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결 2016. 9. 17. 13:40
“예, 알겠습니다. 아니요. 저희가 뭐 한 게 있습니까. 예. 예.. 알겠습니다.”
피부가 까칠해졌다며 크림을 치덕치덕 바르고 아래로 내려온 명대는 진지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고 있는 큰형에게 달라붙었어. 뭐야? 뭐야? 명대의 뺨에 남은 크림이 옷에 닿자 명루가 눈썹을 찌푸리며 밀어냈으나 그런 거에 밀릴 명대가 아니었지.
“명대에게도 이야기해두겠습니다. 천만다행 아닙니까. 예.”
뭐가 천만다행인데? 뺨에 크림을 손바닥으로 톡톡 치며 형의 휴대폰에 귀를 대고 집중했으나 이미 통화가 끊어졌어. 명루가 휴대폰을 내리자마자 명대가 명루의 목을 조이듯 세게 끌어안고 무슨 전화를 받은거냐 닦달했어. “목 졸린다. 좀 놔봐.” 싫다는 듯이 이야기해도 명대를 세게 내치지 못했지.
“네 친구 후거.”
“어. 왜? 왜? 찾았대?”
“찾았어. 아까 낮에 깼다고 하더라.”
“와.. 다행이다. 어떤 시발놈이 그런 거야?”
진짜 밤 설치면서 걱정했는데. 그 덕에 내 피부가 이 모양이 됐잖아. 한 손으론 크림을 토닥이고 한 손으론 가슴을 쓸어내리는 행동이 귀여워도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욕설에 명루의 표정이 바로 찡그려졌어. 콩알만한 머리를 쥐어박으니 이번엔 명대가 얼굴을 잔뜩 구겼지.
“형 앞에서 시발놈이 뭐야. 시발놈이.”
“형도 동생 앞에서 시발놈이라고 했잖아.”
“이게 정말.”
요즘엔 그래도 말을 잘 듣는 편이라 오냐오냐 했더니 한도 끝도 없이 기어오르네. 짐짓 엄한 표정을 한 채 명대의 엉덩이를 손으로 내리치려 하자 닿지도 않았는데 아프다고 기겁한 명대는 호들갑을 떨며 아성의 뒤로 도망갔어. 형은 왜 작은 형은 안 때리고 맨날 나만 때려! 아무소리 하지 않고 조용히 있던 아성은 자길 왜 끌고 오냐며 짜증을 냈지.
“그래서! 후거 어떻게 됐대? 지금 어떻대?”
“괜찮다는데. 큰 이상 없대. 너도 내일 쯤 찾아가봐.”
화분에 물을 주고 있는 둘째형에게 달라붙어 명루를 피하는데 명대가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느라 그 머리통에 팔이 부딪쳐서 물조리개에 물이 와르르 쏟아 내렸어. 잔뜩 튀는 물방울에 찡그린 명대가 그제야 아성에게서 떨어졌으나 한 달에 한번 조금만 물을 줘야하는 것을 물조리개 채로 쏟아 부었으니 화분과 그 아래 받침대가 물로 엉망이었지. 흠뻑 젖은 선인장을 내려다본 아성은 가만히 눈을 감다, 눈치를 보며 살금살금 도망치는 명대의 뒷목을 붙잡아 당겼어.
“너 빨리 공부나 해.”
“이제 포기할 때도 안 됐어? 난 공부 체질 아니라니까.”
“공부는 엉덩이로 하는 거야. 책상 의자에나 붙어 앉고 말해.”
“난 이미 글렀어. 대신 우리 교수님이 나만큼 공부하잖아.”
“하... 네가 또 외출금지 당해 봐야 정신을 차리지.”
사실 이미 몇 번 겪었는데 정신은 조금도 안 차렸으니 또 외출금지 당한다고 바뀔 일은 조금도 없지만.
“외출금지 하기만 해봐. 누나한테 다 일러서 큰형이랑 작은형 둘 다 선보게 할 거야. 누나가 집에 노총각 냄새 난다고 얼마나 짜증내는데. 요새 누나 새벽기도 가는 거 다 형들 장가보내려고 그러는데 형들이야말로 누나 걱정 좀 시키지 말지?”
“...쟤는 대체 누굴 닮은 거냐?”
눈 뭉치 던지면 몇 배로 굴려서 눈 바위를 만들어서 던져대는데.. 키만 큰 철없는 어린애를 어떻게 크게 혼을 낼 수도 없고.
