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차여차
곽호 썰, 소설 올리는 블로그 @tarack_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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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재 완 결 단 편 기 타 방명록



   여차여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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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수업을 마치자마자 바로 가방을 들고 튀어나왔다. 6시. 교문을 나서는 길에 후거에게 전화를 걸어볼까 고민했었지만 부모님이랑 함께 저녁을 하고 있을 시간이니 좀 더 기다리기로 했다. 휴대폰을 손에 쥔 채 늘 걷던 하교길을 걷는데 기분이 싱숭생숭하고 헛헛하다. 오늘은 같이 갈 수 있을 줄 알았다. 


후거는 괜찮을까. 어머니께서 찾아오셨다지만, 그걸 완전히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생각할 순 없다. 변수는 무수히 많이 있다. 아직 아무 연락 없는 것 보면 괜찮은 것 같은데, 또 반대로 큰 일이 나서 연락을 할 수 없는 거라면? 

불이 깜빡깜빡 켜지는 가로등 아래 서서 휴대폰 화면을 본다. 잠깐 생각에 잠겼다.

후거네 집에 한 번 가볼까.

굳이 들어가지 않아도 분위기만 좀 보고 오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그래. 가보자. 어차피 멀지도 않고 코앞이잖아.

마음을 결정하자마자 침울했던 감정이 조금 가벼워진 것 같다. 건화는 주머니에 휴대폰을 도로 넣으며 발걸음을 빨리했다. 후거의 집 근처에 간다 한들 얼굴을 볼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이는 순간이 있다.


오늘은 별로 안 춥네.

한동안 살이 에일정도로 차가운 바람만 불더니 오늘은 좀 낫다. 숨을 쉴 때마다 허공에서 하얀 입김이 불어나오지만 어제까진 그 입김이 얼어붙을 것 같은 날씨였다. 더 추워지기 전에 후거가 집에 들어가서 다행이다. 건화가 겪은 바로는 가장 추울 때 가장 외로웠다. 해도 빨리 지는 겨울은 여름보다 더 싫다. 금세 밤이 오고, 금세 감정적으로 변하게 된다. 넓은 집에 홀로 남는 건 이따금씩 눈물을 흘리는 것만으로 감당이 되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겨울방학이 제일 싫다. 주말보다는 평일이 좋고, 밤보다 낮이 좋다. 할머니가 계실 때 까지는 주말도 방학도 괜찮았으나 지금은 아니다. 


길을 걷다 다시 정지했다. 지름길 중에 하나인 골목길 앞에서 선다. 두 사람 정도만 드나들 수 있을 것 같은 골목길은 주택가 사이에 좁게 나 있어서 따로 가로등이 없었다. 3분 정도 걸어야 하는데, 낮은 주택에 나 있는 창문으로 빛이 들긴 하지만 썩 밝다고는 할 수 없다. 후거는 겁이 많아서 밤중에는 이 길로 가는 걸 싫어했다. 그래서 같은 학교가 되어서 함께 하교를 할 때는 지름길을 두고 일부러 큰 길로 돌아갔다. 5분이나 더 걸리지만 무서우니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건화가 굳이 그 지름길로 가지 않는 건 후거가 무서워해서만이 아니었다. 단 오 분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어서. 내가 아침에 일어나 눈 뜨는 순간부터, 내 하루의 시작이 바로 이 시간을 위해 있는 것 같아서.



밤은 무섭다. 위험한 시간이다. 강한척하는 건화도 무서운데, 스스로도 겁이 많다 인정하는 후거가 무섭지 않을 리가 없다. 한 달이나 어두운 밤길을 혼자 걸으며 후거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렇게 혼자 있게 내버려둔 본인도 싫다. 길 걷다 말고 자책감에 빠져들려는 찰나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에 놀라 깨어난다. 후거일까 싶어 휴대폰을 들어봤더니, 근 몇 달간 연락이 없었던 어머니에게서 온 전화였다. 화면에 뜬 글자에 당황한 건화는 전화를 받지 못하고 물끄러미 내다 보기만했다. 받고 싶은 마음이 없다. 왜 전화 한 건지 궁금하긴 하나 전화를 받을 정도로 답을 듣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도로 주머니에 넣고 걷는다. 이제 조금만 더 걸으면 우리 집이 나오고, 거기서 좀 더 걸으면 후거의 집에 도착한다. 


