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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호 썰, 소설 올리는 블로그 @tarack_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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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아예 따로 떨어진 3학년 건물에서 시작된 물음이었다.


“너 섹스해봤어?”


대체 누가 시작했는진 모르겠으나, 섹스 해봤냐는 물음은 순식간에 학교를 뒤덮었다. 곽건화는 그 물음을 2교시를 마친 후 쉬는 시간에 들었다. 점심시간에 제일 먼저 밥 먹고 제일 먼저 달려가서 농구공을 잡을 궁리를 하며 턱을 괸 곽건화는 누가 봐도 여학생들을 몰고 다닐 외모였다. 실제로도 그렇고, 본인도 스스로가 인기 많은 줄 안다. 그렇다고 그 인기를 즐기는 것은 아니었다. 낯 가리는 성격이라 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그네들의 시선에 집중 되는 것도 영 어색하고 불편하다. 건물이 멀리 떨어진 1학년 짜리 여학생에 그에게 예쁜 손수건을 내밀며 고백하도 난처한 얼굴만 한다. 미안. 난...


다시 돌아와서, 건화는 섹스해봤냐는 짝꿍의 물음에 눈만 깜빡였다. 이 반에서 곽건화가 제일 잘생겼다. 실은 3학년에서 제일 잘 생겼다. 실은 졸업한 학생까지 따져 봐도 제일 잘생겼다. 여자만 잘생긴 걸 좋아하는 게 아니다 수컷들의 서열에서도 외모는 빠질 수가 없다. 은근히 반 녀석들의 이목이 건화에게 집중 되었을 때, 건화는 턱을 그대로 괸 채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까딱였다. 내가 왜 대답해야하는데. 시답잖은 대답에 긴장하고 듣고 있던 녀석들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안 해봐서 그렇지?”

“글쎄. 대답 안 해 줄 건데.”

“야. 솔직히 말해봐. 했냐?”

“너희들 나랑 청리가지고 이상한 상상할거지. 죽는다. 그럴 시간에 공부나 해. 공부나.”

“너부터 좀 해라.”


여자친구 이야기에 다들 꼬리를 뺐다. 건화는 거의 화를 내는 법이 없지만 한 번 화를 냈다하면 끝을 본다. 괜히 건드렸다가 무슨 화를 부를지 모르니 아쉽지만 그냥 넘겨야지. 결국 건화에게 이목된 집중은 죄다 제각기 흩어졌는데, 좀 전과 달리 잡생각이 아니라 다른 생각에 잠긴 건화는 눈썹 사이를 좁히며 아랫입술을 물어뜯었다. 섹스이야기에 제일 먼저 후거가 떠올랐다.



그리고 3학년 건물에서 시작 된 물음은 건너건너 후거가 있는 1학년 3반까지 도착했다. 


망친 수학을 가채점한 뒤로 실낱같던 희망도 잠식됐다. 기운이 없다. 이틀 후면 부모님도 오시는데. 공부할 맛이 안 난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쉬는 시간마다 문제집을 꺼내 풀었다. 다음 수학시험은 무조건 다 맞출 거야. 손에 쥔 샤프에 영혼을 담아 문제를 풀면서도 책상 위에 곱게 둔 휴대폰 화면이 켜지지 않을까 이따금씩 확인한다. 오늘은 페페 친구가 문자를 보낼 생각이 없나보다. 집 가는 길에 페페한테 메롱하고 가야지.


“야, 후거. 쟤 섹스해봤대. 완전 뻥같지?”

“어?”


한참 안 풀리는 78번 문제에 입술을 잘근잘근 물어뜯으며 집중하는데 친구가 건드리는 바람에 홀라당 깨버렸다. 코끝은 찡그리면서도 짜증은 내지 않고 되물으니 친구는 다른 친구가 이미 섹스를 해봤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며 열변을 토해내는 와중이다. 결국엔 나보다 찌질해보이는 놈이 나도 못해본 것을 해봤으니 믿지 못한다는 이야기였다. 후거는 별로 관심없다. 걔가 섹스를 해보든 말든.


“야.”

“왜. 야, 나 공부할 거야.”

“너는 안 해봤지?”


계속 헷갈리던 78번의 해답이 아른아른 떠오를 것 같아서 놓은 샤프를 다시 쥐는데 친구는 도통 후거가 공부하는 것을 가만둘 생각이 없는지 집중하려할 때마다 어깨를 쿡쿡 찌른다. 다른 무리에 있던 한놈까지 다가와 양쪽에서 어깨를 찔러대니 도대체 공부를 할 수가!


