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결 2016. 8. 27. 23:19
"으응. 아저씨는 점심 뭐 먹었는데? 어? 진짜? 거기 회사 식당 음식 잘 나온다며. 아.. 아아... 다 쉬는 날.. 근데 어떻게 오리고기가 맛이 없을 수가 있어? 난 고기 중에 오리고기가 제일 좋더라."
장 보고 온 건 죄다 냉장고에 쑤셔 넣고 삼십 분 쇼핑하고 온 것도 운동이라고 좀 쉬어야겠다 싶어 침대에 드러누워 휴대폰 게임을 하다 보니 전화가 왔어. 건화인 거 확인하고도 사실 받을까 말까 고민했는데, 왜냐면 요새 다른 게임에 빠져서 원래 하던 게임을 안 했더니 복귀 선물이라고 아이템이랑 돈을 엄청 줘서.. 갑자기 열심히 하고 있는데 전화 온 거란 말이야. 곽건화는 타이밍도 좋지. 게임 많이 하지 말라고 그렇게 잔소리를 해대더니 이제 게임 중간에 전화도 하고 말이야.
"어? 어 나 책 보고 있었어."
눈치도 더럽게 좋지. 뭐 하고 있었냐고 묻길래 입에 침도 안 바르고 책 읽고 있었다고 거짓말했어. 근데 뭐 완전 거짓말은 아니다? 나 아까 이 방 들어오는 길에 거실에 널브러진 동화책들 쳐다보다 왔으니까 책 보고 있었던 건 맞잖아?
- 무슨 책? 동화책 읽었어? 무슨 내용이야 그거?
"어? 어... 어?"
지금 나 심문하는 거야?
"뭐야! 그런 건 왜 물어!"
-아니 집에 가는 길에 책 좀 더 사갈까 해서. 내용 비슷한 건 빼게.
"지금도 태교용 책 열 권 넘게 있잖아."
-많이 있으면 좋지 뭐. 집에 가는 길에 맛있는 거 사갈게. 뭐 먹고 싶어?
“고기.”
-고기 어제도 엄청 많이 먹었잖아.
“한 달간 고기 입에도 못 대서 그런지 이제 고기만 먹고 싶어.”
이게 살 찔 징조인가봐. 나도 엄마처럼 애 때문에 살 쪄서 삼년동안 못 빼면 어떡하지?
걱정은 되는데 일단 지금 당장 먹는 게 더 중요해. 건화한테 먹고 싶은 고기 종류는 죄다 말했는데, 스테이크, 치킨, 꼬치, 탕수육, 튀김... 하나하나 받아 적는지, 어. 어. 하고 대답하던 건화는 종류가 열 가지가 넘어가기 시작하자 조금 소극적으로 변했어. 어어어.. 어...
- 다 먹을 수 있어?
“다 못 먹지. 누굴 돼지로 알아?”
다 먹을 수 있겠냔 물음에 발끈해서 흥흥 내가 돼지야? 그걸 다 먹게? 하고 까칠하게 대답했어. 건화가 못 할 말 한 것도 아닌데. 한창 살찌겠다. 돼지 되겠다 생각하다가 저 소리 들으니까 예민해졌나 봐. 본인이 말했지만 너무 오버한 것 같아서 괜스레 손을 배배 꼬다가 그냥 탕수육만 사. 하고 새침하게 대꾸하고는 먼저 전화를 끊어버렸어. 빨간색 전화기 버튼을 꾹 터치하고 민망해서 허공에 발차기 두어 번 하고는 분명 집착 곽건화는 또다시 전화할 게 틀림없어서 문자로 화난 거 아니고 탕수육 맛있는 거 사 오라고 문자까지 보내고 나서야 조금 안심이 돼. 휴.. 후거 야.. 애 배서 흑역사 쌓는 짓은 하지 말자. 애가 다 기억하면 어떡해?
‘엄마, 나 엄마 뱃속에 있을 때 왜 아빠한테 누굴 돼지로 알아! 했어?’
하고 물으면 어떡해?