일부러 진동을 무시하며 최대한 보폭을 넓게 걷지만 전화는 꺼지면 다시 진동이 울리고, 꺼지면 다시 울린다. 어떻게든 받으라는 표현이었다. 결국 세 번째 전화가 다시 울릴 때 휴대폰을 들었다. 전봇대 아래에 서 슬라이드를 연다. 하아. 한숨 쉬며 목울대를 몇 번 넘기고, 하얗게 피어나는 입김을 보다 통화버튼을 눌렀다. 정말 싫었는데.


“네.”

-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


대답하고 싶지 않아졌다. 건화의 침묵에 따라 대답을 잃은 어머니도 잠시 조용해진다. 마음속으로 다섯을 센다. “국제 통화잖아요. 끊을게요.” 하고 말하려고. 그러나 어머니가 먼저였다.


- 요새 어떻게 지내?

“잘 지내요.”

- 혼자서 밥은 잘 챙겨먹어?

“아주머니 오셔서 가끔 밥 해주세요.”

- 요즘엔 일주일에 한 번만 오신다며.

“그냥 알아서 지내요. 이렇게 지낸 게 몇 년 째인데. 익숙해요.”


익숙해지길 원하지 않았지만 이미 이렇게 된 걸 어떡할까. 원망하지 않으려 했는데 의도와는 다르게 원망스런 말투로 나왔다. 어머니의 침묵이 길어지는 것도 그 이유겠지. 휴대폰을 든 채로 걷는다. 아무 대화 없이 통화시간만 길어지고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학생들을 보다 다시 앞으로 눈을 돌린다.


“캐나다는 어때요.”

- ..좋지. 좋아!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전화했어. 졸업반이지?

“네.”

- 졸업하고 여기로 올래?


발이 우뚝 멈춘다. “여기로 올래?” 함께 살자는 의미였다. 이제야.... 감격이나 반가움보단 짜증부터 인다. 감동을 받을 시기는 이미 지났다. 지나도 한참이나 지났다. 함께 있길 바라는 열여섯 곽건화는 이제 없다. 차라리 지금은 혼자가 편하다. 혼자인 게 무섭고 외로워도 이게 낫다. 싸우는 부모님의 고함소리에서 도망쳐 이불 속으로 몸을 숨기고 우는 것 보단 훨씬 낫다.


“아니요.”


그래서 짜증스레 대답했다. 얼굴마저 일그러뜨렸다. 이제 와서 이러는 이유가 뭔데요. 뒤늦게 죄책감이 들어서 그 죄책감 걷어보려고 그러세요? 마음속으론 더 날카롭고 아픈 말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오지만 차마 건화는 그 말을 밖으로 꺼낼 만큼 독한 아들이 되지 못했다. 아니라는 말 하나로 모든 걸 삼킨다.


- 언어 때문에 그래? 괜찮아. 여기 와서 하는 사람들도 많아. 어학원 다니면 될 거야. 

“그냥 여기 있을 게요.”

- 아니면.. 엄마 때문에 그래?

“..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헛숨 삼키는 소리. 건화는 무미건조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본다. 이미 까맣게 물든 하늘은 구름을 구분하는 것도 힘들다. 


“캐나다 안 가요. 여기서 취업할 거예요.”

- 대학은 가야지.

“빨리 돈 벌어서 독립하려고요. 그리고 저 드릴 말씀이 있어요.”

 

마침 떠올랐다. 어머니와 연락은 흔치 않은 일이니 연락이 되었을 때 하는 게 낫다. 별 다른 떨림도, 두려움도 없다. 어차피 통보일 뿐이니까. 천천히 걸으며 하얀 입김 속으로 뱉는다.


“저 게이예요.”


역시나 대답이 없다. 굳은 듯 아무 말이 나오지 않는다. 캐나다에서 살고 있는 어머니가 게이라는 말을 모를 리 없지만, 혹시 몰라 다시 덧붙였다. 동성애자요. 


