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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호 썰, 소설 올리는 블로그 @tarack_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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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형. 토요일에 우리 집에 놀러와.”


3학년 건물에 가면 사람들이 죄다 쳐다봐서 오기 싫다던 후거가 어인일로 오늘은 건화의 반까지 행차하셨다. 후거 왔다는 소리에 체육복을 갈아입다말고 한 팔은 꿴 채로, 한 팔은 옷 밖으로 나와 있는 기이한 모습으로 부리나케 달려온 건화는 후거를 보자마자 잔소리를 얻어먹었다. 그리고 얌전히 제대로 옷을 입고난 후에야 삐친 표정을 풀어낸 후거가 그에게 “라면 먹으러 올래?” 같은 소리를 뱉었고, 평소라면 당연히 웃으며 그러겠다고 대답했을 건화가 큰 눈을 굴리며 눈치를 본다. 말간 얼굴을 하던 후거는 다시 삐죽댄다. 곽건화의 답변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나 그날 애들이랑 농구하기로 했는데.”


그럴 줄 알았지. 곽건화 인생 1순위 농구. 2순위 페페... 


“몇 시부터?”

“10시...”

“몇 시까지?”

“4시...”


곽건화가 농구한다고 후거의 초대를 거절 할 거라는 것 까진 예상은 했지만 어떻게 된 게 아침부터 오후까지 농구를 한다는 건지. 그 정도면 농구가 1순위인 수준이 아니라 농구에 미친 수준 아냐? 농구에 미친 인간이 곽건화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라니... 하..

복도 벽에 등을 기대다 입술을 빼쪽댄다. 건화는 뒷머리를 쓸며 어색하게 웃었다.


“전생에 농구랑 뭐 했어? 그 때 까지 농구한다고? 겨울이라 해 금방 지는데. 알았어. 농구하다 얼어 죽으시던지요.”


누가 봐도 삐진 모습이었다. 아무 죄도 없는 벽을 툭 치곤 해명하려는 건화를 무시하고 뒤돌아 3학년 건물을 빠져나간다. 오늘은 전화도 안 받을 테고 문자 답장도 안 해주겠지? 창문에 달라붙어 운동장을 건너는 후거의 뒷모습을 보며 눈 끝을 구긴다. 어떡하냐... 혼자 중얼거리며 창틀을 꽉 쥔다. 후거를 보느라 창문에 간절히 매달린 건화더러 친구들이 한둘씩 지나가며 여자애도 아니고 멀대 같이 큰 남자애가 뭐가 그리 귀여워서 그리 안달복달이냐며 뒤통수를 한 대씩 때리고 가는데, 머리를 맞은 것 보다 후거가 ‘뭐가 귀엽냐고’ 하는 게 더 짜증났다. 하여튼 미의식이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멍청한 것들. 물론 그렇다고 저 녀석들이 후거가 귀엽다고 한다면 그건 훨씬 더 짜증이 날 것 같긴 한데.. 모르겠다. 건화는 찡그린 표정을 풀며 1학년 건물이 있는 곳으로 눈을 둔다. 후거는 이제 새끼손톱보다 더 작아서 잘 보이지 않는다. 다른 교복무리들과 섞여서 남들이 봐서는 후거를 찾지도 못하겠지만 건화의 눈에서는 다르다. 어디에 있어도 찾을 수가 있었다. 건화는 아주 작게, 거의 보이지도 않는 후거의 정수리를 보며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하마터먼 늦잠 잘 뻔 했다. 눈을 뜨니 7시 40분. 간신히 20분 만에 씻고 스킨, 크림 대충 찍어 바르고 옷 갈아입고 책까지 챙겼다. 밥 먹을 정신도 없다. 후다닥 휴대폰을 들고 부모님께 인사하곤 빠르게 집을 나와 걷는다. 빠른 걸음이었다. 정신이 없다. 학교까지 걸어서 15분인데 우리 반은 15분까지 등교란 말이야. 지금.. 8시 4분.. 아, 좀 아슬아슬 할 것 같은데... 그 정신이 없는 와중에 전화가 온다. 곽건화. 하여튼 이 인간은 눈치가 없어, 눈치가. 속으로 혀를 차고, 발걸음은 점점 빨라져 정강이가 당겨오는데도 통화버튼은 누른다. 급하다면서도, 지각할 위기에도.


“뭐야? 왜 전화했어?”

- 토요일에 뭐 먹고 싶어? 뭐 사서 갈까.

“뭐래. 농구한다며.”