좀 나아졌던 두통도 도지는 것 같아 이마를 쥐고 소파에 드러눕자, 아성에게 뒷목이 잡혀있던 명대가 입꼬리를 올리며 아성의 손이 느슨해진 틈을 타 달아났지. 애초에 아성도 명대를 잡아서 때릴 생각도 아니었던지라 좋다고 도망가는 동생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어. 집안의 악마 같으니라고. 누님이 명대에게 껌뻑 죽으니 자연스레 명대가 두 형의 머리 꼭대기 위에 올라 앉아 이리저리 휘둘러대니까 아성도 명루의 두통이 옮는 것 같아.
“병원 어디래? 어느 병원?”
“머리 아프다. 이따 알려줄게.”
“빨리 알려줘. 걔가 내 은인이라 엄청 걱정했단 말이야.”
“무슨 은인?”
“나랑 고청명이 사귀는데에 일조를 좀 했지?”
계단 위에 올라 고개를 까딱까딱 흔들며 대답했어. 명대가 고청명과 이뤄지는 데에 도움을 줬다는 이야기에 막연하게 후거에게 호감을 품고 있던 명루는 그 호감이 산산히 부서지는 것 같아. 후거는 아무 것도 안 했는데 괜스레 배신감까지 들었지. 그래도 그 어린 것이 그 큰일을 당했는데 자기가 여기서 배신감 운운 할 때는 아니겠지. 생긴 것도 명대를 빼다 박은 얼굴이라 자연스레 걱정이 가지 않을 수가 없어. 비단 명루 뿐만 아니라, 아성이나 명경도 그랬거든. 후거가 납치당했단 말에 바로 명대에게로 고개가 돌아갔지. 똑같은 얼굴을 한 친구가 납치당했다는데...
“병원은 이따 다시 전화해서 알아보마. 병원비도 그냥 내가 내줘야겠어.”
“잘 생각했어. 역시 큰 형이 최고다. 근데 나랑 교수님 결혼식도 형이 비용 대줄 거지? 나는 교수님네 호텔에서 하고 싶어.”
키만 큰 어린애라 때릴 수 없다고 생각을 한 지 몇 분이나 지났다고. 맞을 짓만 골라서 하는 막내 동생의 행동에 결국 소파에서 일어나 매를 찾아 두리번거리자 명대가 후다닥 계단 위를 뛰어 올라갔어. 매만 찾으면 명대 붙잡고 엉덩이를 때려주려고 했는데, 막상 정신없이 계단을 오르는 걸 보니 넘어질까 걱정이 되어 천천히 올라가라고 버럭버럭 잔소리를 하고 나니 남는 건 정신력과 체력소모 밖에 없어. 매는 보이지도 않고 명대는 지 방으로 도망가서 없고. 선인장은 물 범벅이고.
“이거 누님이 아끼시는 선인장인데...”
“저번에 유럽 여행하다 사오 신 거?”
“....”
“명대가 했잖아. 괜찮아.”
이따 누님 오시면 말해둘게.
둘 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정작 불똥 터질 건 본인들이란 걸 알아. 선 자리 피하려면 또 하와이에라도 가야하나..
한편 방으로 올라간 명대는 혹여나 형들이 올라와서 때릴까봐 문을 잠그고 베개 맡에 충전 시키고 있던 휴대폰을 들어 바로 청명에게 전화를 걸었지. 과는 다르지만 어쨌든 자신의 수업을 듣던 제자가 납치당했으니 청명도 엄청 걱정을 하던 참이었어.
“교수님. 후거 괜찮대요. 아까 전화 왔어요.”
정확하게 어떻게 괜찮은 진 모르지만 어쨌든 괜찮대요.
침대에 걸터앉아 발끝을 흔들어 실내화를 벗고 매트리스 위로 기어 올라와 엎드렸어. 휴대폰 너머로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쉰 그가 피곤함이 가득 담겨 한껏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지.
-다행이네. 후거한텐 미안한 게 많아서..
미안한 게 많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억지로 생각 안 하려던 주제가 떠올라 침대 구석에 뒤집어져있던 회색 곰인형을 세게 끌어안고 베개 위에 턱을 대곤 뚱하게 입을 내밀었어. 대답 없는 명대에 의아함을 품은 그가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평소의 목소리로 돌아왔어.
-오늘 뭐 했어?
그냥 일상적인 안부일 뿐인데 그 목소리를 들으니 좀 전에 조금 삐졌던 거나 후거 걱정에 우울했던 속이 조금 가시는 것 같아. 배 아래쪽과 뒷목이 간질간질 했으나 그런 낌새를 숨기고 토라진 체를 했어.
“제가 뭐 하는지 궁금하긴 하나 봐요?”
