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결 2016. 9. 25. 21:25
짧지 않은 지난 시간 함께 해주시고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왜 내 데이트에 방해질이야?!”
“조용히 좀 말해라. 나 아직 귀 안 먹었어.”
“형이 지금 내가 조용할 수 없게 하잖아!”
“그리고 형님 차 파손시켰으니까 수리비 청구할 거야.”
기가 막히지. 아성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수리비 청구할거라고 휴대폰을 꺼내들어. 수리비 청구를 해야 하는 쪽이 어딘데?
“어이가 없네. 우리가 쳤어? 형이 쳤잖아?”
“왜 내가 치고 싶은 기분이 들 때 그 앞에 있었는데.”
“미친.”
“말조심 하라니까.”
와 이 형은 마주보고도 코 베어갈 사람이란 거 알았지만 이렇게 안하무인으로 굴 줄은 몰랐네. 치고 싶을 때 왜 앞에 있었냐니.. 이러니까 큰 형이 작은형을 안 때리는 구나. 한 대 때리다간 세 대 얻어맞게 생겼네.
명대가 얼이 빠져 넋을 놓고 있을 때, 차 안에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나온 청명이 아성에게 인사했어. 애초에 뒤에서 차가 계속 따라올 때부터 눈치 챘지. 명대의 형들일 거라고.
“안녕하세요, 둘째형님.”
“예. 안녕하세요. 큰 형님 차가 다쳐서 그런데 수리비 청구하겠습니다. 영수증 찍어서 교수님 번호로 메시지 보내놓으면 됩니까?”
“.....죄송하지만 제가 친 게 아닌데요.”
마음의 준비를 하긴 했지만 보자마자 내가 널 쳐서 내 차가 다쳤으니 너에게 수리비를 청구하겠다는 소리를 들을 줄은 몰라 어안이 벙벙했어. 옆에서 명대가 속 터져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지.
“거기에 있으셨잖아요.”
순간 청명은 나름대로 경제학박사에 경제과 교수로서 이 상황을 어떻게 타계할지 고민이었으나, 지금 고청명은 경제학박사도 교수도 아니고 그냥 명대의 나이차 많이 나는 남자친구 일 뿐이지. 경제학박사가 아니라 경제학신이 와도 여기선 안 돼. 못 이겨.
“롤스로이스 수리비를 어디다 청구하겠다는 거야.”
“너한테 에이플러스 준 교수님한테.”
“수리비 우리 교수님 월급으로 택도 없어!”
“.....”
본인이 적게 번다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물론 주변 환경과 비교하면 많이 버는 것도 전혀 아니긴 하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저 소리를 들으니까 욱하고 자존심이 상해. 그래서 대뜸 일을 저질렀지.
“아니요, 제가 내겠습니다.”
“내긴 뭘 내요!”
“잘 생각하셨어요. 수리비는 이따 문자로 청구하겠습니다.”
“형 진짜 할 거야?”
“내가 돈 앞에서 빼는 거 봤어?”
간단명료한 말에 할 말이 없다. 맞네. 없네...
아니 애초에 교수님이 수리비를 지불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낸다는 것도 웃기고 달라는 것도 웃기고. 형은 큰형 데리러 간다더니 왜 날 따라와?
***
“배 안고파? 낮부터 아무것도 안 먹었는데.”
“움직이는 거 귀찮아...”
침대에 누워 눈만 깜빡깜빡. 여름엔 더워서 귀찮고 겨울엔 추워서 귀찮아.
사실 외풍이 심했던 본가에 비하면 이 집은 굳이 담요 두르고 다니지 않아도 될 정도로 따뜻한데 그냥 겨울이란 생각을 하면 몸이 추워지는 것 같아.
모로 누워 이불을 끝까지 덮고 눈만 끔뻑였어. 자고 싶은데 졸음은 오는데 영 잠에 들 수가 없네.
“자고 싶은데 잠이 안 와..”
“뭐라도 먹고 자.”
“먹고 바로 누우면 살찌거든.”
“좀 찌면 어때.”
“웃기시네.. 자긴 엄청 관리하면서.”
낮에 아이스크림 한통 먹고 저녁 굶고 운동하는 사람이 그런 말하면 하나도 위로 안 돼.
“어쨌든 굶으면 안 좋아. 누워있어. 토스트라도 먹자.”
“알았어..”
사실 배는 쪼금 고픈데 침대에서 일어나기 싫어서 참고 있었어. 이러다 나 나이 먹으면 진짜 어떡하지? 손 하나 꼼짝 못하는 거 아냐?
이불 위로 드러난 동그란 뺨에 키스한 건화가 안방을 나가면서 문은 활짝 열어뒀어. 후거가 딱히 그렇게 해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본인이 겪어서 아는 것 같아. 그러고 보면 어제 집에 오자마자 온 방의 문을 다 열어놓고 불도 다 켜놨지. 이층도 그렇고 심지어 화장실까지도. 그 땐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그렇네.
베개 위로 뺨을 비비고 숨을 깊게 내쉬었다 들이마셔. 아저씨 어릴 때 그랬나보다. 꺼진 방안이 무섭고, 닫힌 방문이 무섭고.
이제 봉긋한 티가 많이 나는 배 위를 쓰다듬어. 아까 병원 갔을 때 발차기해서 멍드는 경우도 있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후거의 뱃속에 있는 정이는 꽤 얌전한지 오전에 발차기 하고는 더 이상 안 하나봐. 앞으로도 그랬으면 좋겠어. 아기가 발 차기해서 배에 멍드는 건 좀 많이 싫을 것 같거든.. 배에 멍들면 아파서 어떡해.
정이는 배 때리면 안 돼.. 권투선수도 안 되고 축구 선수도 안 돼. 으음, 그리고...
서랍에 넣어둔 머리핀 잘 있나 보고 싶은데 꼼짝도 하기 싫어. 요즘엔 배 때문에 바로 누워 자는 것도 어딘가 좀 불편하고.
가느다란 손을 티셔츠 안에 넣어 맨살을 만지작만지작. 흘끗 문 너머를 보는데 주방이랑 완전 정면이 아니라 잘 안보여. 냉장고 문 열리고 닫히는 소리는 나는데. 흐으음.. 정아. 아빠 멋있지. 아빠의 얼굴이 아니었다면 엄마는 아빠한테 반하지 않았을 거야...
정아 엄마 배 때리면 안 돼. 엄마 배는 소중해 아픈 건 싫어. 근데 너 낳을 땐 어떡하지..? 아파서 죽으면 어떡하지...? 안 겪어봐도 그게 엄청 아프다는 건 누구나 아는 자명한 사실인데... 드라마나 영화에서 비명 지르면서 애 낳는 거 상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배도 아프고... 남자는 그렇게 안 낳고 수술한다지만 배 찢을 때 아플.. 나중에 꿰맬 때도.. 아. 산 넘어 산이다. 그래도 수술하면 마취하니까 좀 덜 아프지 않을까. 이런저런 걱정을 시작하니 끝도 없어. 이것도 아플 것 같고 저것도 아플 것 같고. 애초에 칼에 좀 찔린 허벅지도 아파서 잘 안 걷는데 배를... 하.......
수술 하는 생각은 그만 해야겠어. 벌써부터 그 걱정을 할 필요는 없잖아. 아직 오개월 정도 남았으니까.. 여름이랑 봄 사이에 낳겠다. 여름에 안 낳는 게 다행이다. 여름엔 너무 더운데 배도 이마안큼 나오면 정말 살기 싫을 거야.
몽롱한 얼굴로 고개만 살짝 돌려 천장을 올려다 봐. 따가운 형광등 불빛을 피해서 천장의 벽지를 뚫어져라 쳐다봤지. 그러고 있으니 몸에 힘도 빠지고 노곤노곤 해지고.. 겨울은 추워서 싫은데 이불 속에 파묻혀있는 순간이 좋아.
“후거, 자?”
그 사이 건화가 벌서 토스트를 다 만들었는지 쟁반을 들고 안방으로 들어왔어. 두유를 담은 유리잔과 하얀 접시 위에 치즈가 녹아 흘러내리는 토스트가 놓여있었지. 이제 야채는 꼴도 보기 싫다고 하는 후거의 식성에 맞춰 야채는 딱 볶은 양파 하나만 넣은 걸로.