골목길을 나와 꺾어 지르는 지점에서 잠깐 발이 멈칫한다. 도도하게 담장 위를 걷는 길고양이님 때문이었다. 1분 1초가 아까운 시점에서, 귀는 건화의 목소리에 집중하고 눈은 새까만 털의 윤기를 뽐내는 고양이에 못박혔다. 


- 너랑 놀려고 취소했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농구를 두고.”


‘안녕.’ 휴대폰을 살짝 떼고 작게 인사하자 고양이가 누가 말을 건지 확인하려는 듯 고개를 돌린다. 멀어진 휴대폰은 다시 귓가에 닿았다. “-...려고 취소했어.” 건화의 목소리에 심술 난 눈썹이 아래로 내려진다.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농구를 두고..” 고양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고양이는 기지개를 펴는 듯 털을 세우고 기다란 뒷다리를 쭉- 펴며 부르르 떨었다. 고양이에게 닿은 두 눈이 가늘게 휜다. 젖살이 통통하게 오른 두 뺨도 동그랗게 솟아올랐다. “-...좋으니까.” 


- 너랑 있는 게 더 좋으니까.


지각을 앞두고 있지만 기분이 상쾌해졌다. 까만 고양이에게 손을 흔들어 작별인사를 하고, 알겠다고 퉁명스러운 말투로 대꾸하곤 끊은 휴대폰은 소중하게 주머니에 넣는다. 시간은 촉박한데 마음은 풍경소리를 배경으로 들꽃이 곱게 피어난 한적한 골목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



청승맞게 우울한 노래를 들으며 울거나 하지는 않는다. 다만 후거는 책상 앞에 앉아 하루에 두어시간씩 멍하니 넋을 놓았다. 날이 더 추워지니 그것도 할 게 못됐다. 


건화와 집이 가깝다는 것, 학교가 같다는 것은 이제는 더 이상 축복이 아니다. 고역일 뿐이다. 학교에서 이따금씩 건화와 마주치게 되면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귓가에 커다란 바위가 쏟아지듯 쿵쿵 거렸다. 어색한 몸짓으로 모른 척 지나가는 후거에게 더 이상 친구들이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때 쯤. 후거는 저가 어느 정도 마음을 정리했다고 믿었다.


영어 공부 대신 책장을 정리하다 형의 사진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건화가 대입시험 원서에 낼 증명사진을 새로 찍었다며 하나 주겠다고 건네는 걸 여자애들도 아니고 이걸 왜 받냐고 난리를 쳤지만 결국엔 받았다. 그리고 받은 지 한 시간 만에 잃어버려 형이 엄청 삐졌었지.


“아씨..”


먼지 범벅이 된 증명사진을 문질렀다. 사진이 아주 조금 바래긴 했으나 그리 문제가 될 만하지 않아보였다. 후거는 신경질 적으로 사진을 책상의 맨 아랫칸 서랍에 넣어놓고 쪼그려 앉는다. 그러나 오초도 안 되어 다시 사진을 끄집어냈다. 손바닥 위에 증명사진을 올려놓고 몽롱한 눈으로 쳐다본다. 잘생기긴 했네. 잊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형과 그렇게 멀어지고 난지 이제 고작 이주였다. 이십년 같은 이주. 



***


게이가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건화나 후거처럼, 철썩 같이 본인이 이성애자라고 믿고 있었던 사람의 경우에는 더욱 더.


여자 친구를 사귄 적도 있었고, 키스라고 하기엔 앳된 입맞춤도 해봤다. 부끄럽고 민망했지만 그 경험이 끔찍하다거나 싫다고 느끼진 않았다. 그 모든 행동이 후거에겐 당연한 것이었다. 남자니까 여자랑 사귀고. 데이트하고. 여자를 좋아해야하고. 평범한 것들.


그러나 건화는 다르다. 그는 후거가 알고 지내는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었고, 작은 것들 하나하나가 특별했다. 여자친구와 있을 때 보다 건화와 의미 없는 장난질을 할 때가 더 즐거웠고, 데이트보다 형과 시시껄렁한 대화를 하는 것이 더 행복하다. 키스는... 키스는 비교할 수 조차 없었다. 나쁘진 않았지만 설레임이나 숨이 막힐 것 같은 감각은 없었다. 그러나 건화와는, 가끔씩, 그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떨린다. 언제나 닿는 그 눈이 나를 이상하게 만들었다. 신경 쓰게 되고, 괜히 마른 목을 축이게 되고. 끝내 건화와 입을 맞췄을 때 후거는, 꼭 바닥이 땅으로 한 없이 꺼질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손끝의 전율에 눈을 깜빡였다. 