***
회색 벽돌 담장이 가리고 있는 저택 앞에 선차는 멈춰 선 지 10분이 지나도 차 문이 열릴 생각이 없었어. 집에 가기 싫다고 명대가 꿈쩍도 안 했기 때문이었지.
“왜 자꾸 집에 보내려고 해요.”
“그럼 집에 안 가고 어쩌려고?”
“교수님 집에 갈래요.”
“어허. 형님들 휴가 끝나고 돌아오셨다며. 형님들이랑 놀아.”
“... 지금 형들이랑 놀 기분이 아니잖아요.”
안전벨트도 풀지 않고 조수석에 푹 감긴 채로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었어. 물벼락을 맞는다거나 돈 봉투를 받거나, 하다못해 심한 말이라도 들었으면 몰라. 저 영감탱이 더럽게 늙었다 욕이라도 할 텐데. 고교수와 명대의 교제를 반대하는 이유가 너무 그럴듯해서 아무것도 안 들리고 듣기 싫다고 떼쓸 힘도 안 나.
늘 위로 올라간 웃는 입꼬리가 지금만큼은 일자로 꾹 다물려서 올라갈 생각이 없지. 명대는 열일곱 번째 한숨을 내쉬며 창문 위로 옆머리를 기대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어. 기운이 없는 명대를 보니 청명도 속이 편하지만은 않지. 처음에 아버지가 부르셨을 때 가족 약속을 잊은 부분은 혼날 만큼 혼났고, 누나가 말해 줬는지 명대 이야기를 꺼내셔서 그때 단호하게 말씀드렸었어. 연애에 관한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아버지가 간섭 안 하셨으면 좋겠다고. 청명의 그 말에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으셨지만 이해하셔서 그런 줄로만 알았지. 며칠 지나서 명대를 부를 줄이야. 잠깐 가지러 갈 게 있어서 본가를 들리지 않았더라면, 명대 혼자서 그걸 다 감당해야 했을 거야.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명대가 얼마나 교통사고 일에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데. 그도 완전히 알지 못하고 명대가 가진 죄책감의 극히 일부분만 알고 있는데도 이렇게 버거운데.
“명대.”
“왜요...”
“오늘 일은 그냥 잊어.”
“잊긴 어떻게 잊어요. 예비 시아버지가 그런 말씀을 하시는데.”
“.... 너도 참 사람이 한결같다.”
“무슨 뜻이에요, 그거? 기분 나쁜데.”
“칭찬이야.”
불퉁한 얼굴로 쳐다보는 명대를 보며 웃음을 흘린 청명은 어깨를 으쓱이며 명대의 안전벨트를 풀어냈어. “이제 가자.” 안전벨트가 제 자리에 돌아갈 때까지 제 집에 돌아갈 생각이 없는 명대는 가자는 그의 말에 열여덟 번째 한숨을 쉬곤 눈을 감았어. 여기까지 왔는데 다시 돌아가긴 좀 그렇겠지. 자신도 자신이지만 교수님도 걱정이 되는데. 뺨에 닿은 고교수의 시선에 침만 꼴깍 삼킨 후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어. 실눈을 떠서 차 안의 전자시계를 확인하자 도착하고 나서 15분가량 지나 있었어. 15분 버티면 됐어. 결국 차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지. 차 안에서 내내 히터에 달궈져 있던 뺨이 찬바람을 맞으며 빨갛게 달아오르고, 집에 들어가기로 마음먹었으나 여전히 고청명과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더 커서 앞으로 나아가는 발이 영 시원찮아.
“이따 저녁에 전화할게.”
“왜 저녁에 해요? 저 들어가자마자 전화해줘요.”
“알았어.”
어지간히 집에 가기 싫은지 대문 앞에서 버티고 서서 청명의 코트 소매를 붙잡고 안 놔줘. 도톰한 입술을 마구 구기고는 영 딴소리를 지껄였지.
“이번에 저기 백화점 옆에 백화점 또 생기잖아요. 교수님네 백화점 옆이요.”
“어. 왜?”
“아니 뭐.. 너무 상도덕이 없는 거 아니에요? 백화점 바로 옆에 백화점을 또 짓는 게 어디 있어.”
