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차여차
곽호 썰, 소설 올리는 블로그 @tarack_69
비밀번호와 기타 공지 확인은 아래의 두번째 아이콘이에요.




연 재 완 결 단 편 기 타 방명록



   여차여차
곽호 썰, 소설 올리는 블로그 @tarack_69
비밀번호와 공지 확인은 아래의 두번째 아이콘입니다.









11.


목을 한껏 꺾어 불편한 자세로 자보겠다고 욕심 부리다 목 나갈 뻔 했다. 고작 십 분간 그러고 있었다고 목이 이렇게 아파도 되나. 후거는 한쪽으로 기울어진 목을 억지로 이리저리 움직이며 주무른다. 목 빠질 것 같아. 근육이 늘어난 거 아닐까. 허리도 힘주고 있느라 반대편이 얼얼하다. 몸 상태가 너무 별로야.


짧은 낮잠을 자고 일어난 후거가 온 몸의 근육통에 대해 호소하는 사이 밖에 나가 딸기를 사온 건화는 소파아래 앉아 깨끗이 씻어온 딸기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어찌나 깨끗이 씻는지 딸기 한 알 한 알 찬물에 손이 얼 때 까지 세심하게 씻었다. “목 아파.” 자기가 어깨에 기댔으면서 내내 목 아프다고 징징대는 후거에게 조심스레 꼭지를 딴 딸기를 하나 내밀자 후거는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입에 넣는다. 아직도 곽건화는 눈치보고 머뭇대고 있다. 하긴. 말 한마디로 훅훅 바뀌는 게 사람이면 인간관계로 힘들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딸기는 왜 갑자기 사왔어?”

“갑자기 먹고 싶어서.”

“딸기 겨울에 비싸잖아.”

“그래도 먹고 싶은 건 먹어야지.”


딱히 싫다는 건 아니지만. 할 말이 없으니 아무 말이라도 해야 한다. 새빨갛게 익은 딸기는 신맛하나 없이 달콤하게 입안에서 사라져갔다. 딸기 하나를 얼른 먹어치우고 누운 몸을 일으켜 딸기 쪽으로 손을 뻗자 건화가 얼른 쟁반을 들어 가져왔다. 뭔가 군기가 잔뜩 베인 느낌인데. 모래알이 느껴지는 불편함이지만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기억도 안 날 일이었다.


“밖에 추워?”

“쫌.”

“근데 페페는 겨울에도 밖에 살아?”


생각해보니 바로 옆집인데 이틀간 형네 집에 오면서 페페 생각은 하지도 못했네. 밖에 나가볼까. 후거가 마지막으로 페페와 눈길을 나눈 게 가을이 되기 직전이었는데, 그 때 페페는 마당에 나와 있었다. 지금도 그런가. 대형견이라도 겨울은 추울 텐데.


“겨울엔 현관에서 자.”

“그래도 추울 거 같아.”

“현관에 페페 침대 있으니까 별로 안 추울 거야. 낮에는 집 안에서 놀고, 산책 갈 때만 밖에 나가니까.”

“침대도 있어? 귀엽다.”


페페의 침대는 어떻게 생긴 거지. 매트리스도 있는 건가, 아니면 그냥 말만 침대인건가. 딸기 하나를 더 집으며 머리를 굴린다. 후거도 나중에 혼자 살게 되면 고양이를 키우고 싶다. 지금은 부모님 때문에 못 키우는데, 나중에 독립을 하게 되면 고양이 데려와서 캣타워도 만들어주고 고양이 침대도 놔줘야지. 


“나도 고양이 키우고 싶어.”


아빠가 고양이털 알레르기가 있어서 지금은....

아. 지금은 아빠도 엄마도 없구나. 


공상에서 또 현실로 끌려나왔다. 현실에는 고양이도 없고, 고양이 털 알레르기를 가진 아빠도 없다. 밝았던 표정도 부지불식간에 어두워졌다. 부모님에 대한 생각을 안 하려 해도 불가능하다. 문득문득 자연스럽게 머릿속을 지배한다. 형이 미울 때도 그랬다. 일부러 우울해지기 싫어 형 생각을 하지 않으려 해도 나도 모르는 새에 내 상상 속에서 중심을 차지한다. 


“점심은 뭐 줄 거야?”


생각을 줄이려 다른 것으로 화제를 돌린다. 아침도 딸기로 때우는데 점심 이야기가 나오니 건화는 당황했는지 테이블 위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고민했다.