잠은 자고 있지 않지만 손마디 꼼짝 하는 것도 싫어서 들었으면서도 가만히 있으니 가까이 다가온 건화가 협탁에 쟁반을 올리곤 후거의 얼굴을 내려다 봐. 눈을 분명 떠 있는데. 혹시나 눈 뜨고 자는 기이한 현상일까봐 눈 위로 손을 흔들어보이자 후거가 눈을 감았다 떠.
“뭐 해?”
“으응?”
“뭐 해? 가만히 누워서? 대답도 안 하고.”
안자고 있는 걸 확인하곤 침대 아래쪽에 있는 베드 테이블을 끌어와 그 위에 쟁반을 옮기며 물었어. 후거는 느릿느릿 대답하지.
“천장 벽지 보고 있어.”
“왜? 곰팡이 폈어? 아니면 벌레?”
“아니. 벽지 무늬가 안 맞아서 저거 맞추는 상상하고 있어.”
그러나 건화가 생각했던 지극히 평범하고 있을만한 생활적인 문제가 아니라, 단순히 도배한 벽지가 패턴이 어긋나서 보고 있었단 말은 정말 상상 밖의 이야기였지. 진짜 상상 밖으로 귀여워 죽겠네.
숨 막히는 사랑스러움에 대답마저 잃은 건화가 귀 끝 까지 빨갛게 물들더니 이내 누운 후거를 세게 끌어안고 바들바들 몸을 떨었어. 아플까봐 어깨는 잡지 못하고 허공에 붕 뜬 두 손이 힘이 꽈악 들어가 주먹을 쥐며 더 세게 끌어안고 싶은 마음을 꾹꾹 내리 누르는데, 후거는 이 인간이 갑자기 왜 이러나 싶어. 천장 무늬 맞추고 싶다는 말이 어디가 이렇게 좋아서 난리인 건데. 하여튼 내가 숨만 쉬어도 좋아 죽지.
“내가 그렇게 좋아?”
“얼마나 좋은지 말해주면 닭살 돋는다고 싫어할 텐데. 말 해줘?”
“아니, 하지 마.”
곽건화가 저렇게 말 할 정도면 어마어마하게 싫을 거야. 고개를 가로저으며 싫다고 하는데도 건화는 듣지 못한 것처럼 후거의 귓가에 대고 속닥속닥 어디가 얼마나 좋은지 이야기하는데 영 간지럽고 듣기 힘드네. 일단 너무 가까이에 대고 작게 이야기해서 목소리보단 귀에 닿는 숨결이 간지러워서 버티질 못하겠어. 끌어안긴 채라 도망도 못 가겠고. 결국 그 상태로 피해보겠다며 목을 길게 빼고 듣지 않으려 노력하자 귓불에 닿은 입술은 길게 드러난 목덜미에 향했어. 꾸욱 느리게 입술 도장을 찍고 슬쩍 핥으니 온 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것 같아. 좀 요상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으음..”
“싫어?”
“싫진 않은데..”
뭔가 기분이 이상해. 임신한 거 알기 전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했는데. 요즘 들어서 안 해서 그런가. 괜히 낯가리고 머쓱한데. 대답하는 것조차 조금 창피한 기분이 들어서 두꺼운 이불 위로 얼굴을 가렸어. 건화는 목덜미가 사라져 뻘겋게 달아오른 귓불을 혀끝을 내밀어 핥고는 다시 물어.
“하지 말까?”
“아니이..”
실은 건화도 너무 성급한가 싶어. 아직 다리도 덜 나았고.. 며칠이나 지났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다 나을 때 까지 기다리면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고. 낮의 상담원이 부부니까 관계를 자주 가지는 것도 치료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실은 다 변명이지.
“다리 아플 텐데.”
“안 아프게 하면 되잖아.”
“방금 그 말 엄청 야하다.”
“사상이 잘못 돼서 그래.”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며 두툼한 이불을 들어 올려 그 안으로 들어갔어. 살짝 엎드려있는 후거를 바로 눕히고 배가 불편하지 않느냐 물으며 바지부터 아래로 내렸지. 널널한 트레이닝복 바지를 아래로 잡아당기는 순간 거실 인터폰에서 딩동- 딩동 너무 형식적인 벨이 울려 안방의 침대 까지 닿았어. 덩달아 옷을 벗기는 곽건화의 손도 멈칫 굳어.
“...누구지?”
“지금 몇 시야?”
“여덟시? 이 시간에 올 사람 없을 텐데.”
“명대 오기로 했어.”
“명대?”
“응. 아까 우리 집으로 온다고 했는데.”
명대라고? 자연스레 열린 문 밖으로 눈을 돌리는데 다시 벨이 울려. 명대.. 왜 이 시간에.. 아니 명대가 아닐 수도 있어. 경비원 아저씨라던가.. 지금 오랜만에 불붙었는데... 경비원 아저씨면 할 말만 끝내고 다시 돌아오면... 그러나 건화가 헛된 희망을 품고 있다는 걸 알려주려는지, 그 생각을 끝마치자마자 벨이 쉬지 않고 울렸어. 연속으로 계속해서 눌러서 벨소리가 채 다 나오기도 전에 또 다른 벨이 울리고, 딩동, 딩동, 딩,-ㄷ,-ㄷ...
“..명대 맞네.”
누군지 고민할 것도 없이 벨소리부터 저렇게 자기주장을 펼치는데 아닐 수가. 허탈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힘없이 침대에서 일어선 건화는 누운 후거를 일으켜 세워주며 쓴웃음을 지었어.
“내가 문 열게.”
어깨가 굽은 채로 터덜터덜 걷는 뒷모습을 보니 저녁에 온다고 할 때 오지 말라고 할 걸 그랬나 쪼오끔 후회도 돼. 근데 명대가 할 말 있다고 무조건 오늘 봐야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오지 말라고 해. 그리고 후회해봤자 이미 벨은 미친 듯이 눌리고 안 열어주면 문 부실 기세인걸.
***
“너 괜찮아?”
“괜찮은데.”
“너 사라졌다 그래서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설마..”
“야. 얼굴 한 번 못 본 사람이 납치돼도 걱정은 해.”
명대새끼가 걱정했다니까 좀 오글거리는 것 같아 정색하니 뒤에 나오는 답변이 명대놈 답네. 뭐? 모르는 사람이 납치돼도 걱정은 해?
“이게 진짜.”
“네가 먼저 시비 걸었잖아.”
“그게 뭐가 시비야?”
“됐고 끌어안고 있는 그건 뭐야? 벌써 애 낳았어?”
“미친놈아 아니거든.”
명대 왔다고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있는데 아까부터 다리에 대고 있던 뜨거운 물주머니를 꺼내서 품에 안고 있는 걸 보고 묻는 거야. 쟤는 정말 볼수록 신기하다. 어떻게 저런 상상을 할 수 있을까?
“근데 너 오늘 꼭 당장 봐야한다며. 왜? 가방은 무슨.. 너 설마 가출했어?”
“가출 안 해. 집 나가면 고생이야.”
이미 가출 해봐서 알아. 가출하고 한 삼일 호텔에서 버티다가 카드 끊기고 형들 들이닥쳐서 바로 집으로 들어왔지. 호텔 스위트룸에서 자고 밥도 삼시세끼 호텔에서 해결했으면서 무슨 고생이라는 건지. 그리고 중요한건 명대가 묵은 그 호텔이 고청명 누나가 오너인 호텔이었어. 그러니 형들이 발견해냈지.
“그럼 가방이 왜 그렇게 빵빵해?”
“안에 고청명 들었어.”
“.....뭐..?”
등에 매고 있던 백팩을 세상 무겁다는 듯 끙끙대며 바닥에 조심스레 내리는데, 순간 후거는 배에 대고 있던 따뜻한 물주머니를 가득 끌어안고 아랫입술을 떨었어. 아저, 아저씨 어디 갔지.. 내 앞에 미친놈이...