“이상한 짓은 안 해요. 그런 걱정은 안하셔도 돼요.”


얼른 말을 끝내고 끊어버릴 예정이었다. 끊을게요. 하고 말하려던 찰나 어머니가 대답하는 바람에 그럴 수가 없다.


- 그런 걱정 안 해. 네 아빠한테는.. 말했어?

“아직이요.”

- 말하지 마. 그 인간한테 말하면 또 난리 난다.

“..어머니는요?”

- 내가 너한테 무슨 할 말이 있겠어.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그래도... 엄마도 캐나다 와서 많이 변했어. 여기 와서 생각도 넓어지고, 평생 내 생각만 하면서 살았는데 엄마가 이기적이라 네가 힘들었을 거라는 걸 너무 늦게 알았어.

“....”


이미 말했듯이. 감동을 받기엔 너무 늦었다. 건화는 표정의 변화 없이 이야기를 듣다 고개만 반대쪽으로 까딱였다. 전화를 끊고 싶다. 사랑을 구걸 할 때는 그렇게 버려놓고 왜 이제와 이럴까. 어머니가 내게 사과를 하게 된다면, 어머니 마음속의 죄책감이 한결 덜어질 것이다. 어머니는 스스로 편해지기 위해 미안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뿐이다. 물론. 욕과 악을 써가며 게이인 아들에게 저주를 퍼붓는 것 보단 낫지만 이제와서는 어떠한 반응도 건화에게 상처주지 못한다.


- 엄마가 하는 말 다 밉게 들리지?

“....”

- 나도 쉽게 용서받을 거란 생각 안 했어. 그냥.. 앞으로는 이렇게 자주 통화하고, 너 졸업식에는 중국에 들어갈게. 졸업식에는 가야지.

“..안 오셔도 돼요.”

- 입학식에도 못 간 게 지금까지 한이 됐어. 너희 외할머니도 너 보고 싶어 하시고... 할머니 모시고 갈 게. 

“네.”

- 그럼 좋아하는 애는 있고?


좋아하는 애.

그 물음에 잠깐 휴대폰을 떼었다 다시 귀에 댄다. 강풍에 눈이 따가워 뒤로 돌며 대답했다. “네.” 어머니가 물은 순간부터 머릿속에 후거가 떠오른다. 다른 건 아무것도 없이 오로지 후거가. 장난치는 모습이나, 억지를 부리는 거나, 공부를 하고 있거나, 혹은 물끄러미 저를 쳐다보고 있는 후거의 모습. 좋아한다. 언제부턴가 후거를 보면서 느끼던 감정이었다. 정확히 언제 부터인지는 가늠이 안 되지만, 천천히 물밀 듯이 후거에게 애정이 녹아들었다. 


- 그 애도 너 좋아해?

“좋아한대요. 아마 사귀고 있는 것 같아요.”


본인도 모르게 들떠서 쓸 데 없는 이야기까지 하고 말았다. 후거 이야기만 떠올려도 입가가 경련한다. 마음과는 다르게 입꼬리가 올라가고, 목소리마저 붕붕 떠 있었다. 그게 역시나 저기 멀리 캐나다에 있는 어머니에게 까지 전달이 되는지, 곧 어머니의 목소리도 밝아졌다. 우리는 이렇게 웃는 사이 아닌데. 알아채고 갑자기 정색을 하며 무뚝뚝한 소리를 내기에도 이상해 그냥 조용해졌다. 어느새 길을 걷는 것도 잊고 오고가는 차를 피해 잠시 문을 닫은 가게의 천막 아래로 자리 잡았다. 그 후의 대화는 별 것 없었다. 아버지에게는 말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는 말. 감기 걸리지 않게 조심하라는 말. 캐나다에 오고 싶으면 언제든 말해도 되고, 그리고 이왕이면 대학은 갔으면 한다는 말.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사대신 어머니가 맺은 말은 사랑한다는 말이었다. 기계적으로 네. 네. 하고 대답하던 건화도 그 때 만큼은 대답하지 못했다. 입술만 벙긋벙긋 하다 먼저 끊을게요. 하고 휴대폰을 닫아 버렸다.