“뭐 먹고 싶은데?”


고민한 결과가 되묻는 거라니 좀 어이가 없긴 한데.


“몰라. 형이 결정해야지.”

“네가 먹고 싶은 거 사줄게. 아니면 훠궈 먹으러 갈까?”

“형은 나만 보면 그거 먹쟤. 지겨워.”

“그럼...”

“청리랑은 언제 헤어졌어?”

“어?”


점심이야기에서 또 주제가 순식간에 바뀐다. 훅훅 바뀌는 이야기에 정신을 못 차릴 것 같지만 건화는 생각과는 달리 꽤 의연하게 대답했다. “좀 됐어.”


“그 좀이 언제인데?”

“...한 달은 넘은 것 같아.”


한 달이 넘었다는 거면, 진짜 좀 된 건데. 싸우고 나서 거의 바로 헤어진 거 아닌가. 그렇게 쉽게 헤어질 수 있었으면 애초에 나한테 그러지 말았어야지. 

끝이 살짝 갈색으로 변한 딸기의 꼭지를 만지작대며 윗입술을 말아 다물었다. 갈색 이파리를 똑, 떼고는 짜증이 담긴 손으로 딸기가 든 바구니에 툭 던져 넣었다가 본인의 양심에 찔려 던져버린 이파리를 도로 쟁반위로 올렸다. 


“헤어질 때 뭐래?”

“그냥. 그럴 줄 알았다고.”

“뺨 맞았어?”

“맞진 않았는데.”

“욕은 먹었구나.”


이번엔 부정하지 않는다. 잠시 침묵하던 건화는 후거가 딸기를 집어 입안에 넣는 것을 보다 눈을 내리깔곤 대답했다.


“욕먹어도 쌌어.”

“맞아. 형은 욕 좀 먹어야해.”


그러자 건화의 입꼬리가 스르륵 올라간다. 욕먹어도 된다고 말하니까 웃는 거 봐. 취향도 독특하시지. 


"나 보고 싶었어?"

"엄청."

"거짓말 하지 마. 보고 싶은 사람이 그래?"

"말할 때 마다 후회했어."

"그래서 후회할 짓을 왜 하냐."

"미안."


 기분이 묘하다. 형이 나한테 미안하다고 말하는 게 싫다, 하지만 계속 콕콕 찌르고 공격하고 싶었다. 난처해하는 모습은 좋은데, 기죽어서 아무 말도 못하고 사과만하는 건 또 싫다.


다시 뱉어지는 미안해. 하는 말에 후거는 눈만 가늘게 깜빡이곤 뾰로통한 얼굴을 하다, 딸기를 들어 건화의 입술 앞에 댄다. 잠깐 놀란 건화가 흠칫하긴 했지만 이내 후거의 손에서 딸기를 받아먹었다. 터지는 빨간 과즙이 후거의 손가락 아래로 흐르고, 순간 이 앞에서  핥아먹으면 곽건화가 어떤 얼굴을 할까 궁금해졌지만 싸구려 에로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짓을 스스로 하긴 싫다. 아무렇지 않게 손을 뻗어 형의 바지에 슥슥 문질러 닦으니 팍 콧잔등을 찌푸린 형이 잔소리를 시작했다.


“그걸 왜 바지에다 닦아.”

“휴지 없잖아.”

“없긴 바로 뒤에 있는데.”

“있으면 형이 미리 닦아줬어야지.”

“허.”


어이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은 건화는 후거 너머에 위치한 티슈를 들어와 바지를 슥슥 문지른다. 하얀 티슈에 핑크빛 물이 점점이 묻어났다. 양심에는 요만큼도 안 찔린다. 딸기향이 사방에서 진동하는 것 같은데, 후거는 딸기를 더 먹기 보단 괴롭히고 싶었다. 형이 힘들어하는 건 싫지만, 나 때문에 안절부절 하는 건 좋으니까.


“열은 없어?”


대충 바지에 묻은 딸기 즙이 없어진 것 같아서 축축해진 티슈를 구겼다. 새로 산 바지에 얼룩을 만든 장본인이지만 얼굴을 보니 아픈지가 더 걱정이었다. 후거 말로는 기침하는 척이라는데, 좀 전에도 몇 번 기침하는 걸 보면 아주 꾀병은 아닌 것 같다. 실제로 감기몸살에 걸렸다 해도 당연할 일이었다. 이 추운 날씨에 그렇게 고생하고, 그렇게 걱정하는데 병이 안 걸리는 게 더 이상하지.