“야! 저리 안 꺼져?”

“넌 해본 적 없지?”


아니 생각해봤는데 이 자식들이 진짜. 너도 해봤어? 가 아니라 넌 해 본적 없지? 애초에 완전히 배제하며 시작하는 걸 보니 자존심이 구겨지는 듯해 섹스 이야기에 끼이고 싶지 않았으면서도 욱하는 마음에 입을 열었다.


“왜 난 안 해봤을 것 같은데?”

“야. 당연히 네가.... 해봤냐?”


후거의 물음에 눈을 길게 감으며 크게 제스춰를 그리려던 녀석이 멈칫 굳는다. 찢어진 눈 끝으로 헤맨다. 잠깐의 정적이 내려앉고, 반이 드물게 조용해지자 후거는 드디어 원하던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으나 이젠 다른게 머리를 휘젓는 바람에 안 된다. 모모씨. 페페친구. 곽건화.


섹스의 범위가 어디까지를 말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그게 끝-까지가 아니라면 후거도 섹스를 해봤다. 상대는 페페친구이자 모모씨이자 농구와 결혼한 곽건화였다. 한 겨울에도 반팔 입고 농구하는 미친 인간 곽건화. 어쩌면 인간이 아닐지도 몰라. 

어쨌든, 곽건화랑 둘이 있으면 기분이 찌릿해진다. 알고지낸지 오년이 넘어 이제 친숙할 텐데, 고립된 공간에서 아무도 없이 단 둘이 있으면 헛기침이 나온다. 자꾸 거울을 들여다보고 머리를 고치게 되고 구부정한 등도 펴서 바른 자세로 앉아 손을 꼼지락대게 만들었다. 



어제는 둘이서 플레이스테이션을 했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곽건화가 손을 잡았다. 중학교 졸업하고 난 뒤에는 형이랑 손 잡는게 좀 창피해서 못 잡게 하는데 어쩐지 그날따라 곽건화에게 내 손을 하사할 기분이 들어서 그냥 잡게 해줬다. 거의 두어달만에 잡아보는 손이라 좋은 건지, 그래봤자 동네 남동생 손 잡는게 뭐가 그리 기분 좋은지 건화는 잡은 손을 앞뒤로 흔들며 걸었다. 곽건화는 몸에 열이 많나봐. 추운날씨에 곽건화에게 잡힌 손은 주머니에 넣은 손보다 더 뜨겁다. 아 뜨거워. 더워. 


“빨리 집에 가자.”

“왜?”

“집 가서 게임하고 싶어.”

“뭐?”

“플레이스테이션. 저번 달에 새로 산 거!”

“음.. 들어본 거 같긴 한데.”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기억하려 노력하긴 하나 쉽게 떠오르진 않는다. 플레이.. 플레이 뭐.. 뭐라고? 애들이 이야기 하는 거 들어본 것 같긴 한데... 그의 반응에 후거가 혀를 차며 대답했다.


“형은 진짜 대화가 안 돼. 게임. 게임하는 거.”

“야. 그런 걸 할 게 아니라 축구나 농구를 해야지.”

“됐거든요. 잘하는 형이나 해.”


축구, 농구 이야기에 입이 삐죽 튀어나온다. 후거가 발의 보폭을 벌려 앞서나가자 건화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겨우 잡은 손을 놓아야 할 까봐 최대한 속도를 맞춰 걸었다. 몇 마디 했다고 삐진건지 얼굴이 냉랭하다. 토라진 동생의 얼굴이 좋은지 반대로 건화의 뺨은 둥실둥실 하늘로 올랐다.


“내가 가르쳐줄게.”

“싫어.”

“나 때는 다 나가서 놀았는데. 하여간 요즘 애들은..”

“웃기시네. 형이랑 나랑 두 살 차이나거든?”


운동엔 영 재주가 없어서 어릴 적부터 이것저것 배우긴 다 배웠으나 하나같이 중간도 못 간다. 구기종목에 대한 열망이 있어도 너무 못하니 친구들이 끼워주질 않아서 축구 농구 이야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삐졌는데, 곽건화의 되도 않는 말에 헛웃음이 나온다. 투닥투닥 대면서도 결국 둘이서 달라붙어 느긋한 발걸음으로 돌아와 인도 위를 걸었다. 오늘따라 골목길을 걷는 사람도 없다. 곽건화와 하교하는 날마다 가끔, 아주 가끔씩은, 좁게 뻗어있는 이 골목길이 끝없이 이어지길 바랬다. 집이 더 멀어지길 바라기도 하고.