논문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던 청명은 스피커폰에 크게 울리는 명대의 삐진 음성에 놀라 펜을 삐끗해서 노트 위로 길게 죽- 그어졌어. 노트북으로 타자치며 하려니 집중이 안 돼서 손으로 쓰고 있던 중이었는데 불행인건지 다행인건지. 당황한 그는 볼펜을 내리고 스피커폰으로 해뒀던 휴대폰을 들어 귓가에 대고 찡그린 미간 위를 검지로 매만졌어.
-내가 왜 안 궁금해 해?
“그런 건 맨날 저만 물었잖아요.”
-나도 물었던 거 같은데.
“기억에 없거든요.”
-어쨌든.. 그런 거 아냐.
“알았어요. 그런 걸로 할 게요.”
불쌍하니 봐준다는 식으로 대답이 돌아오니 할 말이 없어. 아니 정말 내가 명대 안부 물었던 적 있는 거 같은데? 있는 거 같은데.. 정확히 언제 그랬는지 기억이 안나니 반박도 시원하게 못하겠어. 이미 논문은 물 건너갔고, 명대가 왜 삐지는지 이해가 안 가서 아랫입술을 뜯고 있었지. 그 사이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교수님 놀리는 재미에 빠진 명대는 회색 곰인형의 주둥이를 손으로 꾸욱 잡아 누르며 말해.
“저 소원 있어요.”
-뭐?
“후거네랑 더블데이트 하는 거.”
이제 후거 괜찮으니까 기념으로 하면 좋을 것 같아요.
-더블, 더블 뭐?
“교수님인데 영어도 몰라요? 어려운 단어도 아닌데. 더블데이트.”
그걸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니잖아. 하지만 명대에게 하나하나 지적하며 말하면 말하는 쪽만 힘들고 괴로워지니 사소한 건 그냥 목구멍 속으로 넘기는 게 나아.
-너랑 후거는 친하지만.. 나는 그쪽이랑 전혀 아닌데.
“처음부터 친한 사람이 어디 있어요. 같이 있다 보면 친해지는 거지.”
-아니 그래도 그건 아닌 것 같아. 그래도 학생이고... 데이트는 그냥 단 둘이서 하는 게 어떨까.
“단 둘이서..? 그렇게 제가 좋아요? 나랑 막 단 둘이 있고 싶고?”
-.....너한텐 무슨 말을 못하겠다..
대체 왜 이야기가 그 쪽으로 흐르는 건데? 눈꺼풀 위를 비비고 한탄하듯 대꾸하자 귓가에 닿는 명랑한 웃음소리에 피곤함이 쌓인 몸뚱이가 흐물흐물 녹아내렸지. 눈을 비비던 손 그대로 아래로 내려 입 위를 감쌌어. 커다란 손이 얼굴의 절반을 금세 가리고, 덕분에 솟아 오른 광대뼈와 오르는 입꼬리도 완전히 감춘 그는 조잘조잘 떠들어대는 명대의 음성에 집중했어. 그를 놀리는 것을 멈추고 후거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걱정을 많이 했었다고.
***
퇴원을 하고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후거는 익숙하지만 어딘가 낯설게 느껴지는 집안에 눈시울이 붉어졌어. 다시는 못 보는 줄 알았는데. 소파위에 후거를 앉힌 후에 주방으로 들어간 건화가 우는 걸 볼까봐 재빨리 눈물을 닦아내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소파 위로 올라가 웅크렸어. 쿠션에 얼굴을 파묻고 피곤하다는 시늉을 하는데 잠깐 주방에 들어갔다 나온 건화가 소파에 다가와 후거의 뺨 위에 손바닥을 올려.
“왜 울어.”
“울긴 뭘..”
딱 봐도 우는 꼴인데 절대 인정하지 않으려 해. 그 마음을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아 건화는 그냥 후거의 등을 쓸며 “울지 마.” 하고 나직하게 말했어.
“안 울어. 안 울거든.”
물기에 잔뜩 젖은 목소리를 내면서도 끝까지 울지 않는다고 버텨. 그 사이에 회색 쿠션은 짙은 색깔로 물들어가고 있었어. 점점이 번지는 눈물을 보곤 건화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대신 후거의 뒤통수만 천천히 쓰다듬었어.
퇴원하기 전 장인어른에게 납치범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어.
건화를 납치했던 그 남자가 몇 달간 후거의 주변을 맴돌며 계획을 짜고 있었던 것 같다고. 후거가 자세한 이야기는 안 하려고 해서 아직 좀 더 알아봐야한다고 했지만 거의 확신에 가까웠어. 가까스로 잡은 불을 지른 두 명은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놈들일 뿐이라 좀 시간이 걸릴 것 같긴 하지만.