“그래서 누나가 엄청 짜증내고 있어. 백화점은 누나 관할 아닌데도 거기까지 짜증이 전달되나 봐.”
짙은 차콜 색 코트를 손끝으로 붙잡아 흔들면서 계속 말을 이어 가. 우물우물 입 안에서 정형화되지 않은 웅얼거린 말들이 줄줄 흘러나왔지.
“누나가 그래서 그 백화점엔 입점 생각 없나 봐요. 우리 누나는 상도덕이 있으니까.. 근데 큰형이 두루두루 잘 되는 게 좋다면서 시장에 도움이니 어쩌니 하고 입점하자는 거예요. 괴변만 늘어놓지 사실 그거 교수님네 백화점 잘 되는 거 싫어서 그러는 게 분명해요.”
뜬금없이 백화점 이야기에, 끝으로 가면서 큰형 흉을 보더니 청명이 대답을 않자 할 말이 떨어졌는지 명대도 곧 조용해졌어. 워낙 이 동네 자체가 조용하다 보니 바람에 나뭇잎 날리는 소리 정도만 들리지. 그 와중에도 청명의 소매에 관심을 놓지 못한 명대는 내내 고개를 숙인 채로 매끄러운 코트 소매를 빨갛게 상기된 손끝으로 만지작대다가, 보다 못한 청명이 명대의 손을 붙잡으며 불러.
“명대야.”
천방지축으로 사고 치고 다니고, 그가 기억하기에 가끔씩 만난 어린 명대는 볼 때마다 하나씩 상처를 달고 있었어. 이따금씩 명경이 사진을 보내주며 명대의 근황을 말해 줄 때마다 실소가 터졌지. 어제는 같은 반 양인이랑 싸워서 이기고 난 상처고, 이 때는 괴롭힘 당하는 여자애 구해주다가 같이 넘어져서 무릎이 까졌고, 이 사진은 아성이랑 싸우다가 명루한테 눈물 쏙 빠지게 혼나서 눈이 퉁퉁 부은 거고...
지금은 좀 차게 식긴 해도, 상처가 아문 흔적만 남아있을 뿐이지만. 저 속에 뭘 담고 있는지를 모르니.
“오늘은 들어가자. 들어가서 머리 식히고.”
“....”
길게 뻗은 가는 손가락 위를 그의 손바닥으로 덮으며 말했어. 한풍에 손가락 끝부터 얼어갔던 손가락이 유난히 따뜻한 청명의 손 안에서 녹아내려갔지. 뭐라고 하든 어리광 부리며 같이 있고 싶다고 하고 싶은데. 자길 보는 고청명의 눈이 너무 차분해서 생떼 부리지도 못하겠어.
“알았어요.”
“그래.”
명대의 대답에 청명의 손이 금방 떨어졌어. 열쇠를 찾으려면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걸 알면서도 서운해서 입이 삐죽 나왔다가 도로 들어가. 느기적 느기적 10년은 걸릴 기세로 열쇠를 찾아 의욕 없이 열쇠 구멍에 맞춰 넣곤 이미 대문이 열렸는데도 안 들어가고 신발 코로 바닥이나 툭툭 차며 시간을 보냈어. 어쩌고 있나 잠자코 지켜보던 그가 그럴 줄 알았다며 눈을 감고 숨을 푹 뱉고는 동그란 명대의 뒤통수를 잡아당기곤 추위에 빨갛게 된 명대의 뺨 위에 입술을 짧게 맞췄다 떨어져. 그리고는 그의 로맨틱한 무드를 느낄 틈새도 주지 않았지.
“추워서 얼음장이야. 뽀뽀할 맛이 안 나.”
“그럼 우리 집에 가서 따뜻해진 내 볼때기에 뽀뽀해줘요.”
“나중에.”
볼때기란 말에 어깨를 흔들릴 정도로 웃고는 그대로 명대의 등을 밀어 대문 안으로 집어넣었지. 안 돼! 조금만. 우리 오 분만 더 이야기해요. 차 마시고 가요. 네?
“다음에 와서 마실게.”