“없어.”

“진짜?”

“안 믿기면 재보던가.”


망설이는 건화와 달리 후거는 덥석 건화의 손을 붙잡아 이마위에 올렸는데, 뜨거운 건 이마가 아니라 손바닥이었다. 어찌나 뜨거운지 제 이마와 건화의 손을 착각해서 본인이 열이 나는지 착각했을 정도니까.


잠깐 놀라 굳어있던 후거는 뜨거움의 진원지가 자신의 이마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파드득 잡은 손목을 내렸다.


“감기는 형이 걸린 거 아냐? 손이 왜 이렇게 뜨거워.”

“차가운 거보단 낫지.”


가볍게 대꾸한 건화는 딴소리를 한다. "딸기 더 먹어." 빨간 딸기에 달린 꼭지를 톡 떼주더니 후거에게 내밀었다. 그래도 입에 대주진 않네. 받아먹으면서도 뭔가 찜찜하다.


아까부터 대화에 영양가가 하나도 없다. 죄다 필터링 없이 나오는 대로 뱉는 말 뿐이었다. 어색함을 없애려는 일련의 노력들이었는데, 굳이 이것저것 말을 늘여서 굳이 시끄럽게 떠들 필요가 있을까.


“점심은 뭐 먹을래?”


훠궈.. 훠궈 싫으면.. 마트에서 장봐서 요리할까? 후거 대추랑 가지 좋아하지?


하여튼 훠궈 엄청 좋아해. 나랑 훠궈 먹으러 갔다가 가게 잘못 고르면 전골 하나에 고기도 못 넣고 풀만 주구장창 먹어야하는데.


“좀 쉬다가 마트 다녀오자. 아. 피곤하면 그냥 나 혼자 갔다올 게.”


건화는 끊임없이 말을 한다. 후거가 일부러 대답하지 않고 있어도 잠깐 입술을 뻐끔뻐끔 벌리다 눈을 크게 굴리곤 또 다른 말을 꺼냈다. “지금 추워? 난방기 더 틀까?” 매번 의문문으로 맺은 말에도 대답하나 없는 후거가 이상하지도 않는지, 아니면 이상한 걸 알면서도 본인의 의지와 다르게 계속 말이 튀어나오는 건지. 그리고 또 다른 대화거리를 찾기 위해 며칠 전에 서점에서 봤던 책의 제목을 궁리하다가, 눈을 뾰족하게 뜬 채로 가만히 쳐다보기만 하는 후거와 눈이 마주쳐서 저도 모르게 후거의 눈을 보다 뒤늦게 묻는다.


“왜?”

"형 원래 이렇게까지 말 많은 거 아니잖아."

"음..."

"내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말 다 하는 거라고 생각할게."

“하고 싶었던 말 다 하려면 한나절로도 부족할 걸.”


그럼 곤란한데.

쭈욱 내민 입술을 삐죽대며 건화의 옆으로 붙었다. 곤란하다는 말과 달리 후거는 꽤 기분이 고양된 모습이었다. 좀 전까지 목 아프다고 호소했으면서 그 짧은 시간에 학습능력을 잃었는지, 또 다시 건화의 어깨에 뺨을 대고 톡 튀어나온 입술을 넣었다.


“A4용지에 빡빡하게 써오면 읽어줄게.”

“내 글씨 알아볼 수 있어?”

“음..”


형 글씨는 좀 심해. 나도 잘 쓰는 거 아니지만 형은 감히 내가 비교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으으음... 후거의 고민이 길어지자 건화는 내심 삐진 모습이었다. 물방울이 맺힌 바구니 끝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린다. 

으으으으으으음. 일부러 들으라는 더 늘이며 신음한 후거는 곧 언제 그랬냐는 듯 깔끔하게 답을 내렸다.


“사랑으로 알아볼 수 있을 거야.”

“그럼 이따 써서 줄게.”


아마도. 알아볼 수 있을 거야. 확신은 안 서지만.


사랑으로 알아보겠다는 말이 썩 마음에 드는지, 올라가는 입꼬리에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이곤 후거의 어깨를 감싼다. 그간 많이 말라서 팔뚝과 어깨에 뼈가 도드라지게 전해진다. 원래도 후거는 양이 많지 않았다. 지금보다 더 어릴 땐 키가 크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적게 먹었고, 키가 훨씬 큰 후에는 어릴 때부터 적게 먹다 보니 거기에 맞춰졌다. 본인도 소식을 하면서 후거가 조금 먹으면 마음이 불편하다. 못 먹겠다고 할 때 까지 먹여야 마음이 놓였다.