후거도 이야기를 전해 들었는지 그 후부터 표정이 영 안 좋아. 내내 우울한 기색으로 앉아있더니 집에 오고나선 눈물부터 흘리는 모습에 건화의 속도 답답해졌어. 후거가 자책을 하고 있을 게 분명하거든. 이미 그도 겪었던 일이었지. 왜 모르는 사람을 피하지 않았을까. 왜 선생님을 부르지 않았을까. 후거의 머릿속에도 그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 거야. 왜 모르는 사람을 경계하지 않았을까. 왜 조심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조심한다고 완전히 일어나지 않을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조심하지 않았다한들 잘못한 게 아니지.
“목 안 말라?”
“응..”
“그만 울어. 눈 퉁퉁 붓는다.”
“안 울었다니깐..”
절대 얼굴은 안 보여주면서 끝까지 안 울었다고. 건화는 혀를 차며 “그래. 알았어. 안 울었어.” 하고 대답하곤 후거의 몸을 끌어안았어.
***
다음 날 오전 늦게 일어난 후거를 씻기고 먹이고 입히고 난 후에 상담소로 향했어. 며칠 전 건화가 어머니께 이야기 했다는 말에 뛸 듯이 기뻐한 후거는 같이 상담소에 가자는 말에는 시무룩해졌어. 가야한다는 건 알지만 막상 코앞에 두고 있으니 마음이 영 불편했지. 하지만 늘 피해 다니던 건화가 나서서 상담소에 가자는데 어떻게 못하겠다고 해.
다시 떠올리기 싫은 일을 계속 꺼내야 할까봐 걱정했는데 그것과 달리 상담소에서 상담은 무난하게 이어졌어. 물론 그 사이 눈물이 많은 후거가 몇 번 울기는 했지만. 본인이 겪은 일보단 담담하게 말을 하는 건화 때문에 울었어.
어떻게 용기를 냈냐고 묻는 상담사 선생님에게, 곧 아빠가 될 텐데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하면 태어날 아이에게 아무 것도 가르쳐줄 수 없을 것 같다고 대답한 것에 저도 모르게.
상담소에서 나오고는 바로 산부인과로 출발했어. 퇴원한 다음 날 또 병원에 병원이라니. 이제 하얀 벽에 하얀 가운이 질릴 정도라 불만스런 얼굴로 카운터 앞에 서서 접수하는 건화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지나가는 간호사가 건화를 흘끔흘끔 쳐다보는 것에 기분이 조오금 아주 쪼오금 좋아졌어. 뭘 봐. 내 건데.
하지만 그 살짝 좋아졌던 기분은 다시 수직 하락했어.
“오빠 나 아파아.”
“우리 후순이 많이 아파?”
“응. 응.. 배 아파..”
나 여기 산부인과인줄 알았는데 소아과였어? 누가 혀 짧은 소리를 내? 누구야?
못마땅한 얼굴로 앵앵대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팩 돌아보니 웬 남녀커플이 앉아 진상을 떨어대고 있어. 다 큰 사람이 저렇게 애기 소리 내는데 뭐라고 하기는커녕 옆에서 더 안절부절하는 남자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곤 어깨를 부르르 떨었어.
“왜 그래. 추워?”
“아니.. 아저씨가 여기 앉아. 나 저기 앉을래.”
접수를 마치고 돌아온 건화가 벌벌 떠는 후거에 놀라는데, 후거는 기가 쭉 빠진 얼굴로 엉덩이를 옆으로 밀며 최대한 진상 커플에게서 떨어지는 걸 택했어. 그래봤자 자리 하나 옆으로 옮겼다고 앵앵대는 소리가 안 들릴 리가 없지만.
“아까 오는 길에 배 아프다고 했잖아. 아직도 아파?”
“아니 안 아파.”
“안 아파?”
“난 어른이라 엄살 안 부려.”
“어?”
사실 원래 같았으면 배가 쿡쿡 찔리는 기분이라고 아파 죽겠다고 엄살을 부렸겠지만 옆에서 잉잉앵앵 소리를 들으니 누가 뺨을 후려쳐도 “난 괜찮아!!” 하고 소리쳐야 할 것 같아. 짐짓 근엄한 얼굴을 하고 하나도 안 아파. 하고 정면만 노려보고 있자 건화가 고개를 까딱이며 의아해했어. 정말 괜찮아? 되물어도 후거는 대답도 안하고, 평소 같으면 폰 게임하고 있을 텐데 읽지도 않을 잡지를 꺼내 조용히 들춰보고 있어. 그 모습에 건화는 더 걱정이었지. 아까 상담소 갔다 오고 기분이 안 좋아진 건가. 어떻게 잘 못 된 거 아닐까.