형의 숨소리. 머리카락. 굳은살이 잔뜩 베긴 엄지손가락. 그 조그마한 모든 것들을 잊을 수 없다.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약하게 빠져나오는 욕실의 빛. 닫힌 문. 시끄러운 물줄기. 그 와중에 들리는 건화의 신음소리.


잊을 수 있을 리가. 


건화를 좋아하지만 그 이전에 친구였다. 친구이자 형. 좋아하는 사람에게 거절당한 비참함과 함께 내겐 수족과 같았던 사람이 잘려나간 불안감에 자다가도 깨서 끙끙 앓을 정도였다. 이대로 죽어버리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저 생각뿐이다. 커밍아웃 할 용기도 없는 주제에 죽기는 뭘 죽어. 택도 없는 소리였다. 그냥 후거는 힘들 뿐이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해서. 기댈 곳이 아무도 없어서. 부모님 보호아래 살고 있으면서도 혼자 남은 기분이다. 최소한 형과 있으면, 그런 기분은 들지 않았는데.


전에 찾았던 게이 커뮤니티 사이트의 글들을 읽어보면 기분은 더 울적해진다. 한 사이트에도 분위기는 극과 극이었다. 온통 섹스에 관한 이야기들. 아니면 아웃팅을 당할까봐 걱정하는 글. 삶에 지친 글. 끝없는 한탄과 다른 이들에 대한 질투. 생각이 더 복잡해진다. 후거는 남자를 좋아한다. 저와 같은 몸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벗은 남자의 몸을 보면 목 뒤가 화끈해졌다. 나는 게이야. 하지만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그들에게서 공감을 느끼고 싶지 않다. 나는 어디에 있는 거지. 어디에 소속이 되어있는 거지.


스스로 게이임을 인정한 순간부터 모든 것이 무섭고, 외따로 떨어져 있다고 느껴진다. 집에 있으면서도 편하지 않았다. 닫힌 문 밖에서 일어나는 작은 소리 하나에도 화들짝 놀라며 결국은 나무문을 걸어 잠근다. 이집의 주인은 부모님이니 원하시면 얼마든지 열 수 있지만, 그래서 그 잠금장치로도 완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지만 그래도 문을 잠그면 유리 바닥 위에 올라선 기분보단 나았다. 

거실에서 아빠가 엄마와 대화하는 소리가 옅게 들린다. 코미디 프로라도 보고 계시는지 가끔씩 웃음소리가 들렸지만 후거는 나가고 싶지 않다. 부모님의 얼굴을 보는 것이 힘들었다. 울음이 나올 것 같다.



***



아무 생각 없이 주스를 마셨는데 하필이면 복숭아가 들어간 주스였다. 이런 미친. 전생에 복숭아랑 원수라도 졌나. 복숭아씨를 말리는 작전이라도 펼친 건가. 


급하게 등교하느라 아침을 거르고 편의점에 들러 팩주스를 하나 샀는데, 분명 그림에는 복숭아가 없어서 괜찮을 줄 알고 마셨는데 그게 아니었다. 원래 고작 요만한 팩주스에 들어간 손톱만한 복숭아 과즙으로 반응은 안 오는데 요즘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그런지..


차라리 등교하다가 사단이 났으면 다시 집으로 돌아갔을 텐데. 사 놓고 깜빡해서 2교시 쉬는 시간에 마셨더니 3교시에 혀와 목이 부어서 눈앞이 어질했다. 옆에 앉은 녀석의 도움을 받아 양호실에 누워 선생님이 주신 알레르기 약을 넘기는데에도 한참이 걸렸다. 아파서 침을 삼키는 것도 괴로운데 물을 몇 번이나 넘겨야하니 이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약을 먹은 후 뻣뻣한 이불을 덮고 억지로 잠을 청했다. 하지만 집에서도 제대로 자지 못하는데 학교에서라고 숙면이 될까. 반 정도 정신이 깨어있는 상태로 30분여간 침대 위에 누워있다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눈을 뜬다. 머리가 아프다. 어지럽고 열도 올랐다. 고작 복숭아 들어간 주스 조금 먹고 몸 상태가 최악이라 눈물까지 핑 돌았다. 후거는 최근 몇 달 들어 자꾸만 울어재끼는 자신이 짜증났다. 정말로 게이가 된 것 같다. 몇 년 뒤에는 여자 옷을 입고 그들을 우스꽝스럽게 흉내 내고 따라하게 될까봐 겁도 났다. 더 짜증이 나는 건 곽건화가 옆에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후거가 복숭아에 괴롭힘 당할 때 마다 건화가 옆에서 돌봐줬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챙겨주었다. 

