬히 게이에 대해 검색했다. 이상한 글이 나오기도 하고, 야한 사진과 동영상들도 많이 떴다. 그런 것들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몇 시간의 서핑 끝에 그들만의 커뮤니티 사이트를 찾았다. 성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었지만, 게중에 진지한 글도 있었다. 이성애자를 짝사랑하는 남자의 글이었다. 자신감 없고, 용기 없고, 희망 없는 장문의 글을 읽으며 후거의 속은 점점 작아지고 얕아졌다. 몇 줄을 남기고 결국 인터넷 창을 꺼버리고, 몸을 웅크려 껴안고 뜨끈하게 열이 오른 눈을 감는다.


확신할 수 있다.

저 남자와는 다르다. 짝사랑이 아니었다.

후거 혼자만 앓는 감정이 아니고, 돌아올 마음 없는 외로운 감정도 아니다.

제가 건화를 좋아하는 것처럼, 건화도 저를 좋아하고 있다.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런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다정하게 챙겨주고, 키스에 응하고, 후거의 몸을 만지며 흥분했다. 건화가 저를 좋아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더 없이 완연하게 확신하고 있으면서도 불안한 것은, 후거도 건화도 남자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게이가 될 거라고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고, 게이가 될 자신도 없다.

 

말하지 말 걸.”

 

그 때 참았어야 했는데. 새삼 돌이키자 목구멍을 꽈악 메우는 듯 후회가 밀려든다. 내일 쯤 형이 돌아올 텐데. 혹시나 마주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뭐라고 해야 하지. 무슨 말을 해야 하지.

 

후거는 그저 기도한다. 건화가 후거에게 먼저 다가와, 청리와 헤어졌다고 말해주기를. 그 애보다 너를 더 사랑한다고 말해주기를. 건화는 후거보다 형이니까, 두 살이나 더 많으니까 그가 후거를 책임져주기를. 후거의 두려움을 걷어주고 그가 붙잡아 주기를. 아무도 축복해주지 못할 사랑을 책임지기에는, 후거는 겁도 많았고 용기도 없었다. 기대고 싶었다.

 

 

***

 

 

곽건화가 먼저 말 걸기 전에는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하필 등교하면서 만나게 되버렸다. 요근래 훈련 때문에 후거보다 훨씬 일찍 등교하던 건화는, 합숙과 시합이 끝난 뒤라 그런지 오늘은 제시간에 등교를 하는 것 같았다. 하필이면. 건화와 정면으로 마주한 후거는 아무 말도 못하고 눈만 굴리며 건화를 쳐다봤고, 건화는 잠깐 후거를 바라보다 눈 끝을 비비곤 이윽고 몸을 돌렸다. 걷는 보폭이 평소보다 넓고, 빠르다. 후거는 저를 지나쳐가는 건화의 뒷모습을 보며 눈을 끔뻑였다. 대충 맨 책가방과 춥지도 않은지 또 후드 차림으로 유유히 걸어가는 곽건화. 후거를 못 본 것도 아니고, 눈 까지 마주쳤는데 아무 말이 없다. 뭐지.

 

?”

 

저도 모르게 그를 불렀으나, 건화는 별 기색 없이 더 멀어질 뿐이었다. 못 들은 걸까. 못들은 척 하는 걸까.

 

 

 

저를 무시하고 지나치던 건화의 뒷모습이 그날 하루 종일 후거를 잠식했다. 수업이 하나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밥을 먹어도 아무 맛이 나지 않았다. 다 나았던 감기가 도질 것 같은 기분이다.

 

어젯밤 후거는 침대에 누워 건화를 떠올렸다. 곽건화가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을 떠올리고, 기쁘게 끌어안고 키스하는 것을 그렸다. 세상에 그 만큼 기쁠 일이 없을 것 같다. 처음으로 전교1등을 하던 날도 그에 비하면 행복도 아니라고 느껴질만큼. 상상만으로도 충만해지는 행복.


게이가 되고 싶진 않다. 당장 길가는 사람을 붙잡아 저는 남자지만 남자가 좋아요.” 하고 말한다면 누구든 후거를 더럽다는 눈으로 쳐다보겠지. 사람들에게 그런 취급을 받는 것도 무섭고, 당장 부모님께 폐를 끼치는 것도 무서웠다.