후거가 대답을 못하고 멍하게 보기만 하자 연기하던 명대는 설마 얘가 정말 믿는 건가 싶어 얼굴을 찌푸려. 바보야?
“진짜 믿어?”
“너라면 가능 할 것 같은데..”
“내가 아무리 미쳐도 진짜.. 고청명 곰돌이 들었어. 고청명 곰돌이.”
“놀래라.. 그걸 왜 들고 다녀?”
“고청명한테 고청명 곰인형 보여줬지.”
“뭐라셔?”
“별로 안 좋아하던데.”
왜 안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아.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여전히 베드 테이블에 오른 토스트를 들어 한입 물었어. 아직 저녁 안 먹었어? 명대가 어쩐지 다정한 말투로 물어서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것 같아.
“그래서 지금 먹잖아.”
“야. 있잖아.”
“왜?”
쟤가 야. 있잖아. 하고 물으면 꼭 교수님 이야기야. 하긴 명대랑 하는 이야기에 80%는 교수님 이야기긴 해. 명대 진짜 교수님이랑 안 사귀면 지금 쯤 뭐하고 있었을까. 저러는데 교수님이 명대한테 안 꼬일 수가 없긴 하지만..
등받이가 없는 의자가 불편한지 자세를 고쳐 앉던 명대는 말하다 말고 일어서서는 저기 방 끝에 테이블 옆에 있는 의자를 질질 끌고 왔어. 그러더니 드디어 등을 편하게 받치고는 발을 침대 위에 올리기에 후거가 사나운 눈을 하며 그 발을 쳐냈지. 치사하게. 내 발 깨끗하거든. 꺼져.
“하여튼 뭐?”
“아. 오늘 교수님이랑 데이트 했는데.”
“자랑 할 거면 꺼져.”
“자랑이 아니라.. 형이 따라온 거야. 작은형이.”
“너네 형이?”
“그렇다니까. 아니 우리 데이트하러 가는데 자꾸 차가 따라와서 봤더니 큰 형 차인 거야. 그리고 더 기가 막힌 건 그러고 형이 교수님 차 뒤에서 쳤어.”
“....”
왜인지 모르게 곽건화가 생각나네. 엠티 따라왔었지. 그 때 진짜 기가 막혀서 말도 제대로 안 나왔는데 명대가 그 기분이었을까.
근데 형들이 그러는 건 좀 심하다. 쟤네 가족들도 보면 되게 특이해... 이상해..
“그리고는 교수님더러 수리비를 내라잖아.”
“너희 형이 교수님 차 쳤다며?”
“그러니까 내가 미친다는 거지. 그리고 그 다음 형 따돌리느라 삼십분도 안 될 거리를 한 시간 빙빙 돌아서 레스토랑까지 갔어. 근데도 어떻게 따라오더라.”
“....”
가만히 듣고 보니.. 명대가 전에 교수님 스토킹 하던 거 다 형들한테 배운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어. 그러고 보면 후거가 점장한테 성희롱 당할 때도 어디서 형들이 사줬다고 했나.. 줬다고 했나 전기 충격기 가져와서 점장 기절시켰잖아. 되게 아무렇지도 않게 장난치는 것 마냥.. 나는 무서워서 기절 할 뻔 했는데. 대체 쟤네 형들이 어떻게 키웠길래.. 애가 겁이 하나도 없어.
근데 명대네 형들 좀 무섭던데. 교수님 안전한 거야? 쟤 교수님 버리고 우리 집 와 있어도 돼?
아랑곳하지 않은 명대는 편한 자세가 되어 여기 오기 전 까지 있었던 일을 모두 후거에게 낱낱이 보고했어. 듣고 보니 후거의 의문이 확신이 됐지. 쟤 스토커짓 형들한테 배운 거야.
***
아성을 따돌리기 위해 이리저리 알지도 못하는 길로 접어들었어. 어느 순간 아성이 사라졌지. 다행이었으나 원래 목적이었던 레스토랑과는 반대로 멀어지고 있어서 아쉽지만 예약을 취소하고 상해 시내로 접어들었어. 명대가 마침 이 근처에 잘 하는 꽃게 음식점이 있대서 그 쪽으로 가기로 했어. 때마침 자리도 꽤 남아있었고, 점심을 하려고 했으나 식당에 도착하니 이미 세시라 애매한 시간이긴 했어.
“점심은 제가 살게요.”
“학생이 무슨 돈이 있다고.”
“저 용돈 많이 받아요. 오늘 아침에도 누나가 주고 갔는데.”
아마 지금 교수님 보단 더 많을 걸요. 이어진 명대의 말에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어. 사실이니까.. 롤스로이스 수리비 댈 거 생각하면 아찔하긴 하지. 지금 와서도 조금 후회인게 왜 거기에 말려들어서 낸다고 했을까. 본인 차 수리비도 대야하는데.
“그래도 내가 살게.
“이런데서 자존심 부리는 거 아니라고 배웠어요.”
“자존심 세우는 게 아니라 선생이 학생한테 얻어먹는 게 어디 있어.”
“그럼 얻어먹는다 생각하지 말고 이따 밤에 화끈하게 해주던가.”
에피타이저로 나온 설채를 입안에 넣으며 웃자 청명은 여전히 명대의 화법이 익숙해지지 않는지 투명한 유리만을 손가락으로 매만지며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어.
“오늘은 집에 가서 자."
“교수님 집에서 자라고요? 알았어요!”
“아니...”
그 집이 아니라 다른 집. 하지만 알면서도 모르는 척 대꾸할 걸 아니 따로 더 이야기는 하지 않았어. 애초에 명대가 가출이라도 하는 것 마냥 한 짐을 들고 왔을 때부터 호락호락 집에 들어가지 않을 거란 건 알고 있었지만 작은 형님이 데이트에 따라오기 까지 했는데 집에 보내지 않는 건 좀 고청명 교수의 양심에 찔렸지. 하긴.. 형님들 눈에 자기가 얼마나 도둑놈 같을까. 열두살차이..
“우리 이거 먹고 이따 칵테일 마시러 가요.”
“칵테일 마시고 집에 데려다줄게.”
“당연하죠. 교수님 집으로 갈 건데.”
“명대. 오늘은 집에 가자.”
“싫어요. 교수님 곰돌이도 가져왔는데 오늘 집에 가면 안 돼요. 고청명 곰돌이한테 교수님 집 보여줘야 하는데.”
“그건 나중에.”
“쟤 덩치 커서 자주 못 들고 와요!”
그래 보여. 지금도 청명의 차 뒷좌석에 자리 잡은 배낭 속에 구겨져있으니까. 그렇게 소중하면 좀 대우를 해주지..
명대가 한창 투덜투덜 댈 때 서버가 두 번째 요리를 가져왔어. 맑은 게살 스프를 수저로 떠먹으며 여긴 맛있는데 끝 까지 먹고 나면 게는 한 달간 안 먹어도 될 것 같단 명대의 말에 픽 웃으며 자연스레 음식점 안을 훑어봤어. 별 의미 없는 행동이었지. 조용한 분위기에서 대화나 하려고 부른 건데 예기치 않은 사고로 왁자지껄한 곳에 오긴 했지만. 명대 말대로 맛있으니 나쁘진 않아. 나쁘진...
나쁘진 않다고 속으로 중얼거릴 때 쯤. 청명의 기다란 속눈썹 아래 눈동자가 무언가를 발견했어. 그들이 앉은 테이블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원탁에 앉은 명대의 두 형님. 그 들은 명대와 청명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진지한 얼굴로 마주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명대의 형님들과 우-연-히 이곳에서 만나게 됐을리가 전혀 없다는 걸 알아. 분명 우연이 아니라 따라 온 거겠지. 맙소사.
“왜요? 왜..”
스프를 호로록 마시며 배고파 죽겠는데 스프나 준다고 입을 삐죽이다보니 교수님이 한 쪽을 쳐다보고 있어서 의아한 마음에 명대도 그 방향을 따라봤지. 그리고 곧 명대의 두 눈에도 커다란 이채가 서려.
“와, 미친.”