아직 부모님은 돌아오지 않으셨다. 처음에는 정말로 플레이스테이션을 했는데, 형이 게임을 너무 못해서 하는 내내 이기다보니 재미가 없다. 곽건화 게임 못하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곽건화한테 이겼다고 기쁠 것도 없다. 형한테 지면 진짜 게임 못하는 거라고. 한 여섯판 정도 줄줄이 이기고 나니까 심드렁해져서 형을 밀어내고 소파 위로 길게 엎드렸다. 엉덩방아를 찧은 형은 아프지도 않은지 아무 대꾸 없이 바닥에 앉더니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본다. 문자에 답장이라도 하는지, 키패드를 누르는 손을 유심히 쳐다본다. 아쉽게도 여기서 화면은 보이지 않는다. 안경이라도 쓰고 있을 걸. 문자화면 같은데, 글자가 안 보이네. 그렇다고 가까이 들여다보기엔 자존심도 양심도 허락지 않아 뚱하게 소파 쿠션 위에 턱을 괸다. 신경질나네.


거실에는 소리 한 점 없다. 엄마가 시계소리에 예민해서 집안의 시계란 시계는 몽땅 치워놨다가, 후거가 용돈을 모아 두 분의 리마인드웨딩 기념 선물로 무소음 시계를 사드렸다. 엉뚱하기 그지없는 선물이었지만 엄마는 꽤 마음에 들어 했고 후거도 마음에 들었는데, 이제 와서 조금 후회스러웠다. 거실에 아무 소리가 안 나니까 어색하다. 휴대폰에 집중한 곽건화도 입을 꾹 다물고, 조용히 키패드만 누른다.


엎드린 몸이 불편해 꿈지럭대며 자세를 바꿨다. 동시에 건화도 손에서 휴대폰을 내린다. 차가운 바닥에 손바닥을 붙이고 몸을 기대더니, 후거와 눈을 마주치곤 가만히 얼굴을 들여다본다. 뭘 봐. 무뚝뚝한 목소리를 내어 묻자, 건화는 미간만 좁힌다. 그래봤자 하나도 안 무서워. 무서워하라고 한 것도 아닌데. 


손에 쥔 휴대폰을 바닥에 대충 두고, 건화는 눈을 돌리는 후거의 얼굴에 밀착했다. 젖살이 빠지지 않은 뺨 위에 약하게 입술을 문대다 도톰한 아랫입술을 이로 깨물었다. 감긴 눈이 바르르 떨린다. 후거도 손을 뻗어 티셔츠 위로 건화의 두드러진 척추선을 훑어내렸다. 초침소리 하나 없는 거실이 숨이 막힌다. 아니, 어쩌면 적막이 후거를 짓누르는 게 아니라, 이 곳에 남은 아빠와 엄마의 체취와 흔적이 후거를 무겁게 만들고 있는 지도 모른다. 죄악감. 두려움. 


섹스의 범위를 넓힌다면, 후거와 건화가 한 것도 섹스일 수 있다. 그러나 그에 가까운 행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둘은 친구였다. 형 동생일 뿐이다. 건화는 가끔 생각 날 때 마다 찾아와 후거를 챙겼다. 감기에 걸린 후거를 위해 담요도 덮어주고, 데려다주기도 하고, 이따금씩 갑작스런 비가 내릴 때 마다 후거에게 제 우산을 주고 가기도 한다. 여자친구에게도 안 할 지극정성이었다. 실제로 그렇기도 하고. 건화가 여자친구를 제쳐두고 후거에게 와서 이마에 손을 올려 열을 재고 있을 때면, 후거는 소리 내어 그에게 묻고 싶었다. 

넌 나한테 왜 이렇게 잘해줘?

너랑 나는 뭐야?

하지만 그 말을 꺼내는 순간, 이 말도 안 되는 이상한 관계가 깨질 것을 알기 때문에 내색하지 않는다. 내내 의문을 품고 있으면서도 당연한 듯이 받았다.