게이가 된다는 것은 최근 몇 년간 후거에게 닥친 가장 큰 고통이자 두려움이었고 미래를 차마 상상하지도 못하게 할 정도로 큰 스트레스였다. 그러나 그 상대가 건화라면, 견딜 수 있을 것 같다. 건화가 늘 그래왔던 것처럼 떼쓰는 후거를 보듬고, 달래주고, 안아줄거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설사 게이가 된들, 건화와 함께라면 무서워도 어떻게든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근데 형은 아니었나봐.

 

그날 후거는 학교가 파하자마자 건화의 집으로 달려갔다. 농구에 미친 곽건화가 연습을 한다고 늦게 오는 걸 알면서도 집 앞에서 기다렸다. 희끄무리하게 푸른빛이 남아있던 하늘이 점점 주황색 빛에 물들다 보라색으로 변해갈 때 까지도 추위를 견뎌내고 벤치에 앉아 있다가, 코끝이 시리고 찬 공기에 닿은 뺨이 따가울 때 쯤 주머니에 넣고 있던 손을 뺨 위에 올려 식혔다. 이미 하늘은 새카맣다. 형은 언제 올지 모르겠다. 한 손안에 들어오는 휴대폰의 폴더를 열어 시간을 확인한다. 여덟시 오십분. 곧 있으면 아홉시다. 형에게 언제 오냐 문자를 보낼까 하다가, 아침에 차갑게 무시하고 가던 건화의 뒷모습이 생각나 그러지도 못하고 도로 휴대폰을 넣었다.

 

...”

 

여기서 기약 없이 계속 기다리다간 감기에 다시 걸릴 것 같은데. 어떡하지. 괜히 현관문 앞 까지 다가가 차가운 쇠문에 머리를 쿵쿵 찧으며 입술을 내밀었다. 열쇠도 없...

 

.”

 

그러고 보니, 몇 달 전에 건화가 후거에게 비상열쇠가 있는 곳을 알려줬다. 그 때도 후거가 건화를 기다린다고 마당에서 세 시간 넘게 앉아있었는데, 뒤늦게 들어온 건화가 전에 없이 화를 내며 후거를 다그쳤다. 집도 코앞이면서 뭐 하러 미련하게 앉아 기다리냐고. 그렇게 화를 내고 다시는 못 기다리게 했으면서 바로 비상열쇠를 둔 곳을 가르쳐줬다. “앞으론 나 없어도 그냥 네가 알아서 들어가있어.”

 

혹시나 형이 위치를 바꿔 놨을까봐 걱정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1층 창가 쪽에 나란히 세운 화분 중, 흙만 들어있는 두 번째 화분을 들었다. . 아직 있네. 가벼운 흙이 든 화분 아래, 손에 닿은 지 꽤 시간이 되어 보이는 스페어키를 들고 현관문 앞에 다시 돌아왔는데, 막상 문을 열고 들어가기 조심스러워진다. 형이 너 알아서 들어가라고 했지만 그 때랑 지금은 상황이 다르니까. 아랫입술을 꾹꾹 윗입술로 누르다 일단 저질러보잔 생각으로 열쇠를 넣어 돌렸다. 새카만 거실이 드러난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건화는 주택에 홀로 살고 있었다.

 

거실부터 난장판이었다. 현관에 신발들이 아무렇게나 벗어져있고, 눈이 닿는 곳 마다 옷들이 떨어져있다. 이래서 요즘에 집에 놀러오란 말이 없었구나. 근데 일주일에 두 번씩 청소하러 와주시는 분 계시는 걸로 아는데. 의아한 마음을 안은 채 널브러진 양말과 티셔츠를 피해 이리저리 걸으며 건화의 방문 앞에 닿는다. 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똑똑. 어차피 이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노크해본다. 차가운 문고리를 돌리고 연다. 거실은 아수라장이면서 본인방은 말끔하다. 문 옆의 벽을 더듬어 불을 켜고는, 안에 들어가길 망설였다. 들어가지 말까. 형이 화내겠지. 그래. 방 까진 들어가지 말자.