이거 진짜 스토커로 신고 해야 하는 거 아냐? 명대가 명루와 아성이 멀쩡하게 딴 테이블에 앉아있는 걸 보고 놀라 몸을 일으키자 얼룩진 콘크리트 바닥에 나무의자가 미끄러지는 소리가 시끄러운 대화소리 사이를 파고들었어. 일에 관련 된 이야기라도 하는 듯 사뭇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던 두 명가의 형들의 시선이 명대에게 닿았지. 그리곤 명루가 밝게 웃으며 명대에게 손을 흔드는 순간 뛰쳐나가려던 명대를 청명이 붙잡았어.
“뭐 하려고?!”
“작은 형이 큰 형까지 달고 또 따라왔잖아요!”
“우연이겠지.”
분명 좀 전에 본인이 무조건 우연이 아닐 거라 말 했으면서도 입 밖으론 명대를 달래려 '우연'타령을 했어. 물론 명대가 더 잘 알아. 저 형들이 우연으로 여기 올 리가 없다고. 그러고 보니까 아까 종업원이 명대 이름 맞냐고 묻던데 설마...! 쳐진 눈을 흘겨 세우며 눈을 뜬 명대는 사방을 휙휙 저어 보다 이를 갈았어. 그렇다고 형들이 저기에 있다고 우리가 나가기엔 너무 손해보고 지는 기분이야. 창가에 앉은 명루와 아성이 웃는 낯으로 손을 흔들며 명대에게 이리 와보라고 하는데, 명대는 거기다 대고 손가락 욕을 보이곤 다시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지. 분명 오분 전만해도 교수님이랑 마주 앉아 밥 먹는다고 얼굴에 해사하게 꽃이 폈는지 불과 몇 분 만에 해사하던 얼굴이 찌들은 듯 어두운 안색을 하고 있어.
“완전 최악이야...”
“최악까진 아니야. 그래도 바로 옆자린 아니잖아.”
“바로 옆에 자리가 없어서 저기 앉았을 게 분명해요.”
서버가 이번엔 배가 부를만한 볶음밥을 내줘도 명대의 표정은 밝아질 기미가 안보였지. 저기에 앉아있을 형을 생각하면 당장이라도 테이블을 뒤엎고 싶었지만 그러면 교수님이 싫어 할테니 충동을 억눌렀어. 정말 교수님만 없었다면 앉아있는 테이블은 고사하고 눈앞에 보이는 건 다 박살 낼 자신이 있었지.
“하아..”
포크로 게 알과 게살이 버무려진 쌀알을 콕콕 찌르고 한숨을 푹 내쉬는 걸 보니 정말 명대답지 않은 행동들이었어. 밥을 눈앞에 두고 깨작거리거나, 안 먹고 한숨만 푹푹 내쉰다니. 명대가 저렇게까지 스트레스 받는 걸 보니 괜히 그가 미안해져 본인도 모르게 명대의 머리를 쓸어 넘기려 손을 뻗었어. 그런데 갑자기 부르지도 않은 서버가 다가와서 더 필요한 건 없냐 물어 당황했지.
“아니요. 괜찮습니다.”
“물이 너무 뜨겁진 않으신가요?”
“예..? 찬물이던데...”
“아. 예.. 알겠습니다.”
그 덕에 청명의 손가락이 명대의 머리칼에 닿기도 전에 거둬졌어. 찬물이 뜨겁지 않냐 묻는 종업원이 이상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그 땐 그게 잘못된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었지.
"교수님은 어떻게 됐어요? 이러다 나중에 교수님 가족들도 우리 따라다니는 거 아니에요?"
"그럴 시간도 없으셔."
"우리 형들도 맨날 일 간다고 아침부터 출근하는데 왜 따라오는 거지?"
형들 자리를 휙 노려보고 재빨리 고개를 팩 돌리곤 두세젓가락 밖에 안 나오는 발라진 게살에 툴툴댔어. 좀 전에는 형들 보니 입맛이 없다더니.
젓가락을 놀릴 것도 없이 수저로 한번 퍼먹고 만 명대는 다음 요리가 나오기 까지 지루한 얼굴로 턱을 괸 채 청명을 가만히 바라봤지. 식당안의 조명이 약해서 그런지 안경을 쓰고 있는데 그 모습도 좀 좋아. 안경 자주 쓰는 건 아닌데 가끔 집중해서 공부할 때나 영화관에서는 안경을 쓰더라고. 안경 안 쓴 교수님은 엄청 잘생기고 귀여운데 안경 쓴 교수님은 섹시해. 이따 밤에 안경 쓰고 하자고 하면... 몽롱하게 잠겨 야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들켰는지 청명이 명대의 미간 사이를 손가락으로 누르며 웃었어. 밥이나 먹어. 싫어요. 다른 거 먹고 싶은데.
미간 사이에 닿은 청명의 손가락을 잡아내려 검지를 이로 약하게 깨물며 짓궂게 웃자 그도 반쯤 포기한 듯 따라 웃었지. 내 거 먹어. 하고는 자신은 손도 대지 않은 접시를 내미는데 문제가 또 다시 부르지도 않은 종업원이 가까이 와서 이미 가득 담긴 유리컵 위로 물이 넘쳐흐를 정도로 부어버리는 거야. 이번엔 명대도 황당했지. 왜 이래?
그러나 테이블 위에 물이 흐르도록 내버려둔 종업원이 유유히 사라지는 뒷모습을 사납게 노려보던 명대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 하더니 다시 저 쪽에 앉은 형들을 노려봤어.
“형들 짓이 분명해.”
“설마.”
“우리 형들 은근히 치사하고 유치해요. 분명하다니까.”
형들이 명대와 눈도 안 마주치는 거 보면 분명해. 으득으득 이를 갈고 싶었지만 나름대로 예뻐 보이고만 싶은 교수님 앞에 있으니 그러진 못하고 입술만 꾹 깨물었어. 교수님이 티슈 뽑아서 테이블 위에 닦는 거 싫어. 교수님 손에 물 묻히기 싫다니까! 지금 형들이 속으로 얼마나 좋아할지 눈에 훤하니 더 배알이 꼴리지. 갈등과 갈등에 쌓인 명대는 이내 마음을 정하곤 자리에서 일어났어. 청명의 시선도 따라 올라가.
“잠깐만요.”
“그냥 앉아.”
“괜찮아요. 그냥 형보고 밥 사달라고만 할 거니까.”
“그건..”
“어차피 교수님이 수리비 대주는데 이 정돈 사줘야지.”
롤스로이스 수리비가 얼만데. 아니 애초에 그것도 요만큼 요오만큼 찍혔던데 쪼잔하 게 수리비를 달라고 하고 말이야. 생각해보니 쪼잔한 게 아니라 미친 거네. 자기가 한 건데..
영 내켜하지 않는 청명을 뒤로하고 탁자 위의 티슈 하나를 들어 입가를 문질러 닦으며 형들이 앉은 테이블로 다가갔어. 뻔히 명대가 오는 걸 알면서도 일부러 고개를 돌리지 않고 이따 집에 들어가서 누가 먼저 잠드는지 따위의 시답잖은 내기를 하고 있어. 이윽고 명대가 코앞에 서서 손에 든 티슈를 꽈악 구기며 형들을 따갑게 노려보자 명루가 연기를 시작했지.
“명대 너 여기 있었어?”
“재미없어.”
“맛이 없어가 아니라 재미가 없다고?”
“왜 따라와?”
“따라오다니. 그냥 나도 여기서 식사하고 싶어서 왔는데.”
“그래. 형님이 먹고 싶다고 해서 왔는데 뭘 따라와. 금시초문이네.”
뻔뻔한 두 형들의 태도에 꾹 다물린 입가가 움찔움찔 떨려. 명대는 속으로 예쁘고 귀여운 것들을 생각하려 노력했어. 화내지 않기로.. 교수님이 저기서 보고 있으니까 화 안내기로.. 명대 방 옆에 자리 잡은 후궁 거처에 수많은 후궁들과.. 곰돌이1 교수님 곰돌이2 교수님 곰돌이....
“하. 진짜.”