***



암묵적으로 참고 있는 게 터진 것은, 그날이 있고서 열흘이 지난 날 저녁이었다. 일요일이라 하루 종일 침대 위에서 게임기를 붙잡고 뒹굴던 후거는 갑자기 건화의 야구모자가 떠올랐다. 허구헌 날 농구랑 축구만 하던 인간이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 야구를 하겠다며 나서더니 며칠 만에 자긴 농구 밖에 없다며 그 열정이 식어 다시 농구에 전념했다. 그 때가 한 달 전이었는데, 줘야지. 줘야지. 생각만 하고 가져다준다는 걸 깜빡했다. 건화가 집에 놀러온 날 줘도 되는데, 꼭 가고 나면 생각나더라. 월요일에 학교에서 줘도 되겠지만 갑자기 곽건화의 얼굴이 보고 싶어져서 나갈 채비를 하고 야구모자를 챙겼다. 건화네 집은 걸어서 오분 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막상 집 밖으로 나오자 연락을 하고 가야하나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어차피 코앞인데 뭐. 무작정 걸었다. 이어폰을 꽂고 노래 한 소절이 끝나고 다음 곡이 절반 정도 재생됐을 때 쯤 건화의 집이 보인다.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 후거가 건화와 처음만난 곳도 저 마당이었다. 잔디에 물을 주고 있던 곽건화가 지나가는 요크셔테리어에 눈이 팔려서 손에 쥔 호스에 힘을 줬다. 덕분에 학원가는 길이던 후거가 흠뻑 젖었지. 


그 마당 앞에 선 두 사람도 보였다. 형인가? 싶어 좀 더 걸어보니, 곽건화가 맞다. 다른 한 명은 여자였다. 곽건화의 여자친구. 청리.


청리를 확인하자마자 걸음이 멈춘다. 후거는 우뚝 서서 두 사람을 구경했다. 왠지 그러고 싶었다. 야구모자를 든 채로 둘을 물끄러미 보고 있자,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이 가까워진다. 청리가 건화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더니, 장난스레 웃다 그에게 짧게 뽀뽀하는 게 보였고, 그에 후거가 놀라 흠칫 굳으며 입을 벌린다. 더 놀란 건 다음이었다. 곽건화가 청리의 허리를 감고 입술에 키스했다. 원치 않게 그걸 보고 있자니, 그 날. 몸이 아팠던 날 침대 위에서 한 키스가 떠올랐다. 


몸이 달달 떨리고 이미 열이 오른 몸이 더 화끈해질 정도였다. 앞이 바짝 서서 몸을 비틀고 있자 건화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세면대 수도꼭지를 돌려 물을 콸콸 틀어놓아서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가끔 억눌린 신음이 흘러들었다. 지친기색으로 누운 후거는, 닫힌 문 사이로 약하게 빠져나오는 형광등의 빛을 보며, 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갈까 고민했다. 들어가서 형 앞에 옷 벗고 자위라도 하면 덮치지 않을까. 하지만 생각으로만 그칠 뿐, 실행하진 않았다. 용기가 없었으니까. 내쳐질 용기.


그날 둘이서 했던 진득한 키스보다 훨씬 짧고 담백한 키스였지만, 오히려 그게 더 연애하는 현실의 고등학생 커플 같아 보여 속상한 마음에 입술을 씰룩이며 손에 든 야구모자를 머리에 깊게 눌러썼다. 건화와 청리는 곧 손을 잡고 후거의 반대편 길로 나란히 걸었다. 후거는 그 들이 조금 멀어졌을 때 쯤, 건화의 집으로 향해 마당에 자리 잡은 나무 벤치 위에 앉았다. 할머니가 조경하는 걸 좋아하셔서 넓지 않고 소담한 마당에는 온갖 화분들과 작은 나무들이 즐비했다. 작년에 돌아가셨는데... 운동 외엔 별 관심도 없는 곽건화가 할머니가 키우시던 화분만은 신경써서 키운다. 비 오는 날에는 안에 있는 화분도 밖으로 빼오고, 추운 날씨엔 화분들을 집 안으로 들여보내고, 신경써서 물 주고, 영양제도 놓고. 