혼자 고개를 주억이며 결론을 내리고 다시 불을 끄려던 중이었다. 후거의 눈에 무언가 하나 들어온다. 맞은편, 허울만 좋은 책상 위에 오른 손바닥만한 액자였다. 들어가면 안 되는데. 후거는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당겨 앞으로 나아갔다. 교과서가 성의 없이 쌓여있는 더미 옆, 갈색 액자에는 여자친구인 청리와 찍은 사진이 들어있었다. 웃고 있는 청리와 무덤덤한 표정의 건화. 찍을 땐 별 생각 없었으면서 뒤늦게 좋아진 건가. 심장이 쿵, 하고 찍히는 것 같아 쓰린 마음에 가슴을 문지른다. 기분이 나빠졌다. 아니, 나쁜 게 아니라 들끓는 것 같았다. 또 못된 심보가 들어 액자를 들어 뒤집어 나무 뒤판을 떼어낸다. 그냥 사진은 뽑아내고 싶어서 그런 건데, 이상하게 사진이 두 장이었다. 유리너머 전시된 사진 뒤에 그보다 작은 사진이 끼여있다. 후거는 눈 끝을 좁히며 숨겨진 사진을 들어본다. 이번엔 다른 의미로 심장이 도끼에 찍히는 것 같다. 사진을 쥔 손이 흔들린다. 그러나 손을 떨면서도 혹여나 사진이 구겨질까 조심스레 책상 위로 내렸다. 형광등 불빛을 하얗게 반사하고 있는 사진은, 후거와 건화가 예전에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둘이서 추위에 떨며 꿋꿋이 밤바다를 걸었던 지난겨울 여행. 역동적인 사진을 찍어보겠다며 방파제 위에 세우고 찍다가 카메라가 떨어져서 찾느라 난리가 났었는데. 그렇게 애써서 찍어놓곤 후거는 까맣게 잊어버렸는데 형은 대체 언제 인화까지 해서 액자에 넣어 놓은 건지. 말도 없이.

 

생각해보니 겨울여행 그 짧은 기간 동안 형한테 민폐를 너무 많이 끼쳐서 굳이 일부러 떠올리지 않은 게 더 컸다. 기껏 조르고 졸라 아르바이트까지 해서 여행을 갔는데, 워낙 골골대는 체질에 겨울엔 감기를 달고 살아서 결국 바닷바람에 감기가 걸려 이박삼일 예정이었던 여행을 일박이일로 줄여야했고, 숙소에서부터 끙끙대며 앓아서 건화가 고생을 많이 했다. 야밤중에 편의점까지 가서 약을 사오고, 땀을 닦아주고, 잠도 못자고 후거를 보살폈지. 계획이 모두 망쳐져 일찍 돌아가야 할 때도 싫은 기색은 조금도 없었다.


그러고 보면 그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잔잔한 눈동자가, 열이 올라 흐릿한 정신 사이 짧게 스쳐지나가던 얼굴이 보일 때 마다 기분이 이상했다. 뜨겁고 불편하게 앓는 몸 너머로 울컥하는 감정이 스며들었다. 형을 좋아할 것 같았다. 유난스럽게 느껴지던 그의 다정함이 설레임으로 변하고 있었다.

 

액자 속 숨겨진 사진을 통해 하나씩 되짚어가자 마음이 묘하다. 썩 유쾌하지만은 않은 감정이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형의 마음은 알 것 같다. 확신할 수 있다. 곽건화는 나를 좋아하고 있다고. 어쩌면, 후거가 그를 좋아하기 훨씬 전부터.

 

심란한 마음에 사진을 어찌하지 못하고 보고만 있는데,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반쯤 열린 건화의 방문이 완전히 제껴졌다. 놀란 후거가 손에 든 액자를 내려두기도 전이었다.

 

“....”