“진짜 교수님은 피도 눈물도 없어요. 엄청 매정해요. 내가 이렇게 같이 있고 싶다는데.”
“미안하다.”
“.. 그 말 들으려던 게 아니라.. 하.. 들어갈게요. 교수님도 잘 가요.”
고청명 입에서 미안하다는 말이 나오는 게 싫어. 하고 싶은 말은 입가를 맴돌지만 차마 이어갈 자신이 없어서 그냥 그대로 대문을 닫았어. 정원을 지나 현관문으로 가지 않고 서 있던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었지. 수십 초간 아무도 먼저 걷지 않았고, 결국 청명이 먼저 대문 아래로 내려갔어. 짧은 발자국 소리가 나더니 차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곧바로 출발하는 차 엔진 소리를 듣고 나서야 명대도 걸음을 옮겼지.
고청명은 알까. 내가 고청명 발소리, 기침소리, 웃음소리는 구별해내는 거.
***
“친구랑 논다면서 벌써 왔어?”
“너 안색이 왜 그래?”
누나와 얼굴이 까맣게 탄 두 형들은 거실에 오붓하게 앉아 티타임을 가지는 중이었나 봐. 커피 테이블 위에 오른 과하지 않고 정갈하게 우아한 티포트와 명경이 아끼는 접시 위에 놓인 작은 쿠키들을 물끄러미 본 명대는 형들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누나 옆에 털썩 앉아 반쯤 부서진 쿠키를 집어 입에 넣었어. 영 표정이 안 좋은 게 눈에 보이니 영문을 모르는 누나와 형들은 서로 눈을 마주하며 쟤 왜 저러냐는 듯 눈짓을 하는데 아무도 모르지. 소파 등 위에 팔을 걸치고 쿠키를 껌 씹는 것 마냥 질겅질겅, 지겹다는 표정으로 씹어대는 명대에게 명경이 부드럽게 타일렀어.
“무슨 일이야? 친구랑 싸웠어?”
“땡. 틀렸어. 친구랑 만나지도 않았고, 싸우지도 않았어.”
입안에 든 쿠키를 목구멍으로 넘긴 후에 누나가 마시던 잔을 들어 남은 차를 후루룩 국물 마시듯 마셔버리곤 명대의 옆에 끼여있는 쿠션을 들어 끌어안고 아랫입술만 쭉 내밀고 아무 대답을 안 해. 누가 봐도 ‘나 지금 기분 나쁘니까 위로해줘.’ 티를 팍팍 내고 있으니 무시할 수도 없고, 애초에 무시할 누나와 형들도 아니었지. 명루가 먼저 소리를 크게 내어 무슨 일이냐고 추궁하자 건너편에 누나가 따가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곤 명대의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끈기 있게 물어. “명대야, 무슨 일 있으면 누나랑 형들한테 말하기로 했잖아.” ㅡ그리고 그 말이 끝나자마자 뒤척이더니 소파 위에서 앉은 다리를 한 명대는 선심 쓴다는 듯 툭 내뱉었지.
“아까 후거네 집 간 거 아니고 고의원 님 댁에 갔어.”
“네가 거길 왜 가?”
“고청명 누나가 오라고 해서.”
“고금운? 고금운이 왜 널 불러.”
“그걸 설명해줘야 알아? 뻔할 뻔자 아냐?”
남은 쿠키를 하나 더 집어먹으며 그것도 모르냐는 듯 흘겨보자 형들의 표정이 이상해졌어. 말도 안 된다는 얼굴이었지. 왜. 가족의 반대 처음 보세요?
“그러니까... 고금운이랑 고의원이 너랑 고청명 관계 반대한다고 너를 부른 거야?”
“어.”
“뭐라고 했는데? 뭐라고 했길래 네가 이렇게 기운이 쭉 빠져있어?”
명대 성격으론 고씨네 정말 뒤집어엎고, 엎은 곳에다가 기름 뿌린 후에 불까지 지르고 올 성격인데 쟤가 저렇게 축 쳐져서 온 게 다른 것 보다 더 충격적이야. 연기하는 건 아니겠지? 일 때문에 가끔 만났을 때 봐온 고금운은 교양 없는 사람은 아니었는데.