“왜? 아. 너 고교수랑 여기 왔구나.”
“하... 형 한 대만 때려도 돼?”
“형을 때리면 어떡해, 이 놈아.”
근데 아무리 참으려 해도 안 참아지잖아. 연기도 더럽게 못하네. 얼굴은 싱글벙글해놓고 “어, 명대 여기 있었니?” 하고 놀란 척 해봤자 하나도 그렇게 안 보여. 저러니까 더 복장이 터지는 것 같아 속앓이만 하다 답답한 듯 가슴을 치고는 형들 테이블을 내려다보는데 여기서 제일 비싼 코스에 비싼 술을 주문해놨네. 두 형은 명대의 시선이 어디에 내려앉은지 알고는 기껍게 웃으며 물어.
“먹고 싶어? 먹을래?”
명루가 제 옆자리를 두드리며 묻는 말에 칼같이 고개를 저은 후 가늘게 눈을 뜨고 어떻게 해야 복수를 할 수 있을지 고민했어. 뭘 하는 게 좋을까. 아무리 되짚어 봐도 작은형이 우리 교수님한테 수리비 청구한 건 진짜 너무했어. 아까 교수님 문자보고 우는 줄 알았단 말이야. 울진 않고 좀 충격 받은 것 같은데. 아마 우리 교수님 한 달 월급을 몽땅 수리비에 쏟아야하지 않을까. 나랑 결혼하려면 앞으로 차곡차곡 모아둬야 하는데.
좁게 뜬 눈을 깜빡깜빡한 명대는 이내 눈꼬리를 접어 웃으며 명루의 어깨 위를 꾹꾹 작은 손으로 주물러주며 애교를 부렸어. 형-. 우리 테이블 형이 계산해주면 안 돼?
“고교수는 뭐하는데?”
“가끔은 내가 사야지. 왜 연애할 땐 대등해야하잖아.”
“대등이고 나발이고 열두 살 어린 애인 사귀면 밥이 아니라 집도 사줘야하는 거 아냐?”
“그냥 계산해달라면 해줘!”
잔말이 왜 이렇게 많아!
애교가 1분도 지속이 안 돼서 버럭 하고 나선 아예 명령을 했지. “사줘. 알았지? 형이 계산하는 거다? 카운터 가서 말해둘 거야. 알았지?” 그러고 나서는 세뇌시키듯 명루 귀에다 대고 한 번 더 반복해서 말했어. 형이 사는 거야. 형이. 형이. 형이.
“그만해, 간지럽다.”
귓가에 대고 말하니 간지러워 명루가 창가 쪽으로 몸을 빼며 도망쳤어. 흥. 코웃음을 치곤 오늘의 문제남 아성에게 혀를 내밀어 약 올리고 형이 때리러 쫓아오기 전에 재빨리 도망쳐 카운터로 종종 달려갔어. 저기 저쪽 테이블에서 저희 테이블 것도 계산해주시기로 했어요. 저희 형이거든요. 아시죠?
“아, 네. 알겠습니다. 확인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제일 비싼 술로 한 병, 아니 두병 가져다주세요.”
“제일 비싼 술이, 잠시만요.”
“아니요. 아무 거라도 상관없어요. 갖다 주세요.”
캐셔가 제일 비싼 메뉴가 뭔지 확인하려는 걸 만류하고 뭐든 됐으니 가져다달라 부탁하곤 이리저리 탁자들 사이로 걸어 제자리로 돌아왔어. 청명은 내내 명대의 등 뒤를 보고 있었는데, 형들 테이블에 갔다가 카운터에 다녀 온 명대에 벌써 계산한 거냐고 물어.
“큰형이 계산해주기로 했어요.”
“안 그러셔도 되는데.”
“교수님이나 안 그래도 되요. 어. 어. 벌써 왔네.”
“뭐..”
고청명에게 꿈을 크게 가지라며 어깨를 툭툭 쳐주는데 때 마침 서버가 백주 두 병을 가져오는 바람에 대화가 끊겼는데, 청명의 입장에건 왜 갑자기 와인이 오는지 이해가 안 가. 명대가 설마 술을 시킨 건가.
“난 운전해야 해서 마시면 안 돼. 그리고 이따 칵테일바 가자며.”
“제가 마실 건데요.”
“술주정뱅이는 별론데.”
“안 취할 자신 있어요.”
“두 병이나 마시면서 안 취해?”
“저 술 엄청 쎄요. 진짜. 장담할 수 있어요.”
“한 병은 도로 물리자. 대체 두 병......”
아무리 술이 강하다 한들 혼자서 두 병은 좀 그렇잖아. 이제 겨우 네 시고, 아직 해가 그대로인데 이 시간부터 술을 두 병이나 먹는 건, 애인 이전에 교육자로서 두고 볼 수 없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하나는 도로 보내려고 병을 쥐다가 보게 된 라벨에 그는 혹여나 자신이 숫자를 잘못 읽은 걸까 눈을 찌푸리며 병에 집중했지. 하지만 20년도 아니고 5년도 아니고 50년 맞아. 50년산. 술을 즐겨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서.. 술 마다 가격을 줄줄 꿰고 있는 정도는 아니지만 그도 대충 이게 얼마나 하는 진알아. 이거 두 병이면 오늘 낸 수리비 절반 이상은 될 것 같은데...
명대가 겁 없이 덜컥 주문한 술 두병에 할 말을 잃은 그는 얘가 일부러 이러는 건지, 정말 몰라서 이 술을 가져온 건지 의심이 갔지. 이미 눈치 챈 명대는 방긋방긋 웃으며, 왜요. 이거 비싸요? 하고 앙큼하게 묻지만 좀 전에 명루의 연기를 다 알고 있었던 것처럼 명대가 부러 형을 괴롭히려 비싼 술을 주문했다는 걸 알아냈어. 눈썹을 크게 오르내린 청명이 손을 들어 종업원을 불러 아직 손도 거의 안 댄 술 하나는 취소시키고 이미 명대가 뜯어서 한 잔을 마셔버린 술은 어쩔 수 없었지.
“저거 한 병에 얼마인지 알아?”
“우리 집보단 싸겠죠.”
“....그렇다고 두 병이나 시키면 어떡해.”
“형들은 좀 당해봐야 해요.”
“그 잔만 마셔. 더 마시지 말고.”
“비싸다면서 덜 마시면 아깝잖아요.”
“그럼 여기서 다 마시고 이따 칵테일바 가지 말던가.”
교수님은 연애에 영 쑥맥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밀당을 할 줄이야. 데이트를 여기서 끝내버리겠단 말에 안달이 난 명대는 마시던 잔도 내려놓고 더 안 마시겠다며 울상을 했어. 생각보다 말을 잘 듣는 명대에 좀 놀라긴 했지만 잘 듣는 게 나쁜 건 아니지. 그래도 마시던 건 마저 마시라고 명대의 손에 잔을 쥐어주고, 식사 끝난 뒤에 술이라도 깰 겸 가볍게 걷다가 해 지면 칵테일 바에 들어가자고 그답지 않게 데이트 일정에 적극적이었어. 사실 고청명도 집안에서 연애 관련 문제로 시달리다보니 머리가 아팠었거든. 아버지와 누나에겐 계속 그렇게 안하무인으로 반대하시면 다신 볼 생각 하지 말라고 강하게 말하고 나오긴 했지만 마음이 영 편치 않아. 방학을 해도 바쁘다고 명대도 자주 못 봤고. 그 후엔 후거가 그 사고를 당해서 볼 정신도 없었고 며칠 만에 겨우 만나게 됐으니까.
눈동자를 굴리며 홀짝홀짝 술을 넘기는 명대의 말간 얼굴을 보다 턱을 괴고 수저를 내려놓아. 명대 한 번 만난다고 지출이 심각하긴 하지만 뭐 어쩌겠어.
물론 고청명도 그 때 까진 그의 하루 지출이 롤스로이스 수리비가 다 인줄 알았지. 명대랑 이것저것 사소한 이야기를 하며 느긋하게 식사를 마치고 난 뒤에 명가의 두 형이 이미 사라졌고, 계산도 안 하고 가버렸다는 걸 알기 전에는 말이야.