 

액자를 든 채 난처한 얼굴로 서서 인사말도 건네지 못한다. 건화는 물끄러미 후거를 보다 가방을 침대 아래에 대충 던져두고 문을 닫는다. - 문짝이 아예 떨어질 것 마냥 세게 닫는 꼴을 보아하니 화가 난 것 같은데. 괜히 눈치가 보여 조심스레 액자를 책상 위에 내려둔다. 나름대로 신경 쓴다고 썼는데, 액자 속 사진이 흐트러졌다. 지그재그로 튀어나온 두 장의 사진을 본 건화는 성큼 다가와 후거와 찍은 사진을 빼내 옆으로 버려두고 청리와 찍은 사진을 액자에 바로 꽂은 후 세워둔다. 일련의 동작들이 무심하기 그지없다. 후거는 아랫입술을 꾹 물고, 아무렇게나 펼쳐진 그 사진이 꼭 자신처럼 느껴져 숨을 삼켰다. 건화는 한 마디도 뱉지 않고, 후거는 그의 반응에 속상함을 넘어 화가 났다. 후거가 스스로를 이입한 그 사진이 곧 건화의 손에 들려 책상 서랍 속 어둠 속에 가둬졌으니까. 읽지도 않은 쪽지와 쓰다만 노트들이 대충 구겨진 서랍 속 깊숙이. 무거운 벽장 속으로 후거를 밀어 넣고 빛 한 점 못 보게 하는 것 같다. 가슴이 아렸다. 건화가 꼭 저를 거부하는 것 같다. 형이 그러면 안 된다. 그래서 볼멘 말투로 소리쳤다.

 

청리랑은 왜 안 헤어졌어?!”

 

점심시간 때 둘이 붙어서 밥 먹는 거 봤어.

건화는 후거의 말에 흘끗 돌아보더니 액자를 바르게 세워두고 천천히 물러선다. 그제야 눈이 마주쳤다.

 

내가 왜 헤어져야하는데.”

 

생각지도 못한 말에 입이 다물어지지 못한다. 심장이 꽝꽝 때려 박히는 것 같다. 사실 저게 당연한 말인데, 나는 왜 저런 말에 놀라고 상처받게 될까.

 

... 나랑 키스했잖아.”

네가 먼저 한 거잖아.”

그래도, 그래도 형도 같이 한 거잖아.”

남자는 원래 그래. 너도 남자니까 알잖아.”

 

무뚝뚝하게 대꾸한다. 건화는 단 한 번도 후거에게 무뚝뚝하게 군 적이 없었다. 원체 착하고 다정한 성격이었다. 유독 후거에게 잘해주기는 하나, 후거가 아는 건화는 누구에게나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그러니 그의 차가운 반응에 더 목이 말라간다. 따갑게 바스라진 목에선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는다. 할 말을 잃었다. 숨을 쉬는 것 마저 따끔하다.


너도 남자니까 알 거라는 말이, 유독 비수가 되어 꽂히는 것 같다. 건화가 하는 말이 모조리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남자는 원래 그렇다는 말도 싫다. 후거는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는 키스하지 않는다. 후거가 건화에게 먼저 입 맞춘 건 곽건화가 좋아서였다. 그냥 한 번 해보고 싶어서도 아니고, 원래 그래서도 아니고, 건화가 좋으니까. 그러니까 형이 말하는 알잖아.’의 의미도 모른다.

그래도 형이 굳이 남자이야기를 꺼낸 건 알겠어. 네가 남자니까 안 된다는 이야기겠지.

 

그리고 너.. 자꾸... 아니 나는 상관없는데 자꾸 청리 이름 부르면서 반말 하지 마. 너보다 두 살 더 많은 누나잖아.”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뜬금없는 소리에 반문하자 건화는 고개를 돌린다. 아무것도 없는 벽을 쳐다본다. 눈을 몇 번 굴린 그는 다시 후거에게로 고개를 돌렸지만 시선은 후거의 뒤쪽을 향한 채였다. 후거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있는 것도 아마 그의 눈엔 보이지 않겠지.

발로 차버리고 싶어. 밀치고 있는 힘껏 때려주고 싶어. 심심할 때 마다 내가 자기를 , .’ 하고 부르는 건 신경 안 쓰면서, 자기 여자 친구를 이름으로 부르니까 싫다는 거지.,

 

더 할 말 없으니까 집에 가. 늦었어.”

 

벽시계는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늦은 건 사실이지만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는 할 말이 많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할지 모르는 것뿐이지 건화에게 하고 싶은 말은 아직 산더미였다. 무엇보다 건화는 단지 시간이 늦었기 때문에 걱정스러워 가라는 뜻이 아니었다. 그저 피하고 싶고 나갔으면 하는 바람에 하는 말이겠지. 그래서 더욱 더 가기 싫다.