상실감과 아픔, 그리고 배출되지 못한 울분에 씩씩대며 눈물을 훔치자 책을 넘기던 양호선생님이 놀라 후거를 집으로 보냈다. 집에 가는 길에 병원에 들르라는 말에 그러겠다고 대꾸했으나 그냥 집으로 갔다. 방에 들어가서 문을 걸어 잠그고 침대에 누워 푹 쉬고 싶었다. 그러나 현관문을 열자마자 그런 생각은 쏙 들어간다. 엄마가 오늘따라 일찍 퇴근을 한 건지 집안에 불이 켜있었다. 팔뚝이 차가운 냉기가 서리는 것 같다.


“후거 너 왜 이 시간에 집에 와?”

“엄마는?”

“엄마는 오늘 일 빨리 끝나서 왔지. 근데 너 어디 아파? 울었어?”


벅벅 문질러져 붉어진 눈가를 확인한 엄마가 가까이 다가온다. 이제 후거는 엄마보다 키가 훨씬 컸다. 사실 엄마의 키를 넘어선지 3년이 넘었다. 그래도 아직은 어리광 부리고 싶은 나이였다. 엄마를 끌어안고 엄살을 부리고 싶었으나, 요근래 엄마가 불편했다.


“복숭아 들어간 주스 먹어서 그래. 엄마, 나 좀 잘게.”

“병원 안 가 봐도 돼? 얼마나 심한데?”

“별로 안 심해. 약 먹고 나니까 목 부은 건 좀 나은 것 같아. 나 그냥 잘래.. 열나는 것 같아.”


걱정하는 엄마의 시선을 외면하고 방으로 들어간다. 후거. 엄마가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후거는 억지로 무시했다. 가슴이 아팠다. 문에 등을 기대고는 익숙하게 잠금장치를 잡아 돌린다. 드르륵 돌아가는 쇳소리를 엄마가 듣지 못했기를. 오해하지 않기를.


느린 몸짓으로 교복을 갈아입고 침대 위에 걸터앉는다. 난방기를 틀어 따뜻한 바람이 나오긴 하나 여전히 싸늘하다. 이불 속에 손을 밀어 넣어 봐도 그랬다. 그 상태로 한참을 생각에 잠긴다. 많은 생각이 들었다. 공통점은 하나같이 죄다 후거를 괴롭히는 것들뿐이었다. 잘 되고 있는 건 쥐뿔도 없다. 앞날이 막막하고 바로 내일이, 오늘 밤이, 십분 뒤가 걱정이었다. 그 끝도 없이 많은 근심 속에서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할지 모르겠다. 아무것도 제대로 되는 게 없고 가진 것도 하나 없다. 형마저 잃어버렸다. 왜? 내가 게이라서? 형도 게이인데. 형도 날 좋아하는데.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것들을 잃게 될까. 형을 잃은 건 단지 시작일 뿐이겠지. 남은 일생동안 얼마나 포기하고, 얼마나 울고, 얼마나 외로워해야 하는 걸까. 


손끝에 힘이 빠져 떨리는 것 같아 두 손을 마주 잡고 고개를 숙였다. 문득 건화도 저처럼 똑같은 걱정을 하고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잃을 것을 두려워하고 꽉 막힌 미래에 숨이 조여 오는 것 같은 고통을 겪고 있을까. 


건화는 늘 후거보다 형이었고, 후거가 기댈 수 있는 곳이었다. 둘 다 같은 위기에 처해있어도 건화는 걱정하지 않을 줄 알았다.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지...


후거를 거절하던 차가운 목소리. 초점이 없는 흐릿한 눈동자. 형이 원망스러웠지만 그 딱딱하게 굳은 말투에서 형의 괴로움을 느꼈다. 그가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도. 후거와 똑같이. 보이지 않는 압박 속에서 견디기 힘들어하는 것을. 천천히 눈을 감은 후거는 이불 속으로 들어가 베개를 끌어안고 그 속으로 얼굴을 파묻는다.


“형..”