알게 된 명대가 온몸을 분노에 떨며 당장이라도 집에 쳐들어가고 싶었지만, 교수님과의 칵테일바 데이트를 놓칠 수 없어서 꾸역꾸역 참았어. 술값 계산도 교수님이 한다는 걸 겨우 말리고 명대가 자기 카드로 긁었지. 그 카드가 결국 형 주머니에서 나갈 돈이니까. 그렇게 해도 영 기분이 안 풀려서 칵테일바에선 칵테일을 세 개나 시켜놓고 하나씩 빨대로 빨아 마시다 취해버리는 바람에 교수님 차에서 잠들었다가 깨어나 누구한테라도 욕을 해야 정신이 성할 것 같아 후거에게 지금 가도 되냐고 연락한 거였어. 거기까지가 명대의 이야기였고,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서서히 몽롱해졌던 후거는 야. 야. 하고 부르는 명대의 목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여.
“네가 형들 닮은 거였구나.”
“그게 소감이야?”
“응.”
사실 졸려서 뒤에는 잘 못 들었어.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이다 명대가 자꾸 부르니까 대꾸한 거지.
후거의 대답이 여엉 마음에 안 들어 석연찮은 표정을 짓지만 그래도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누구 하나한테 털어놓으니 그나마 좀 살 것 같네. 솔직히 누나한테 말하고 싶지만 누나한테 말하다간 형들이 오늘보다 더 심하게 따라 다닐까봐 차마 그렇게는 못하겠어.
“간다.”
“뭐? 벌써? 온지 얼마나 됐다고.”
“어차피 너한테 이 거 말하려고 온 거거든.”
와, 진짜 너무하네. 후거도 중간부터 거의 흘려 듣긴 했지만 고작 저거 하나 말하고 간다고? 지금 사람을 무슨 취급을 하는 거야? 서서히 내려앉던 졸음이 몽땅 날아가는 기분에 눈을 크게 떴다 찌푸리곤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어.
“들어준 사람한테 예의가 없네.”
“내가 뭐가 예의가 없어? 너네 부부 생각해서 빨리 자리 비켜주는 건데.”
“뭐? 우리가 뭐.”
“아까 하던 중이었지.”
“어?”
배낭여행이라도 떠나는 것 마냥 커다란 가방을 들어 올리며 명대가 입꼬리를 한껏 당겨 웃자, 식어가는 물주머니를 다리 아래로 빼낸 후거는 나름대로 침착한 척. 동요하지 않은 척 눈을 한 바퀴 굴리곤 그대로 눈가를 한껏 좁히며 되물었어. “뭘 해. 어?.. 어어?!” 발뺌하고 있으나 과하게 반응하는 걸 보니 분명 뭔가를 한 게 틀림없다는 모양새였지. 후거의 반응 덕에 제 예상이 빗나가지 않음에 의기양양해진 명대는 백팩에 팔을 꿰어 넣어 매며 고개를 양 옆으로 천천히 까딱이며 약 올리기 시작했어.
“내가 곧 도착한다고 했는데 그걸 하려 했단 말이지?”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가는데요.”
“취향도 고급스럽네. 몰랐는데...”
“아니거든. 아니거든?”
“됐다. 나도 빨리 교수님이나 보러 갈래.”
후거는 스팀이 올라서 열이 펄펄 끓는 것 같은데 조금 약올리다 흥미를 잃은 명대는 대화를 하다 말고 빨리 가겠다며 나섰어. 얼굴이 빨갛게 익은 후거가 담요를 질질 끌고 나오며 배웅해주겠다는 걸 사양하고 그냥 누워있으라고 했지. 사실 이불 속에 둘둘 말려있던 후거가 일어서자 조금 나온 배가 드러나서 차마 쟤를 움직이게 할 수가 없었어. 신기한 마음에 후거에게 붙어 이것저것 물어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그건 나중에도 물을 수 있으니까. 일단 밑에 교수님이 아직 기다리고 있으니 시간 끌을 수는 없지.
어정쩡한 자세로 멈춰 선 후거와 손 인사를 하고 종종 걸음으로 후거네 집을 빠져나왔어. 후거네 남편은 불편할까봐 자리를 비켜준 것 같아. 거실에도 없네. 눈치하면 백단이라 명대가 오기 직전까지 둘이서 뭘 하고 있었을지 눈에 훤해. 본의 아니게 방해해서 미안하지만 진짜 급했단 말이야.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 까지 내려오며 거울을 들여다보며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옷매무새를 다듬는데 후거가 여기서 납치됐었다는 생각을 하니 괜히 소름이 돋네. 멀쩡하니 다행이지만.. 그러고 보니 몸 괜찮은지 어떤지 더 물어볼 걸 그랬나봐. 너무 쏟아 붓느라 거기까지 물을 정신도 없었네.
금방 지하까지 도착해 주차장 입구 근처에 주차되어있는 청명의 차에 가까이 걸어가 조수석에 도달했다가, 살금살금 뒷걸음질 쳐 차 뒤쪽을 확인하는데 찌그러진 뒷범퍼에 한숨만 푹푹 흘러나와. 카센터나 다녀오지. 구겨진 차를 보니 마음이 영 좋지 않네. 내일 집에 돌아가면 아성형 엄청 괴롭힐 거야.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안으로 움푹 파인 차체를 콕콕 두드려. 한겨울의 차가운 공기에 서리게 식은 온도가 손가락을 타고 손목 까지 우수수 한기가 돋아나는 것 같아 얼른 손가락을 거두고 작게 웅크린 몸을 들고 조수석 문을 열어. 당연히 깨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차 안에 들어가 앉을 때 까지도 소음과 흔들림을 이겨내며 잠들어 있는 청명의 모습에 조금 놀랐지. 어. 교수님 자고 있다.
그가 잠들어있다는 걸 깨닫자마자 모든 행동이 극히 느려지고 조용해졌어. 그가 깨지 않게 조심조심 뒤로 맨 가방을 벗어 뒷좌석에 조심조심 내리고 불편하게 딱 맞는 자켓도 편하게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고 나서 혹여나 그 사이에 깼을까봐 눈치를 보며 그를 확인하는데, 코 한번 골지 않고 쥐죽은 듯 잠들어있는 모습에 안도했지. 어두운 지하 주차장 조명에 흐릿하게 청명의 옆모습이 드러나는데, 잠든 지 오래 되지 않았는지 콧잔등에 안경 자욱이 그대로 남아 있는게 귀여워서 건드리고 싶었지만 깰까봐 그러지 못하고 대신 끈질긴 눈으로 그의 얼굴만 한 없이 응시하기만 했어.
고작 몇 달 전 까지만 해도 명대의 소원은 원 없이 교수님을 쳐다볼 수 있는 거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소박한 꿈인지.
수업시간은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물끄러미 보고만 있을 수 있었지만, 그러면 교수님 수업에서 A+를 받지 못하겠지. 칠판에 적는 것을 받아 적고 필기하다보면 결국 수업시간의 절반 이상은 책을 보고 나오게 돼. 수업시간이 아니면 마주보고 있을 땐 냉랭한 교수님뿐이고. 정말 하루만이어도 좋으니 못된 말 하지 않는 교수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굳이 자고 있을 때가 아니라도, 물끄러미 쳐다봐도 짜증내지 않을 상대가 되어있으니, 솔직히 아직도 가끔은 신기하고 믿기지 않을 때가 있어. 2년간 짝사랑이 누군가에겐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포기할 만큼 긴 시간일수도 있겠지. 명대에겐 사실 포기에 가까웠고, 그걸 넘어서서 내가 교수님을 좋아해도 되는 건지 자신이 없을 정도로. 요즘도 때때로 오래 서서 수업을 하다가도 허리를 짚고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 가슴 위쪽이 어릿어릿한 감각이 느껴지는데.
근데 병원 안 가봐도 되나. 아무리 약하게 쳤다지만 교통사고는 후폭풍 올 가능성도 많다는데. 진짜 오늘 하루 종일 정신이 없긴 없었나봐. 병원 갈 생각도 못했네.