내가 한참을 머저리짓 하고, 뒤늦게 후거를 붙잡아 용서를 빌었을 때. 너무 늦게 사랑한다고 말 했을 때 후거의 기분이 이랬을까. 복잡하고, 화가 나면서도 동시에 울음이 차오른다. 오랫동안 찬바람을 쐬어 감각이 둔해진 손으로 눈물을 훔쳤다. 얼어붙은 손에 뜨끈한 눈물방울은 아픔을 일깨워줄뿐이다.

이제는 부모님이 무얼 하든 상처도,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을 줄 알았다. 고작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에 울게 된다니 억울하다. 기껏 벽을 쌓고 단단해지려고 노력했는데, 이렇게 쉽게.


다시 한 번 눈물을 닦아낸 건화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보폭을 넓게 벌려 걸었다. 후거가 보고 싶었다.



***



집을 지나서, 겨울은 집 안에서 지내느라 텅 비어있는 페페의 집도 힐끗 스쳐보고, 아무런 생각 없이 걷기만 하다 발걸음을 멈췄다. 후거의 집 바로 옆에 세워진 가로등 아래에 도착했다. 등에 맨 책가방이 가로등에 닿고, 편안하게 등을 기댄 건화는 후거의 방이 있는 곳 즈음의 창문을 본다. 불이 꺼져 있었다. 벌써 자는 건가. 아직.. 아직...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한다. 아직 초저녁이었다. 자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다. 아니면 어머니와 대화한다고 거실에 있으나 방에 불을 켜지 않은 걸까. 

후거가 보고 싶어도 지금은 후거네 집의 벨을 누를 수 없다. 아주 오랜만의 가족과의 시간을 눈치 없이 방해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어쩌지.


5분간 서 있다가, 다리가 슬슬 아픈 것 같아 가로등 아래 쪼그려 앉아 창문만 본다. 불이 켜질 생각을 않는다. 자는 건가. 설마 정말 자는 건가. 전화하면 안 되겠지. 소심한 갈등만 내내하며 찬바람을 이겨내고 있었는데, 아직 창문에 불은 켜지지도 않았는데 주머니에 꾹 쥐고 있던 휴대폰의 진동이 울렸다. 갑자기 느껴지는 진동에 놀란 건화가 펄쩍 뛰는 바람에 뒤로 나자빠질 뻔 했다. 다행히 오늘은 공부하는 척을 하기 위해 책을 한 아름 가져온 덕에 두꺼운 책가방이 가로등에 몸을 붙여줘서 살았다. 아무도 지나가는 사람이 없으니 그 꼴을 본 사람도 없을 텐데 혼자서 얼굴이 시뻘게진 건화는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역시나, 기다렸던 사람의 전화다. 화면에 뜨는 이름만 보고도 입술이 당겨진다. 얼른 슬라이드를 열어 귀에 대었다. “형-?” 늘어지는 후거의 목소리가 들렸다.


"울었어?"

- 아니.

"그럼 됐어."


휴대폰을 통해 들리는 목소리에서도 울음기가 묻어나는데 결코 울지 않았다고 대답한다. 건화는 찌뿌듯한 몸을 일으키고 가로등이 기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 아무리 들어도 운 것 같지만, 안 울었다니까. 뭐.


- 아까는 왜 전화 안 받았어?

"전화 했었어?"

- 했는데 형이랑 통화할 수가 없대.

"그때 전화 하고 있었나봐. 지금 집이야?"

- 침대 속에 있어. 침대에 엄청 오랜만에 누워봐.

"다행이네. 밥은? 저녁은 먹었고? 맛있는 거 먹었어?"

- 응. 형은?

"난 이제 집 가는 중이야."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후거는 홀라당 넘어간다. 걱정까지 했다. 왜 아직 집에 안 갔어. 학교에서 늦게 마쳤어? 


“위험한데 밤에 오래 있으면 안 돼! 큰일 나!”

-맞아. 빨리 갈게. 집에는.. 아무 일 없어? 괜찮아?