“미안해.”


후거가 이렇게 마른 것도 결국 내 잘못이다. 


“지겹다 그 소리도.”

“벌써 지겨우면 안 돼. 앞으로 계속 할 거니까.”

“....”


후거가 싫어해도 별 수 없다. 후거가 아무리 용서해줬다 한들, 본인이 한 일은 미안하단 말 몇 번에 용서받을 일이 아니었다. 

후거의 묵언은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미인 것 같지만.

조용히 다른 곳을 보는 옆얼굴을 흘끗 본 건화는 손톱이 짧게 바짝 깎인 후거의 손을 들었다. 어제는 이렇게 까지 짧지 않았는데, 오늘 후거의 손톱은 유난히 짧다. 일부러 누군가를 긁으려 해도 깊은 상처를 내기 힘들어보였다. 이렇게 깎다가 다치진 않았을지. 보기엔 괜찮아 보이는데. 충분히 여린 손끝 위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내려 입 맞추자, 멀리 벽을 바라보던 후거의 눈길이 닿았다. 


“딸기 향 나.”

“이러려고 딸기 먹였구나.”

“꼭 그런 건 아니야..”


굳이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건화는 다시 한 번 홀린 듯 후거의 손 위에 키스한다. 낯 뜨거워 하릴없는 말만 튀어나가는데, 그래도 후거는 굳이 손을 거두지 않았다. 



***



마트에서 카트에 온갖 풀만 잔뜩 담았다. 고기를 안 먹는 후거 때문이었는데, 형은 먹어도 된다고, 먹고 싶은 걸 사라고 해도 말을 안 듣는다. 

그래서 합의 본게 새우였는데, 나름대로 마트에서 집까지 오는 길에 둘의 의견을 종합해서 요리를 만들었더니 비싸고 맛없는 전복 볶음밥에 이어 또 다른 괴식이 탄생했다. 힘들게 만들었으니 꾸역꾸역 먹기는 했지만...


배불러.

맛없는 걸로 배를 채우니 행복하긴 커녕 찝찝하기만 하다. 정원에 나가 건화의 허락을 맡고 화분들에 조로록 물을 주고, 고개를 길게 뻗어 옆집에 혹시나 페페가 나와 있을까 확인했다. 형 말대로 겨울이라 없나봐. 마당에는 텅 빈 개집과 먼지가 쌓인 물그릇만 있다. 막상 보면 무서워하면서도 은근히 아쉬운 마음에 한 번 더 확인 한 후에 다시 집 안으로 들어온다. 차갑게 얼어있던 코와 뺨이 빨갛게 녹기 시작했다.


"으, 추워."


팔을 패딩 소매 속에 쏙 넣어놓고 발을 동동 구르며 안으로 들어온 후거는 싱크대 앞에 서 있는 건화의 등을 끌어안으려고 주방으로 직진하다 중간에 왼쪽으로 선로를 변경했다. 아직은 내외해야한다. 형이 더 안달 나게 만들고 싶다. 나 없이 못 살게 해주겠어. 두꺼운 패딩은 벗어서 옷걸이에 걸어두고, 소파에 담요를 칭칭 말고 앉으려다 머릿속에서 빛처럼 무언가가 스쳐지나갔다.


숙제.


아. 나 숙제해야해.

깜빡할 뻔 했네.


시험 끝나고 얼마 안 있으면 또 시험, 또 시험, 또 시험. 가끔은 후거도 다른 애들처럼 다 놓고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싶지만 아직까진 할 수 있는 게 공부라서, 놓을 수가 없다. 


아- 움직이기 싫어. 하고 생각은 하면서 몸은 일으켰다. 형은 아직도 주방에 있다. 아까 그렇게까지 많이 어지럽혔던가. 

방에 들어가 책과 노트, 필통만 가져와서 거실 테이블 앞에 앉았다. 살짝 높긴 한데 불편하진 않으니까 그냥 여기서 할 생각이었다. 한 시간이면 다 할 수 있으려나. 125페이지까지 다 풀고.. 틀린 건 오답노트 하기. 