옆에 앉아 후거의 어깨를 주물러주다보니 오른쪽 소파에 앉아있던 커플이 일어나 진료실로 들어갔어. 진료실 문이 닫히는 걸 듣고야 후거가 재미도 없는 잡지에서 눈을 뗐지. 건화한테 흉을 보려고 해도 그러면 유치한 것 같아 아무 말도 못하겠고 다시 잡지를 제 자리에 넣어두고 건화의 어깨에 뺨을 기대려던 순간 간호사가 후거의 이름을 불렀지.
“괜찮아요. 어디 안 좋아서 그러는 게 아니라 이맘 때 쯤 되면 태아가 운동을 해요. 하품도 하고 기지개도 켜고. 발로 뻥뻥 배를 차는 경우도 있는데 사실 태아 입장에선 운동이지만 산모의 입장에선 그게 좀 아프거든요. 심하신 분들은 통증 때문에 못견뎌하시는 분들도 더러 있어요.”
“아직 못 견딜 정도로 아프진 않은데.. 얼마나 아파요?”
“산모에 따라 달라요. 참을만하다는 분들도 있고.. 심하신 분들은 배에 멍이 드는 분들도 있고요.”
“멍....”
아기가 배에서 발로 차서 멍이 들 정도면.. 대체 얼마나 쎄게 찬다는 거야. 리틀 깡패야..?
아까 차타고 병원 오면서 좀 배가 어릿어릿 아파서 설마 무슨 큰 일 나는 건가 걱정했었는데, 그게 아니라면 다행이지만 배에 멍든다는 생각을 하니 또 완전히 다행은 아니야. 어른이니까 엄살 부리면 안 되고 참아야한다고 말 해놓고도 멍든다는 생각을 하니 막막하고 벌써부터 겁이 나. 후거의 표정이 처참하게 빛을 잃어가는 걸 보고 의사가 짧게 웃으며 건화에게 말했어.
“그러니까 남편분이 많이 챙기셔야 해요. 임신하는 게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에요. 산모들한테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데요.”
“네. 그럼 태아가 안 좋다거나, 산모 몸이 안 좋다거나 그런 건 아니란 말이죠?”
“네 다 괜찮습니다. 산모분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기가 발차기해서 잠깐 배에 통증이 느껴진 거니까요. 축구선수 되려나 보네요.”
축구선수 이야기에 건화가 움찔했어. 후거는 아직도 뱃속에 정이의 성별을 몰라. 사실 가르쳐줘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 중인데 퇴원할 때 까지는 그럴 정신이 하나도 없었고, 또 지금은 퇴원한지 24시간도 안 됐으니 여전히 여력이 없어. 나중에 실망할 거 생각하면 걱정인데 후거 스스로가 성별에 대해서 듣지 않으려고 하니까..
“축구선수 별론데.”
역시나 마음에 안 드는 티를 낸 후거는 입을 삐죽대며 의사가 전해주는 팜플렛을 받아왔어. 4~5개월 산모들의 몸의 변화와 해야 할 것들이 적힌 종이를 만지작대며 나왔는데 아까 본 진상커플이 카운터 앞에 서 있어서 윽. 하고 얼굴을 찌푸리곤 건화의 뒤로 몸을 숨겼지. 그러고 보니까 어디서 본 거 같지, 왜? 처음 보는 사람인데. 아는 사람 아닌데.
건화의 어깨 너머로 진상커플을 유심히 보는데, 건화는 멈춰 선 후거가 자기 뒤로 가더니 카운터 앞에 선 두 사람을 노려보기에 눈가를 좁히며 작게 물어.
“왜. 아는 사람이야?”
“아저씨 저 두 사람 알아?”
“모르는데.”
“나도 모르는데 어디서 본 적 있는 것 같아서..”
“중요한 일이야?”
“아니 그냥 진상커플.”
“왜?”
“그냥 그런 게 있어.”
주춤주춤 날을 잔뜩 세운채로 언제 나가나 지켜보다 그 둘이 사라지고 나서야 안도하고 건화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내렸어. 진상 커플인데 왜 저렇게 경계를 해?
“이제 배 안 아파?”
“안 아프다니까 몇 번을 묻는 거야.”
“아플까봐 그러지. 피곤해? 집에 바로 갈까?”