형에게 우울한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 했는데, 막상 화제가 이리로 돌려지자 울컥하는 마음에 눈물이 쏟아진다. 휴대폰을 멀리 떨어뜨린 후거는 떨리는 손으로 눈가를 닦아내고, 티슈를 뜯어 코를 흥- 풀어내고 다시 휴대폰을 쥔다. 


“아무 일 없.. 없어어.”

- ...너 울었지."

"아니야."

- 코맹맹이 소리나.


코 푼 보람이 없다. 저가 듣기에도 없어-엉. 하고 코맹맹이 소리가 난 걸 인정 할 수밖에 없어서 더 이상 아니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흑. 이불 안으로 더 꿈틀꿈틀 몸을 모은다. 숨 막힐 것 같아. 저도 모르게 말했는데 그걸 건화가 들었는지 추궁하기 시작했다.


"뭐하는데 숨이 막혀?"

- 이불 속.

"빨리 나와. 울려서 잘 안 들려."

- 형 보고 싶어.

"지금 갈까?"

- 오긴 뭘 와. 집에 가라니까 말 안 듣지.


사실 지금 너희 집 바로 옆인데. 이러면 후거가 징그러워 하려나. 가로등에 붙은 구인 광고지를 손으로 툭툭 치며 휴대폰을 고쳐 받는다. 아. 날이 좀 덜 춥다 해도 이 겨울에 한참을 밖에 서 있으니 춥다. 추위를 잘 느끼지 않는 건화라도 삼십분 이상 밖에 있으려니 힘들었다. 패딩자켓의 지퍼를 목 끝까지 올린다. 


건화도 후거가 보고 싶은 마음은 똑같다. 그러니 집에 돌아가지도 못하고 남의 집 근처에서 서성이지. 그러나 지금은 그리운 마음보단 걱정이 앞선다. 후거가 울고 있다. 단순히 보고 싶은데 보지 못해서 우는 게 아닐 거다. 후거는 그렇게까지 눈물이 많은 사람이 아니다.


무슨 일인지 궁금하다. 왜 후거가 우는 건지. 후거의 어머니가 무슨 이야기를 했을지. 하지만 건화가 캐물어 후거가 다시 이전의 일을 떠올리고, 하나하나 머릿속에 새겨 넣으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다. 이미 건화가 몇 번이나 수 없이 겪은 일이었다. 다른 이에게 말하며 다시 상처 입는 것들. 후거에게 똑같이 겪게 하고 싶지 않다. 


"오는 길에 페페 봤어?"

- 응..

"봄 되면 페페랑 공원 산책 가보자. 그때까지 후거랑 페페랑 친해지면 되겠다."

- 난 원래 인기 많으니까 금방 친해질 거야. 형은 지금 집 가는 길 맞아? 아직도 가는 길이야?

"거의 다 왔어."

- 집 도착해도 전화 끊으면 안 돼?

"알았어. 안 끊어."


긍정적인 그의 대답에 후거는 푸하-. 하고 이불 밖으로 빠져나와 얼굴만 쏙 내밀고 휴대폰을 귀 위에 올려둔다. 눈을 끔뻑이면서 어두운 창밖을 슬쩍 보다가 다시 멀건 벽만 바라본다. 그래도 땅을 뚫어대던 기분이 좀 나아 진 것 같아 복잡한 감정이 가셨다. 두꺼운 이불 속에서 다시 몸을 꼬물댄다. 건화는 후거가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재촉도, 의문도 가지지 않고 차분히 기다렸다.


“이따 저녁에 뭐 먹을 거야?”

- 글쎄. 뭐 먹을까.

"형은 먹고 살 좀 쪄야해."

- 무거우면 점프 못한다니까.

"왜 요새는 농구 안 해?"

- 농구하는 시간보다 너랑 있는 시간이 더 중요하니까.

"그걸 이제 알았다니. 곽건화 진짜 뭘 모르네."


귓가에 파스스 웃음이 부서진다. 평소보다 목소리 톤이 높아져 이불 속에 파묻힌 후거에게도 웃음기가 전염 된다. 아으으-. 작게 감탄을 뱉으며 올라가는 볼을 꾹꾹 손으로 눌러 억지로 아래로 내린다. 그러한들 소용없이 뺨이 다시 솟아나지만.