청명의 허리 부근을 보며 다문 입을 삐죽이던 명대는 팔짱을 끼고 있는 그의 손가락이 움직이는 걸 보고서 고개를 들어. 잠에서 깼는지 흐릿하게 눈을 뜬 청명 질끈 눈을 감고 뜨더니 손등으로 눈꺼풀 위를 비비며 어느새 차에 타고 있는 명대에게 시선이 닿았지.
“왔어?”
목이 잠겨 쇳소리가 나는 목울림이 좋아서 자신의 목소리를 섞지 않고 고개만 끄덕여 대답한 명대는 아까부터 만지고 싶었던 콧잔등의 연하게 남은 안경 자욱을 검지로 조심스레 매만지곤 잠이 덜 깬 교수님의 뺨에 제 말간 입술을 꾹 누르며 그의 팔뚝을 붙잡았어. 자다 깨자마자 키스를 받은 그는 얼떨떨한 기분에 별다른 반응을 하지 못하고 멈칫 굳었지. 내외하는 교수님도 귀엽기만 하고, 내외 안하는 교수님은 섹시하고.
“병원 가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병원? 어디 아파?”
“저 말고 교수님이요. 아까 형이 차로 쳤잖아요.”
“그 정도로 무슨 병원엘 가. 안 가도 돼.”
“그래도..”
“괜찮아. 너는, 후거랑 이야기 다 끝났어?”
“할 말만 하고 나왔어요. 걔도 지 남편이랑 좋은 시간 보내고 있었는데 제가 방해했었거든요.”
“그래?”
명대가 말하는 ‘좋은 시간’이 어떤 시간인지 모르고, 그저 부부 사이에 화기애애한 티타임 정도로 이해한 청명은 어깨를 뒤로 젖히며 가볍게 스트레칭을 한 후에 자세를 고쳐 앉아.
“집에 바래다줄까.”
“저도 교수님이랑 좋은 시간 보내고 싶어요.”
“보내고 왔잖아.”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시동을 걸어 지하주차장을 빠져나가는 데에 집중한 청명은 명대의 말에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어. 자기 말을 제대로 들어주지 않는 것에 조금 삐져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자 말이 없는 명대를 힐끗 보던 그는 주차장 입구에서 잠깐 멈춰 서, 명대 목 아래에서 안전벨트를 잡아 내 채워주곤 눈앞을 가린 앞머리마저 뒤로 넘겨주곤 다시 무심히 핸들을 잡았어. 고청명은 그냥 자기가 할 일, 본인이 거슬리는 것을 치운 것뿐이겠지만 명대에겐 그 행동하나하나가 설레는지 알기나 할까.
그대로 창문에 머리를 댄 채로 소리 없이 픽, 픽 웃던 명대는 결국 차가 신호에 멈추자마자 몸을 반대편으로 내밀어 그와 어깨를 닿게 하고는 “이따 저랑 밤에 뭐 하려고 미리 잤어요?” 하고 능청을 부리자 그 정도에는 이제 끄떡도 없는 그가 “누워서 잠만 잘 건데.” 하고 대답했지.
“그럼 오늘 저 집에 보낼 생각이 없었단 거네요?”
“음.. 그건..”
“원래부터 자기 집에 데려가려고 했던 거면서 아닌 척 하기는.”
“....”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고 해명하고 싶지만 해명해도 명대는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해버리니 곤란해. 이 말을 해도, 저 말을 해도 명대가 원하는 프레임 안에서 벗어날 일은 없을 거야. 조용히 생각해봐도 딱히 괜찮은 말이 떠오르지 않아 그대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버티고 있으니 명대도 계속 장난 칠 생각은 없는지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길래 오늘은 용케도 금방 그만둔다 싶었지.
청명의 집까지는 앞으로 차로 십분만 더 가면 되고. 집에 가서 가볍게 저녁 먹고 나서 뭘 하면 좋을까 머릿속으로 생각하며 빠르게 가려고 인적이 드문 골목길로 접어드는 때였지. 한참을 조용히 그의 얼굴만 쳐다보던 명대가 대뜸 입을 열었어.
“교수님.”
“응.”
“엄청 좋아해요.”
명대의 부름에 반사적으로 대답한 청명은 그 뒤에 흐르는 이야기에 사뭇 놀란 듯 핸들을 쥐고 있던 손마디가 불거질 정도로 가득 힘을 주긴 했으나 커다란 동요는 없었어. 명대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언제나 ‘엄청 좋아하고’있다는 티를 냈으니까. 하지만 행동은 행동이고, 언어로 들으니 또 뒷목이 간지럽혀지는 기분이라 애써 침착하게 운전이나 열심히 하려고 하지만 엄청 좋아해요. 유독 낮게 나온 목소리가 잊히지 않아 결국 얼굴을 잔뜩 찌푸렸어.
명대는 그래도 나름대로 고백했는데 대답하지 않으니 서운해서 화면이 꺼진 휴대폰 위만 엄지로 만지작만지작, 문질러대고 있었는데, 근처 가로등 아래 차를 멈춰 세우더니, 창밖을 보며 도착한 건가 주변을 돌아보는 명대의 턱을 부드럽게 쥐고 자신의 쪽으로 잡아당기곤 조금 벌어진 입술 위에 입 맞추며,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래도 가끔은 사랑한다, 좋아한다는 말을 아껴서 말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들을 때 마다 처음 듣는 것처럼 심장이 뛰는 말은 흔치 않으니까.
***
“명대 벌써 갔어?”
“어. 자기 할 말만 하고 가던데?”
“차라도 한 잔 하고 가지..”
“교수님이 기다리신다고 빨리 가야한대.”
“그래? 아쉽네.”
아쉽다면서 표정은 전혀 아쉬운 얼굴이 아냐. 20분도 안 돼서 사라진 명대에 안도한 건화는 반도 못 먹은 토스트를 보며 명대가 앉았던 의자에 앉아 타박했어.
“왜 저것 밖에 안 먹었어.”
“명대 이야기 듣다보니까.. 지금 다 먹을래.”
이미 식은 토스트는 눅눅한 감촉이 손가락에 닿는데 자기가 늑장 부려서 덜 먹어서 이러니 어쩔 수 없지. 입 안 가득 베어 물고 우물우물 씹자, 건화는 트레이 위에 올려둔 주스를 담은 컵을 내밀며 후거의 눈 위를 엄지로 쓸어 만졌어. 눈 주변에 졸음이 잔뜩 묻어났지. 임신하면 원래 잠이 많아진댔어. 평소에도 앞 매가 긴 눈을 감고 잠들어있는 모습을 보면 배 한구석에 몽글몽글 거품이 일어나 간질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요즘 들어 배가 나온 이후부턴 부른 배를 안고 모로 누워 잠든 모습이 건화에게 꽤 감명 깊게 다가왔지. 사실 미술적 재능은 손톱만큼도 없고 대단하다는 작품을 눈앞에서 봐도 시큰둥한 사람인데 폭신한 이불을 둘러 안고 잠든 한낮의 후거는 퍽이나 아름다워서 마음 같아선 화가를 고용해 그림으로 남기고 싶지만 무슨 이상한 짓이냐고 혼날 것 같아 그런 욕심은 마음속에 숨겨두기로 했어. 그 대신 잠든 틈을 타서 사진을 찍어두긴 했지만.
“졸려?”
“아니...”
“이미 눈은 잠들어있구만.”
눈은 끔뻑끔뻑 감기는 횟수가 늘어나고, 토스트 하나를 베어물고 마흔 번을 씹어 녹아 사라지게 하고, 정신은 다른 곳으로 날아가고 없으면서.
“졸리면 자자.”
“아직 저녁인데..”
“어차피 지금 자도 내일 아침에 일어 날 거잖아.”
“그래도...”
사실 아까 명대가 하는 중 아니었냐고 물어서 신경 쓰여. 그러고 보니 우리 하려고 했었는데, 내가 지금 자면 안 되는 게 아닐까. 남은 토스트 절반은 못 먹을 것 같아 트레이 위에 올려두고 조금 남은 두유를 들이키고 베드 트레이를 밀어냈어. 건화는 대체 명대가 후거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기에 얘가 이렇게 졸음이 쏟아져 누우면 순식간에 잠들 것처럼 된 건지 신기했지. 아까는 분명 자고 싶은데 잠이 안 온다고 칭얼댔었거든. 전공 이야기라도 한 건가?