어쩌면 내가 엄살쟁이인 이유는 아저씨가 저 모양으로 과보호 하니까 그런 걸지도 몰라. 모든 걸 곽건화의 탓으로 돌리자 마음에 안도가 왔어. 근데 생각해보니 이것도 철없는 거 아닐까. 좀 전에 상담소에서 어른스러웠던 건화를 떠올리고 방금 제 행동을 생각해보니 자기가 너무 어린애 같은데.. 어휴. 자꾸 생각해서 뭐해 머리만 아파. 그냥 배에 멍만 안 들었으면 좋겠어.
“모르겠어. 집에 갈까...”
“외식이나 할까? 근처에 맛있는 식당 있대.”
“근데 아까 의사선생님이 먹는 거 조심해야한다고 했잖아.”
“웰빙 식당이랬어. 아니면 그냥 재료사서 집에서 할까?”
“귀찮을텐데.. 그냥 사먹을래.”
후거가 집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것 같아서 일부러 더 밖에 있을 생각이었어. 어제 집에 올 때 엘리베이터 앞에서 덜덜 떠는 걸 괜찮다고 달래며 집에 데려왔는데. 후거는 그래도 열심히 제 나름대로 참아내려 했지만 그 일을 겪은 지 며칠이나 지났다고 그게 그렇게 쉽게 극복이 되겠어.
“근데 다리 때문에 집에 가는 게 나으려나.”
“걸을 순 있어.”
“자꾸 걷다가 또 저번처럼 피 날라.”
“그때랑은 다르지.”
입원해 있을 때 상처를 꿰맨 부분이 터져서 후거도 건화도 멘붕이 왔었던 적이 있어. 별 거 안했는데, 진짜 별 거 아니었는데 환자복의 허벅지가 피로 젖어가서 둘 다 엄청 놀랐었지. 때 마침 간호사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둘 다 허벅지 젖어가는 거만 보고 아무것도 못했을 거야.
“걷기 힘든데 집 갈까.”
“싫어. 외식할래. 아저씨가 나 안아들고 다니면 되잖아.”
“아.. 그러네.”
“미쳤나봐.”
그냥 농담 삼아 이야기 한 건데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하고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니 헛웃음만 나와. 아니 날 어떻게 안아 다니려고 해? 미쳤어?
“허벅지 다쳐서 업을 수는 없잖아.”
“집 가자. 그냥.”
저 인간한테 안겨서 식당에 들어가느니 그냥 굶고 말지. 농담과 진담을 전혀 구분하지 못하고 애초에 구분할 생각도 없는 건화의 등을 차 쪽으로 꾸욱 밀어내며 투덜거렸어. 하지만 바로 후회했지. 걸을 수 있긴 하지만 그래도 부축 받아서 걸어야 덜 아프단 말이야. 자기가 밀어놓곤 건화에게 손짓해서 좀 부축해달라고 했어. 그간 살이 더 빠져 뺨이 움푹 패인 건화의 얼굴을 보니 후거도 한숨이 터져 나왔지. 왜 저렇게 살이 빠졌어.
“그렇게 살 빠져서 날 어떻게 안아들 생각을 해?”
“설마 그 힘이 없을까.”
“됐고 그 꿈은 버리세요. 나 좀 부축해줘.”
“모레부턴 다시 출근해야하는데.. 집에 혼자 있지 말고 처가에 가 있는 게 어떨까.”
등을 받쳐서 부축을 하며 주차 된 차 쪽으로 천천히 걸었어. 후거는 처가에 가 있으란 건화의 말에 망설이는 것 같았지. 거기서 먹고 자는 건 싫고, 그러려면 건화가 아침 저녁마다 데려다주고 데리러 오고 그래야하는데 귀찮고 불편하잖아. 하지만 또 집에 혼자 남아 있으려니 그건 싫어. 아직은 좀 무섭거든.
“으음..”
“어머니가 매번 집에 오시는 것 보단 우리가 가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몰라.. 일단 좀 생각해보고.”
“모레까지만 정하면 되니까 천천히 생각해. 지금은 그냥 집에 갈까?”
“집에 가서 잘래.”
“알았어. 잠깐만.”
차에 후거를 기대게 하고 문을 연 뒤에 다리가 아프지 않게 조심스레 후거가 앉는 걸 도와준 후에 운전석으로 넘어갔어. 후거는 닫힌 창문 너머로 평화로운 주변 상가나 인도, 드문드문 지나가는 자동차 따위를 가만히 바라봤지. 구해진지 나흘 째. 아직도 가끔은 컨테이너 박스의 어둠 속에 갇혀 있던 때가 문득 떠올랐어. 아마 그건 죽을 때 까지 계속 남아있을 거야. 다만 그 빈도가 적어질 뿐이지. 지금은 하루에 대여섯 번. 십년 뒤엔 서너달에 한 번.