실컷 웃고 난 건화는 한참동안 서 있느라 아픈 다리를 흔들어 풀며 벽에 기대어 선다. 종아리 뒤쪽이 당겨서 번갈아가며 서느라 더 힘들다. 후거도 곧 조용해졌다. 뒤척이는지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연이어 들리는데, 시계를 보니 어느덧 일곱 시 반이다. 아직 자기엔 이른 시간인데.


“후거.”

-응?

“혼자 있고 싶으면....”

-아니야.

“아니야?”

-응. 끊지 마. 끊어도 내가 먼저 끊을 거야. 알았지?

"알았어."


복잡하고 우울한 때에 혼자 있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미 후거는 그간 외로이 지냈던 것에 진절머리가 났고, 혼자가 아니라는 걸 확신하고 싶었다. 그래서 형에게 전화를 한 건데. 세 번이나 안 받고. 네 번째에 받아서 망정이지 다섯 번 걸어도 받지 않았다면 창문을 넘고 다시 가출을 감행 했을 지도 모른다. 킁-. 티슈에 다시 킁킁 코를 풀어냈다. 이제는 휴대폰을 가릴 생각도 없이 대놓고 코를 푸는데, 5미터쯤 떨어져 한겨울 추위 속에 휴대폰으로 듣고 있는 건화는 코푸는 게 뭐가 그리 좋은지 어깨를 들썩인다. 속눈썹이 잔뜩 젖은 후거는 퉁명스레 대꾸 했다.

 

-웃긴 뭘 웃어.

“안 웃었어.”

-내가 바보인줄 알아? 아까 웃었어. 소리 안내고 웃었잖아.

“아니야.”

-내일 가서 괴롭힐 거야.

“마음대로 해.”


나름대로 독기를 담아 괴롭힐 거라 말해도 건화는 시큰둥하다. 어디 해볼 테면 해봐. 하는 눈치였다. 그것도 그런 것이 괴롭힘을 당하는 쪽은 늘 후거였다. 건화가 주로 후거를 괴롭히는데 쓰는 기술들은 [길거리에서 손잡기, 방심하고 있을 때 뽀뽀하기, 느끼한 눈으로 쳐다보기] 등이었는데 그럴 때 마다 후거는 좋으면서 싫은 척을 했다. 대놓고 좋은 척을 하기엔 간질간질한 마음에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근데 형 언제 집에 가? 도착한 거야?”

- 어어.. 음..


도착하긴 했다. 후거네 집 바로 옆 가로등 아래에. 건화는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곤 이제 건드리면 툭 부서질 것 같은 손을 바꿔 휴대폰을 들었다. 따뜻한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자마자 손등이 간지럽다. 이러다 진짜 동상 걸리는 거 아닌가.

여전히 불이 꺼진 창문을 보며 그는 자연스레 거짓말을 한다.


“아. 막 도착했어. 페페는 집 안에 들어가서 안 보이네.”

-형은 맨날 페페 이야기만 해.

“왜. 네 이야기를 더 많이 하는데.”

-됐어. 나 아까 페페가 주인아저씨랑 산책 준비하는 거 봤어.

“그래? 아침에 페페랑 대화했는데, 페페가 후거 많이 보고 싶대.”


물론 이것도 순 거짓말이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절반만 거짓말이다. 말 못하는 강아지를 빌어 본심을 전하는 것이니까. 


-페페 나 안 좋아하는데?


페페가 좋아서 짖은 것을 안 좋아서 짖은 것이라 치환한 후거는 슬슬 누운 자세 때문에 허리가 아파와 엎드려 휴대폰을 받는다. 건화는 그럴 일 없다고 대답했다.


-페페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데. 엄청 좋아한대. 나한테 말했어.

“음...”


웬 뜬금없는 페페 이야기인가 했더니, 이제야 알겠다. 


“그래? 나도 페페 좋아해. 엄청. 나도 보고 싶었다고 전해줘.”


곽건화 멍청이. 그냥 보고 싶다고 말하면 될 걸 뭐 하러 페페가 보고 싶어 한대. 아예 싹 모른 척 하려다가 그래도 귀여우니 봐주기로 했다. 