평소보다 집중이 안 돼서, 한 문제 푸는데도 시간이 엄청 걸린다. 그래도 최대한 잡생각 떨쳐내며 문제에만 집중하려고 노력 중이었다. 중간에 형이 다 치우고 나왔는지 거실에 왔다가, 다시 들어가서 오렌지 주스를 가져와 테이블에 놓을 때 까지도 후거는 최선을 다해 집중하고 있었다. ‘다른 것을 고르시오’ 라고 적힌 문제를 잘못 읽어 같은 것을 고르고 멍 때렸지만 그래도 다음문제 풀기 전에 다시 고쳐놨으니 거기까진 괜찮았는데, 본격적으로 곽건화가 후거의 얼굴만 쳐다보며 맞은편에 앉아 있는 게 거슬리기 시작하자 풀이 속도는 점점 더 늦춰진다. 한참을 7번 문제에서 머물렀다. 펜은 쥐고 있는데, 의미 없는 쌀알만 한 숫자만 이어 쓸 뿐, 풀이에는 도움이 안 되는 것들이었다. 건화는 숙인 후거의 이마와, 코끝을 보느라 후거가 몇 번 문제를 풀고 있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페이지를 넘기지 않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지만.


"그만 봐."

"어?"


얼마나 넋 놓고 있었던 건지 후거가 대뜸 말하자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뜬다. 누가 잡아먹는다고 했나. 뭘 저렇게 놀래.


"형이 자꾸 쳐다보니까 공부가 안 되잖아."


쉬운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풀이가 안 되는 7번을 샤프심으로 콕콕 찌르며 말한다. 건화는 후거의 문제집과, 후거의 얼굴을 번갈아보더니 오히려 본인이 이해가 안가는 표정을 했다.


"전엔 잘했었잖아."


몇 시간을 쳐다봐도 코빼기도 신경 안 썼으면서.


"그때는 형 별로 안 좋아했어."

"....."


지극히 솔직한 대답에 할 말을 잃었다. 삐친 표정을 감추지 못한 건화는 자세가 불편한척 고쳐 앉으며 헛기침을 몇 번 한 후에야 대꾸한다.


“그랬어? 나는 그 때도 좋아했는데.”

“언제부터 좋아했는데?”

“안 가르쳐줄래.”


그래도 몇 년 더 일찍 태어난 형이니까 기껏 노력해서 어른스럽게 대답한 보람이 없었다. 건화는 새침하게 대답하곤 후거의 얼굴에서, 손에 쥔 샤프로 눈길을 돌렸다. 이제 눈까지 피한다. 7번 문제 위에 점을 콕콕 찍은 후거는 눈을 동그랗게 휘며 웃었다. 


“삐졌어? 내가 전엔 안 좋아했다고 해서?”

“아니야.”

“삐진 거 다 알거든.”


모를 수가 없지. 형은 싫으면 싫은 티 다 나더라. 원홍이랑 함께 있는 거 보면 온갖 표정 다 찡그리면서 말은 “안녕.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하지. 오히려 그 편이 더 섬뜩하다.


삐진 형은 그냥 두고, 다시 허송세월을 보낸 7번으로 돌아간다. 어렵지도 않은 문제를 시도조차 못하고 있었는데, 막상 풀려고 노력하니 답은 쉽게 도출된다. 가볍게 낙서하듯 풀이하고, 암산으로도 충분한 난이도였다. 애초에 어려워서 풀지 못한 게 아니라, 풀 수 있으면서도 딴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거니까.


“괜찮아. 지금은 내가 더 좋아하니까 쌤쌤이야.”


7번을 풀자마자 샤프를 내렸다. 건화의 시선은 이제 샤프에서 손가락으로 옮겨간다. 실은 아까 손가락에 뽀뽀하면서, 후거의 뺨에도 하고 싶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 참아냈다. 

그래도 지금은 조금 힘들다. 힘껏 끌어안고 몸에 닿는 곳 마다 입맞춰주고 싶은데. 그러질 못하니.

대신 건화는 목전에 입 맞췄던 후거의 손가락 끝을 매만지며 가늘게 빠진 눈매와 마주했다.


“사랑해.”