“그냥 누워 자.”
“싫은데..”
“딴 소리 하지 말고 잠이 올 땐 그냥 자자, 우리.”
안 자겠다고 뻐기는 후거의 어깨를 잡아 침대 위로 밀고, 동그란 무늬가 박혀있는 극세사 이불을 가슴 위까지 덮은 후에 그 옆에 자신도 자리를 잡았어. 옆으로 누워 베개 위에 머리를 대고 강제로 눕게 된 후거를 보는데, 안 잘 거야. 안 잘 거야 하면서도 막상 누우니 온 몸에 힘이 빠져 나른해진 기분에 눈꺼풀은 점점 무거워져. 이렇게 일찍 자기 싫은데..
“아저씨 다음 주부터 출근하잖아..”
“응. 다음 주엔 일찍 일어나야해. 아침에 나랑 같이 차타고 장인장모님 댁에 가자.”
“귀찮을 텐데..”
“괜찮아.”
다음 주부턴 이렇게 하루 종일 내내 못 있을 테니 오늘의 두 시간 세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은데. 벌써 이렇게 자게 되면 그만큼 같이 못 노는 건데.
아까 하려다가 말고 분위기가 와해되어 버린 것도 신경 쓰이지만 내내 같이 있을 수 없다는 것도 그래. 아껴야하는데. 어제 생각했던 오늘 목표는 2층에서 같이 영화 보는 거였는데..
근데 진짜 잠 오네.. 미치겠네.. 일어나고 싶은데 온 몸에서 힘이 빠져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도 어려울 지경이야. 이불은 또 왜 이렇게 좋아...
당장이라도 까무룩 잠들 것 같은 기분을 억지로 버텨내어 목소리를 냈어.
“우리 있잖아..”
“음.”
“우리 아까 명대 오기 전에 하고 있었는데..”
“어?”
“내가 지금 자면...”
“별 걱정을 다 한다.”
자라고 해도 왜 안 자겠다고 고집부리나 했더니, 그런 걱정을 하고 있었어? 건화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어서 웃음을 터뜨리자 후거는 좀 부끄러운지 콧등을 좁히며 입을 오물거려. 왜. 내가 뭐 못할 걱정을 했나..
“그거야 내일도 할 수 있고 모레도 할 수 있고 내내 할 수 있는데 무슨 그런 걱정을 해.”
“아니, 우리 안 한지 너무 오래됐고..”
“그렇게 원하면 내일 아침부터 안 놔줄 게.”
“그건 안 돼.. 뱃속에 아기가.. 정이가 태어나서도 기억하면 어떡해. 가끔 그런 애들 있단 말이야.”
“설마 그런 걸 기억하려고.”
태교한다고 육아 관련 책 엄청 읽었는데 가아끔 태아일 때 기억을 간직한 아이들도 있다고 했어. 정이가 태어나서 “엄마랑 아빠랑 계속 아기집에 쿵쿵 했어.” 이딴 소리를 하게 된다면 쪽팔려서 죽을지도 몰라. 머릿속으론 생각이 뱅뱅 돌아가는데 사실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점점 느려지고 있어. 이제 오 분도 안 돼서 잠들게 될 것 같아. 안 자고 싶은데.. 아저씨도 괜찮다고 했으니까....
“그럼 나 잘래..”
“알았어.”
“아.. 아까 무슨 전화 했어?”
“내일 일어나면 말해줄게.”
“못 들으면 궁금해서 못 자..”
아까 명대 나간 후에 아저씨 뭐하나 봤는데 서재에서 통화하고 있는 것 같아서 다시 방으로 돌아온 거였거든. 꽤 진지하게 통화하던데.
“장인어른이 전화하신 거였어.”
“아...”
감았던 눈을 뜨고 천장을 올려다 봐.
“날 납치했던 그 사람이 출소 후에 꾸준히 널 노렸었나봐. 그러다가 인신매매단이랑 손잡고 너 납치했다가, 그 사람과 조직에서 트러블이 일어났고.. 그냥 평범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명가에서 나서니 인신매매단에서 몸 사린다고 그랬나봐.”
“아아...”
“이런 이야기는 그만하자. 이제 다 끝난 일인데.”
“응..”
“이제 진짜 다 끝난 일이야. 그 사람도 죽었고. 너 납치했던 그 조직도 곧 다 잡힐 거야. 우리는 앞으로 태어날 정이랑, 우리 생각만 하자.”
후거의 몸에 바짝 붙은 건화는 봉긋하게 오른 배 위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후거의 뒷목에 입술을 붙였어. 이제 한 달에 한 번씩 상담소에서 상담도 받기로 했고. 후거 다리도 점차 나을 거고. 앞으로 내내 함께 있을 건데 성급하게 굴 건 아무 것도 없어.
아마 내년 5월 10일엔 그의 인생에 들어 가장 외롭지 않고 무섭지 않으며, 더 행복한 날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내일은 우리 오랜만에 영화 볼까. 추우니까 극장까지 가지 말고 위에서.”
“어, 나도 그 생각 했는데.”
“그랬어? 뭐 보지?”
“공포영화만 아니면 돼.”
추운 것도 추운 거지만 후거 다리가 아직 아파서 오래 걷는 건 힘드니까.
그러고 나서 후거는 공포영화의 위험성에 대해 떠들어댔어. 심장에 안 좋아. 애한테도 안 좋아.
“근데 이게 공포영화가 아니라도 귀신 갑자기 나오는 영화들 엄청 많아서 곤란하다니까. 저번에도 그랬잖아. 그냥 아예 코미디 영화를 보자. 아니면 가족들 많이 나오고 그런 것도 괜찮은 것 같아. 내일 배달 음식 시켜서 먹으면서 보면 안 돼?”
“왜 안 돼. 뭐 먹을래?”
“일단 자고 내일 일어나서 생각해볼래.”
내일 아침부터 점심에 뭐 먹을지 생각해볼 거야. 조금씩 작아지는 목소리로 중얼대며 이야기하다가, 몰아치는 졸음을 이겨내지 못하고 이불을 더 위로 끌어당겨 안았어. 아저씨, 내일 봐.
“알았어. 잘 자. 사랑해.”
“나도.”
“사랑해 해줘야지.”
“이미 20년 치 말해서 더 이상은 안 돼.”
꾸물꾸물 이불 속으로 몸을 더 내리고 눈을 감으며 뱉는 말에 건화가 입을 다문채로 작게 웃었지. 그 바람 같은 웃음소리에도 잠드는 것에 방해 받지 않은 후거는 정말 잠들기로 결심하자마자 눈 깜짝할 새에 잠들어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있었어. 적어도 못 자서 괴로워 할 일은 없으니 좋네.
매끈한 뺨을 검지로 건드리다 베개를 옆으로 당겨 후거를 끌어안고 그도 눈을 감아. 잘 생각은 아직 없지만 자고 있는 후거 옆에서 누워 숨소리를 듣는 것도 꽤 평화로운 것 같아서.
병실에서 후거가 누워 잠만 잘 때는, 네가 자는 게 무서웠는데. 다시 일어나지 않을까봐.
하지만 내일 아침이면 눈을 뜨고 “잘 잤어?” 하고 네가 물을 걸 아니, 지금은 전혀 무섭지도, 걱정되지도 않아.
다만 바라는 게 하나 있다면.
“사랑한다는 말 좀 안 아꼈으면 좋겠는데.”
인간적으로 일 년에 한번은 너무 하잖아. 앞으로 20년간은 못 듣는다는 건가. 농담이란 걸 알지만 들을 때 마다 속이 쓰리네. 막막하고..
잠들어있는 자린고비를 물끄러미 보다가 살이 오른 통통한 뺨에 짧게 키스하고 아주 작게 속삭였어. 후거가 자주 안하면 내가 더 많이 하면 되잖아.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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