건화가 나가라는 듯 문을 열어보이자, 후거는 그가 열어놓은 문을 바로 쾅- 닫으며 그를 노려본다.

 

나랑 키스한 건 뭐야? 네 여자친구보다 나한테 더 잘해준 건 뭐냐고.”

“.....”

 

건화는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다문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곽건화의 멱살을 잡고, 벽에 밀치고 마구잡이로 때리고 싶었다. 네가 먼저 날 좋아했잖아! 네가 날, 너를 좋아하게 만들었잖아!! 네가 잘해주지 않고 다정하지 않고 네 여자친구보다 날 더 챙기지 않았으면 나도 안 이랬어. 날 게이로 만든 건 너잖아.

입 속에 할 말로 가득 채워져 거북할 정도였다. 이런데 할 말이 없다고?

후거의 두 눈을 피하는 건화의 손을 붙잡았다. 손이 붙잡혔으면서도 건화는 미동도 없다. 곽건화가 원망스러웠다. 예전처럼 끌어안고 후거에게 화내지 말라며 웃어줬으면 한다.

 

, 나 좋아하잖아.”

“....”

나도 형 좋아해....”

 

갈라진 목소리와 함께 터져 나온 고백에 건화는 길게 눈을 감았다 뜬다. 목울대가 울렁였다. 한참을 입술을 다물고 있는 건화의 손을 애타게, 간절하게 쓰다듬는다.

건화는 후거와의 스킨십을 좋아했다. 다른 친구들에겐 먼저 스킨십도 하고 잘 웃어주면서 왜인지 건화 앞에만 서면 무뚝뚝해지는 후거가 가끔 기분이 좋거나 몰래 술을 한잔씩 받아먹곤 건화의 여기저기를 두드렸다. 손도 만지고, 팔도 만지고, 배도 만지려들면 어디 쪼만한 게 술 취해서 주사를 부리냐 잔소리 하긴 해도 입은 웃고 있었다. 손도 내치지 않는다. 지금도 손을 내치진 않지만 건화의 입은 웃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굳게 닫혀있다. 이윽고 그 입술이 벌어졌지만, 그 사이에서 나오는 말은 후거를 절망케 하는 말 뿐이었다.

 

좋아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야.”

 

좋아한다고 다 해결되는 게 아니라고.

 

이제 돌아가.”

 

잡힌 손을 떼어내고 문을 열어 후거를 내보낸다. 그리곤 힘없이 밀려난 후거가 돌아서기도 전에 문을 닫았다. -. 하고 닫힌 문소리에 내 마음도 쿵 닫힌 것 같은데 어쩐지 눈물도 나지 않았다. 형에게 화가 나고 원망스럽고 그가 미웠지만, 동시에 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후거가 무서운 것처럼, 건화도 무서운 것이었다.

 

냉랭한 거실을 지나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몇 걸음 걷다, 더 가지 못하고 자리에 주저앉는다. 웅크려 앉아 숨을 몰아쉰다. 좀 전엔 나지도 않던 눈물이 갑자기 쏟아져 내렸다. 그렇게 웅크려 한참을 숨죽여 울었다. 어깨가 들썩인다. 마른 잔디 위를 헤매던 손을 들어 까슬한 나무 벤치를 세게 쥐고 울음소리를 죽인다. 마디가 하얗게 서릴 정도로 세게 쥐는 손. 연한 손가락 살에 나무가시가 박혀 피가 나는 줄도 모르고 울었다. 그 사이 거실 창문을 가린 커튼이 걷힌다. 동그랗게 만 등이 흔들린다. 이중으로 닫힌 창문의 틈새를 뚫고 후거의 울음소리가 그의 귓가를 찔러대는 것 같다. 건화는 후거의 굽은 등을 보며 눈을 감는다. 주먹을 세게 쥐었다. 손마디가 하얗게 변할 때 까지. 짧은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 들 때 까지.

한참이나 울던 후거는 비틀대며 집으로 돌아갔지만, 건화는 창가에 선 채로 그보다 더 한참 동안이나 움직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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