낼 수 있는 한 가장 다정한 목소리를 낸다. 건화의 고백을 들은 후거는, 다소 낯선 표정을 지었다. 처음 들었을 때는 미움과 온갖 감정이 뒤섞여 제대로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었다. 결과적으로 형이 사랑한다고 말해줘서 마음이 풀렸지만, 다시 한 번 들으니 기분이 묘하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 모르겠다. 수줍어하는 꼴 보이기 싫은데, 후거는 귓바퀴가 벌겋게 달아올라 대답하지 못하는 제 모습이 꼭 첫 사랑하는 중학생처럼 보일 것 같아 걱정이 된다. 좋아해와 사랑해는 기분이 다르다. 표현하긴 힘들지만 온몸에서 세포하나하나가 피어오르는 것 같고, 민망함에 살갗이 오소소 돋아나 괜스레 어깨를 좁히게 된다. 

‘나도 사랑해.’

하고 대답해주고 싶으나, 아직 후거에겐 어려운 일이다. 형에게 좋아한다고 백번은 말할 수 있지만... 

그래서 후거는 대답하는 대신 고개만 끄덕이는 것을 선택했다. 형이 섭섭해 할까. 걱정은 되지만 차마 입술이 안 떨어진다.


하지만 후거의 걱정과 달리 건화가 섭섭해 할 일은 없었다. 누가 봐도 후거는 첫사랑에 빠진 중학생 같아 보이니까.



***


일요일도 형이랑 하루 종일 집에 붙어있었다. 분명 곽건화는 농구가 하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 했을 텐데 나랑 있는 내내 농구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장족의 발전이지.

낮에는 형을 따라 페페와 산책을 잠깐 하긴 했었는데, 발전은 건화뿐만 아니라 후거도 하긴 했다. 페페와 3m 거리를 유지하던 걸 2m로 줄였으니까. 페페가 누군가를 물거나 하지 않는다는 걸 분명 알고는 있지만 덩치가 크니까 위압감이 느껴져서 아직도 완전히 가까이 가는 건 힘들다. 그래도 어제는 간식도 줬으니까 대단한 거야.


아침에 형이 해주는 흐물흐물한 계란프라이를 먹고 나서 함께 등교도 했다. 졸업반이면서 지각을 상습범처럼 해대는 곽건화. 지각한다고 잔소리를 하면서도 마음은 들떠서 하늘에 둥둥 떠다닌다. 형이 중간에 손잡으려고 하질 않아서 확실히 예전 그대로 돌아가기는 힘들다는 걸 깨닫긴 했지만 굳이 예전으로 돌아갈 필요는 없다. 앞으로 더 좋은 방향으로 갈 수 있는데, 굳이 전과 똑같아질 필요는 없지.


“몇 시에 마쳐?”

“나 늦게 마쳐. 기다리지 말고 먼저 가.”

“어차피 나 공부하다 갈 거니까 괜찮아.”

“으음... 그러면 여섯시.”


각자의 반으로 갈라지기 전에는 마치고 함께 가자는 약속도 했다. 별 것 아닌 말을 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마음이 벅차다. 하루하루가 마른 겨울 나무였던 자신의 삶에도 다시 싹이 트는 것 같아서. 


쉬는 시간에는 다음 수업 예습을 하면서도 중간 중간에 형과 문자를 했고, 저녁에는 형과 뭘 먹을지 고민을 했다. 결국 마칠 때 까지 정하진 못했는데, 어차피 형이랑 같이 집에 걸어가면서 의논하면 되는 일이었다.

교실에서 쭉 공부하면서 기다리려고 했는데 하필 샤프심이 몽땅 떨어졌다. 샤프 안에 남아있던 샤프심들이 죄다 부러져있어서 오늘 내내 딸깍딸깍 거렸더니 결국 다 썼네. 다른 친구에게 빌리려다 어차피 필요하단 생각에 휴대폰만 간단히 챙겨서 교문 건너편 문구점에 들리러 나왔다가, 예상치 못한 사람과 마주쳤다.


“엄마..”


교문 앞에는 엄마가 서 있었다. 후거의 하교 시간을 미리 알고 왔는지, 소매를 걷어 손목시계를 확인한 그녀는 후거에게 다가온다.


“이제 집에 가자.”


기력 없고 지친 목소리. 마지막으로 봤을 때 보다 훨씬 수척해진 얼굴이라 후거는 차마 엄마의 손을 거부하지 못했다. 할 수가 없었다.







'연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건화후거] 비틀비틀 13  (0) 2017.04.09
[건화후거] 비틀비틀 12  (1) 2017.04.02
[건화후거] 비틀비틀 10  (1) 2017.03.14
[건화후거] 비틀비틀 09  (1) 2017.03.01
[건화후거] 비틀비틀 08  (2) 2017.0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