예상대로 건화는 좋아했다. 페페를 좋아하고 보고 싶어 한다고 했는데 본인이 좋아 난리다. 후거는 픽픽 웃으며 휴대폰 배터리의 잔량을 확인하곤 미묘하게 입매를 길게 다문다. 배터리가 10%밖에 남지 않았다. 통화 시간도 벌써 십 분이 지나있다. 배터리야 충전하면 된다지만, 밥을 먹으면서 통화할 수는 없다. 형도 배고플 텐데 이제 밥 먹을 시간을 줘야겠지.


“집에 도착했어?”

- 도착했다니까.

“그럼 이제 전화 끊어.”


아. 너무 딱딱하게 말했나. 바로 이어 말했다.


“형 이제 저녁 먹어야 하잖아. 전화 끊어야할 거 같아.”

- 안 먹어도 되는데.

“제발 밥 좀 먹고 살아.”


나 보면 밥 먹었니 아침은 왜 안 먹니 하면서- 형은 그런 말 할 자격 없다. 밥 안 챙겨 먹고 사는 건 곽건화가 더 심하다. 오죽하면 하루 종일 요기가 될 만 한 건 아무것도 안 먹고 저녁에 아이스크림 하나와 과자 한 봉지 뜯어 먹는 게 끼니의 전부였다. 후거도 간식을 좋아하지만 간식을 먹기 위해 쫄쫄 굶지는 않는다. 곽건화의 식성에는 문제가 있다.


“알았어. 이따 먹을게.”

- 지금 먹으라니까!


지금은 먹을 수가 없다. 길가에 서 있는데 대체 어떻게 먹으란 말인가. 먹을 것도 없고 앉을 곳도 없는 걸. 하지만 후거의 말대로 통화를 끊어야할 때가 온 것 같긴 하다. 코끝이 시리고, 뺨이 얼어붙는 것이 느껴진다. 한겨울에도 얇은 외투 하나 입고 다녔으니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을 줄 알고 자만했었다. 


“갈까...”

- 어딜 가?

“어? 아니. 아니..”


여즉 휴대폰을 들고 있는 것도 잠시 잊고 혼잣말을 하다 후거에게 들킬 위기가 닥쳤다. 건화는 바로 어수선하게 대답한다. 어, 어. 우리 봄에 페페랑 산책 가기로 한 거 말이야. 산책. 어. 산책.


- 뭐야. 그 때가 언제인데 뭘 벌써부터 고민을 하고 그래.

“그냥 후거랑 같이 갈 생각하니까 들떠서.”

- 웩.


일단 후거 말대로 저녁을 먹어야하니 출발은 해야겠다. 후거의 창문을 흘끗 보다 왔던 길을 그대로 되돌아간다. 한겨울은 저녁이 없다. 오후가 금방 스쳐 지나가고 밤이 길게 내려앉는다. 차가운 밤길을 걸으며 귀에 집중했다. 아까부터 후거는 계속 전화를 끊으라는 재촉뿐이다. 자기가 먼저 끊으면 될 텐데. 조금 전에도 그렇게 말 했으면서. 둘이서 서로 먼저 끊으라고 실랑이를 하다 후거가 졌다. 결국에 처음 약속한대로 전화를 먼저 끊은 후거는 화면이 어두워진 휴대폰이 뜨끈뜨끈한 것을 느끼곤 얌전히 침대 밑 충전기에 꽂아두고 눈을 감았다. 방문 밖에서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어쩌면 엄마도 방에 틀어박혀서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현실로 잡아당겨져 돌아온 것 같은 기분에 또 다시 온갖 감정이 뒤엉켜버리지만, 내일은 평소보다 훨씬 일찍 일어나서 엄마가 깨기도 전에 집을 나가 형네 집으로 갈 생각이었다. 물론 학교가 끝나면 집으로 와야겠지만.

전화 끊은 지 얼마 됐다고 다시 형이 보고 싶다. 아직 잠을 자기에는 이른 시간이지만 억지로 꾸욱꾸욱 눈을 감는다. 빨리 아침이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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