어제 퇴원하고 건화가 저녁 하러 갔을 때 시어머니께 전화가 왔어. 몸은 괜찮냐, 아픈 데는 없냐. 먹고 싶은 거 있으면 건화나 자기한테 전화해라. 일상적인 안부를 묻던 어머니는 몇 번 뜸을 들이시다 갑자기 고맙다는 말부터 꺼내셨어. 얼마 전에 건화가 내내 감추고 혼자 앓던 이야기를 해줬는데, 아무래도 후거가 도움을 줬으니까 건화도 말을 꺼낼 수 있었던 것 같다고.
“히터 미리 틀어놓을 걸 그랬네.”
차에 올라타 제일 먼저 히터 바람부터 확인하는데, 따뜻한 바람이 나오긴 하지만 아무래도 방금 틀었으니 차 안이 냉한 기운이 남아있는 건 어쩔 수 없어. 창밖을 보며 멍하게 앉은 후거자리의 안전벨트를 매주고, 찬바람 부는 밖에 고작 일이분 있었다고 빨갛게 얼은 후거의 뺨 위에 손등을 대어주며 녹였어. 그제야 창문에서 고개를 돌린 후거는 괜스레 부끄러워 입 끝을 우물거렸지.
“안 그래도 되거든.”
“그냥 내가 해주고 싶어서 그러거든.”
말투를 따라하며 장난치자 가만히 쳐져있던 눈 끝이 빼쪽하게 섰어. 따라 하지 마.
“우리 여행갈까?”
“어? 웬 갑자기 여행.”
“곧 겨울 휴가인데 여행가자. 지금보다 배 더 나오면 여행 가려고 해도 힘들잖아.”
배 위를 토닥이며 말했어. 후거는 으으음. 하고 신음하더니 눈알을 뱅글뱅글 굴렸지. 어디 가? 어디 가지?
“내가 정해볼게. 너한테 정하게 하다간 또 소말리아 가자고 할까 무섭다.”
“아니 그건 농담이었지. 설마 진짜 소말리아 가려고 할까봐.”
신혼여행지로 소말리아이야기 꺼냈던 거 생각하며 웃으니 후거가 창피한 듯 얼굴을 붉히며 건화의 뺨을 밀어냈어. 아저씨 웃지 말고 빨리 운전이나 하시죠.
***
도서관 간다는 지나가는 길고양이도 믿지 않을 변명을 해대며 데이트 준비를 했어. 아성은 한껏 구겨진 표정으로 도서관 가는데 머리에 왁스는 왜 바르는 거냐고 명대에게 물었지.
‘원래 나 같이 잘생긴 사람은 매사에 신중해야해.’
‘그래서 매사에 신중한 녀석이 성적이 그 꼴이야? D가 뭐야?’
‘에이쁠 하나 있잖아. 그럼 됐지.’
죄다 F에 D에 고청명수업 A 하나 빼곤 제일 잘 나온 게 C인데 무슨... 차마 명루와 명경도 명대의 성적에 까지 관여할 수는 없어서 그냥 놔두는 거지.. 저래서 졸업이나 할 수 있을까 막막해.
‘큰 형은 어디 갔어?’
‘골프 치러 가셨어.’
‘왜 안 따라가? 형 파업했어?’
‘이따 갈 거다. 너 정말 도서관 가는 거 맞아?’
‘우리 교수님 머릿속엔 도서관만큼 책이 들어 있을 거야. 그러니까 반은 맞아.’
‘....’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고 한숨 쉬자 명대는 그 한숨소리가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벽에 걸린 거울 속에 얼굴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다 아. 하고 고개를 빼냈지.
‘큰형한텐 나 데이트 하는 거 말하지 마?’
‘너 하는 거 보고.’
‘진짜 말하지 마. 큰형 끼면 골머리 아파.’
‘너만 생각하면 집안 전체가 머리 아프다.’
‘하여튼.’
그간 후거 걱정에 데이트도 못 했는데 오랜만에 하는 거란 말이야. 방해 받을 순 없지. 사실 오늘 후거한테 놀러갈까 했는데 아까 연락하니까 병원 갔다 또 병원 가야한다고 해서 어쩔 수 없었지 뭐. 대신 교수님이 오늘은 시간 텅텅 빈다고 했으니까 교수님 집에서 자고 올 생각으로 가방에 옷가지와 교수님 곰인형도 꾹꾹 구겨 넣었어. 물론 그 가방 속에 책은 단 한권도 없었지.