꽤 오래 된 나무 벤치는 이제 꽤 거칠고 코팅이 벗겨져 손가락 끝에 거칠게 긁히는 게 느껴진다. 곽건화. 바니쉬 사서 벤치에 발라야한다고 몇 번을 말 했는데 말을 안 들어. 한숨을 푹 내쉬며 어깨를 움츠렸다. 곽건화가 청리를 데려다주려 간 게 뻔했기 때문에 형이 올 때 까지 기다릴 심산이었다. 여자친구니까 데려다 주는 게 당연한데. 일주일에 한 두 번씩 저를 데려다주는 걸 떠올리자 또 괜히 심통이 났다. 화가 나야하는 건 후거가 아니라 오히려 여자친구인 청리 쪽인 걸 알면서도 그랬다. 건화가 저를 잘 챙겨주니, 후거는 곽건화에게서 무엇보다 최우선이, 자실이길 바랬다. 아니 사실은..

앉아서 기다린지 오래가지 않아 발자국 소리가 코앞에서 들린다. “어?” 인도를 내려다보고 걷던 건화는 마당 벤치에 앉아있는 후거를 보고 반색하더니 보폭을 넓게 걸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후거? 언제 왔어? 어, 아... 이거 내모자네. 이거 주려고 온 거야?”


후거가 머리에 눌러 쓴 모자를 잡았다. 벗기려고 하는 손을 쳐낸 후거는 반쯤 벗겨진 모자를 더욱 더 깊게 눌러 쓰며, 고개도 아래로 내렸다. 웅크린 몸을 보니 걱정이 되어 벤치 앞에 다리를 굽히고 앉아 후거의 무릎을 짚었다. 대답이 없다. 후거. 후거? 후거? 그가 세 번 쯤 후거의 이름을 불렀을 때, 후거가 입을 열었다.


“네 여자친구랑 키스하는 거 봤어.”

“....”


건화가 돌아올 때 까지, 고민을 많이 했다. 말하지 말아야하는데. 알면서도 화가 났다. 말하면 이 관계마저 깨지는 걸 알지만 그래도 말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친구도 아니고, 그렇다고 애인도 될 수 없는 이 어정쩡한 관계. 친구라고 불리기는 싫은데 애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해서도 안 된다.


“헤어져.”


모든 걸 알고 있으면서도, 후거는 억지를 부린다. 단도직입적으로 튀어나온 말에 건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초조해져서 내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마주했다. 건화의 눈을 보자 후거는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아 파르르 눈 끝을 접으며 목울대를 일렁인다. 다만 그런 일련의 과정에도 불구하고 눈동자가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속상해서. 


“청리랑 키스한 거랑, 나랑 한 거 중에.. 뭐가 더 좋았어?”


울음소리를 겨우겨우 견뎌내고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이은 말은 유치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거 말고는 청리와 비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다른 모든 걸 비교해도, 하나만 대면 게임이 끝나니까. 청리는 여자고, 후거는 남자였다. 도저히 청리를 이길 수가 없다. 더 슬픈 것은, 내가 청리에게 이기려들려고 해도 안 된다는 현실이었다.


“대답해. 누구랑 한 게 더 좋았어?”


그래도 곽건화에게 대답을 듣고 싶은데, 답하지 않고 묵묵히 있으니 속이 타들어간다. 약해보이고 싶지도 않아 절대 울지 않으려 했으나 속상함과 패배감, 민망함과 무력감이 동시에 잠식해 목소리가 불안정한 리듬을 타고 흘러나왔다. 흐, 으으.. 결국 후거가 울음소리를 내자, 한참을 입을 닫고 있던 건화가 당황해 후거의 양 팔을 잡았다. 후거, 후거 난...


“대답, 해..”

“....”


건화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당연히 가볍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한참이나 말을 하지 않자, 결국 아슬아슬하게 고여 있던 눈물이 후거의 뺨을 타고 주루룩 흐른다. 후거의 울음에 놀라고 애가 탄 건화는 한참이나 입만 벙긋벙긋 하다, 겨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랑 하는 게, 더.. 좋아.” 그에게서 결국 원하는 대답을 얻은 후거는, 건화의 뺨을 붙잡아 당기고 그 때처럼 입술을 겹쳤다. 윗입술을 물고 문지른다. 건화는 몸을 굳히며 있다가도, 후거의 등을 쓸어내리며 진정시켰다. 그저 입만 부비던 후거가 눈물을 그치고 숨결이 안정될 때 쯤, 건화는 후거를 품에 안고 머리를 부드럽게 감쌌다. 후거는 그의 품 안에서 다시 강요하듯 중얼거린다. “청리랑 헤어져.” 대답이 없었다. 후거는 그에게 널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애써 참아냈다. 건화가 헤어지겠다고 대답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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