감은 눈이 뻑뻑했다. 마음도, 머리도 복잡하기만 해서 피곤한 몸에도 불구하고 잠은 털끝만큼도 오지 않았다. 몸에 열은 더 오르고 정신은 어찔한데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먼지처럼 사라지고 싶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점점 더 우울 속으로 파고들 때, 똑똑-하는 노크소리가 들려 번뜩 고개를 든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후거가 상체를 들어 빠르게 몸을 일으킬 쯤 문고리가 돌려져 덜걱덜걱 소리를 내며 흔들린다. 얼른 침대에서 일어나 바닥에 발을 딛고 선다. “잠갔어?” 엄마의 목소리에 황급히 문 앞으로 달려가 덜걱거리는 문고리의 잠금을 풀어냈다. 한걸음 뒤로 물러서자 놀란 엄마의 얼굴이 드러났다. 후거는 그보다 더 놀랐다. 어지러워서 제대로 설 수도 없어 비틀대며 침대로 걸어가 앉는다.


“문은 왜 잠가놨어?”

“몰라 어쩌다가 잠겨졌나봐.”

“하긴 좀 잘 잠기긴 하더라. 잔다더니.”

“그냥..”

“너 오늘 진짜 이상한데.”


침대에 힘없이 앉아 어깨만 으쓱인다. 애가 어쩐지 평소보다 더 우울해보였다. 설마 저번 주에 나온 성적 때문에 그러는 걸까. 걱정에 아들 앞에 다가가 뺨을 만졌다. 멍하게 가라앉은 두 눈은 양 뺨에 엄마의 손이 닿자 순식간에 물기에 젖었다. 참으려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후거?” 갑자기 울기 시작하는 후거에 놀라 뺨에 닿은 손이 떨어졌고, 후거는 그대로 엄마를 끌어안아 당기며 울었다.


“엄마 미안해...”


왜 갑자기 엄마의 주름살이 이렇게 보이는 걸까. 엄마의 손이 곽건화의 손처럼 까칠하다는 것고, 엄마가 입은 티셔츠가 십년쯤은 된 것 같은 것도 다 속상하다. 미안하다며 우는 후거에게 대체 뭐가 미안한 거냐며 학교에서 애들이 괴롭힌거냐 묻었지만 후거는 그저 고개를 내젓고 대답하지 않았다. 모든 게 미안했다. 엄마의 자랑스런 아들이 되어주지 못할 것 같아서. 이 상황에서도 좋아하는 남자랑 헤어지는 게 슬픈 내가 한심해서.


“성적 때문에 그래?”

“...”

“괜찮아. 그렇게 안 좋게 나온 것도 아니잖아. 엄마도 아빠도 아무소리 안 했는데 네가 지레 겁 먹고 이러면 어떡해. 괜찮아. 성적 한 번 떨어졌다고 세상 떠나가라 우는 놈이 어디 있어. 괜찮다니까. 울지 말고. 추우니까 일찍 자고 푹 쉬자. 내일도 아프면 학교 하루 쉬고. 응?”


후거를 달래는 목소리에 눈물이 멎기는커녕 제어가 안 될 정도로 흘렀다. 혀를 차는 엄마. 티슈를 한 움큼 뽑아 닦아주고는 이불을 목 아래까지 바짝 당겨 올리고 후거의 뺨을 쓸었다.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벌리다가도 도로 다문 엄마가 한 번 더 푹 자라고 말한 후에 방을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향했다.


엄마의 품에 안겨 울고 나니, 형도 이런 고통을 겪고 있을 거란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아마 형은 나보다 더 힘들겠지. 혼자니까... 그리고 형에게 이 무거운 짐을 다 들게 하려 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만약 그 날. 내가 형에게 여자친구랑 헤어지라고. 내가 좋지 않으냐고 떼쓰는 게 아니라 진지한 대화를 나눴다면 어떻게 됐을까. 지금보다는 더 나았을까.


책상 서랍과 온 책장을 뒤져도 편지지 같은 것은 나오지 않았다. 나올 턱이 없었다. 간신히 찾은 A4용지 맨 위에 펜촉을 내린다. 후거는 천천히 편지를 써내려갔다. 목구멍이 답답해지고 손에 땀이 날 정도로. 차마 부모님의 얼굴을 마주보고 이야기 할 자신은 없었다. 커밍아웃을 굳이 할 필요는 없지만, 충동에 가까운 행위이지만 후거는 그냥 짊어지고 싶다. 형의 몫까지.


그리고 어차피 언젠가는 말해야 할 텐데, 겨우 용기가 난 지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렵게 쓴 편지를 몰래 엄마의 화장대에 두고 집을 나섰다. 엄마는 장을 보러 간 건지 집안에 없다. 마지막으로 엄마의 얼굴을 보고 싶었는데. 아쉽긴 했지만 다시금 맘을 다잡는다. 뒤로 맨 가방은 옷들과 생필품으로 빵빵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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