그러고 나와서 큰 길가에서 청명의 차를 타자마자 보고 싶었다고 목을 끌어안아 당기니 예상대로 고청명은 돌부처라도 된 것 마냥 꼼짝을 못 했어. 명대에게 목을 잡힌 채로 눈만 끔뻑끔뻑 뜨더니 핸들을 쥔 손등에 핏줄이 바짝 섰지.
날씨도 좋고 오늘은 저녁까지 풀로 비어있다고 해서 상해 근교에 있는 유명한 음식점에 가기로 했어. 명대야 워낙 가리는 거 없이 잘 먹어서 아무거나 상관없다고 들떠서 매고 온 가방을 허벅지 위에 올려두고 짐 싸놓은 걸 청명에게 보여줬어. 그러고 보니 가출이라도 하는 것 마냥 백팩이 빵빵해서 뭘 그렇게 들고 왔냐고 물으니 정말 별게 다 들어가 있었지. 나이트가운. 썬크림. 옷을 세 벌이나 구겨 넣어놓고 제일 밑에는 곰인형까지 들어있었어. 입이 잔뜩 눌린 회색 곰인형을 흘끗 본 청명이 눈을 크게 떠.
“그건 왜 가져 왔어?”
“인사해요. 얘는 고청명이에요. 청명아 인사해.”
“....”
땡땡이 핑크 리본을 목에 두른 입이 눌린 고청명의 팔을 잡아 흔들어 고교수에게 인사 시켰어. 회색 곰인형 고청명을 쳐다보는 고교수의 표정은 전혀 좋지 못했지만 어쨌든 곰인형 고청명은 인사성이 바르니까.
한번 인사시킨 명대는 다시 들어가라고 가방 속에 구겨 넣고 그 위에 옷가지들을 다시 우겨넣는데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앞을 보며 운전에 집중한 청명은 괜히 기분이 이상했지. 고청명이라며. 근데 대우가 왜 저래?
명대가 게임하느라 조용해지자 차 안에도 다시 평화가 찾아왔어. 아니, 평화가 찾아온 줄 알았지. 목적지에 가까워지는 와중에 청명은 계속해서 사이드미러와 룸미러를 흘끗흘끗 보더니 코끝을 찡그리며 네비를 확인하곤 입을 길게 다물었다 열었어.
“누가 따라오는 거 같은데.”
“누가요?”
게임 화면을 내려다보던 명대는 따라온다는 청명의 말에 불길함을 느끼고 몸을 뒤로 돌려 뒤 따라 붙은 차를 보고는, 역시나 후면을 비추고 있는 네비게이션 화면을 봐.
“뭐야 저거..”
청명의 차 바로 뒤를 바짝 따라붙은 까만 자동차. 뭐야 저거? 다시 한 번 혼잣말을 중얼거리자마자 사고가 났어. 신호가 들어서 청명이 차를 멈추자마자 뒷 차가 퍼억- 청명의 차를 박아 버렸거든. 세게 박은 건 아니고 바로 앞이 신호등이라 워낙 느리게 달리고 있었으니 큰 사고가 난 건 아니지만 차체가 약하게 앞뒤로 흔들리고 운전석에 앉은 청명은 그냥 눈을 감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푸욱 떨어뜨렸지. 미약하게 진동이 계속 느껴지는 차체 안에서 다급한 손놀림으로 안전벨트를 풀어낸 명대는 부글부글 이는 표정으로 뒷목을 붙잡고 일어서더니 차문을 열고 나가며 소리쳤어.
“운전 발로 해?!!!!!!!!!!”
“발로 했다. 넌 손으로 브레이크 누르냐.”
역시나 청명의 차를 박은 뒷차에서 내리는 사람은 아성이야. 내 저럴 줄 알았지!
“형은 발로 핸들 잡나봐?!”
“너도 발로 공부하니까 내가 발로 핸들 잡아도 괜찮잖아.”
“아악!!!!! 형!!!”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솟는 명대와 달리 아성은 차분하기 그지없어. 우아한 동작으로 손에 낀 가죽장갑을 벗어내더니 조금 흐트러진 머리를 뒤로 넘기며 눈을 깜빡였지. 보아하니 나 나올 때 따라 나온 것 같은데 큰형 없다고 안심 하는 게 아니었어. 왜 데이트 한다고 알려줬을까. 대체 어떻게 된 게 연애질에 마음 편할 날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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