“그냥. 별 거 없었어. 헤어지란 이야기지 뭐.”
“그러니까 고씨네에서 널 반대했단 이야기야? 자기 아들 연애 상대로?”
“쓰린 이야기 몇 번이나 하게 할 거야? 다친 데에 소금 뿌려?”
말이 별 거 없었다는 거지. 듣는 사람 입장에선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일이었어. 억지로 뽐내던 자신감도 아래로 수직 하강하고 배 아래쪽이 묵직하게 당겨왔지. 고의원에게 들은 이야기는 하나도 말하지 않았지만, 애초에 말할 만한 이야기도 아니었고. 그냥 반대한다는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교수님 본가에서 느꼈던 그 절망이 기어오르는 것 같아 목 안이 따가웠어. 차 마시지 말걸. 나도 모르는 새에 혀가 데었는지 입천장을 건드릴 때마다 쓰라려.
“기가 막히네. 뭐 우리는 고청명이 달가운 줄 알아? 그런 나이 많은 노총각이랑 사귀어주는 것만 해도 감사해야지 무슨 쓸 데 없는 반대는 반대야? 고의원도 이제 갈대로 갔네. 다음 출마 때는 내가 어떻게든..”
“나이 많은 노총각 큰형, 됐거든. 누워서 침 뱉기 하지 마. 제일 반대하는 게 누군데..”
“내가 반대하는 거랑 그쪽에서 반대하는 거랑 똑같아? 아니 갓 스무 살 된 녀석이 서른 넘은 아저씨랑 사귄다는데 어떻게 반대를 안 해!”
“그래. 반대해야 하는 쪽이 누구인데.”
잠자코 있는 명경과 달리 명루와 아성은 마시던 차까지 내려놓고 불쾌함을 표시했어. 애초에 명루는 처음부터 둘 사이를 꾸준히 반대하고, 방해해왔는데. 그렇다고 고청명 앞에 나타나서 뜨거운 차를 그의 머리 위로 쏟아 부으며 ‘우리 명대와 헤어져.’ 같은 드라마짓은 안 했어. 그 상황에서 고씨가 먼저 나서서 명대를 불렀으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지. 자기들을 얼마나 하찮게 보면 그딴 짓을 해. 지금까지 그 쪽에 투자하고 지원했던 모든 것들이 저놈들 콧대만 높여주는 일이었단 생각에 혈압이 치솟아 뒷골이 아파오는 것 같아 목을 소파 등에 대며 입에서 나오는 거라곤 욕과 한숨뿐이야.
명루의 한숨 소리가 아래로 꺼져갈 때 쯤. 입을 다물고 있던 누나가 명대의 어깨 위를 매만지며 차분히 물었어.
“네가 뭐가 모자라다고 거기서 반대를 해?”
“제 말이 그겁니다. 아니 네가 뭐가 어디가 모자라서 반대를 해? 고청명은 뭐가 대단해. 정식 교수 된 지도 얼마 됐다고. 누가 교수를 못해서 안하는 줄 알아? 명대 너도...”
“거기서 뭐라고 반대하는데?”
명루의 말을 중간에서 자르고 들어간 명경에 떨떠름한 표정으로 열변을 하다 조용해졌지. 명대는 어딘가 넋을 놓은 사람처럼 초점이 흐린 눈을 깜빡이며 무미건조하게 대답했어.
“나 때문에 교수님이 다쳤으니까.”
생각지도 못한 명대의 말에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삽시간에 침묵이 내려앉았어. 누나와 형들의 반응을 예상했던 터라 그 사이에서 명대 혼자만 부스럭대며 고쳐 앉고는 쿠션만 주먹으로 꾹꾹 눌러댔지. 까만색 체크무늬가 손등으로 일그러지는 걸 보다가 그대로 쿠션을 세워서 그 위에 턱을 괴곤 속으로 셋을 외워 하나. 둘. 세에....
“그게 왜 네 잘못이야? 구해달라고 사정한 것도 아니고 고청명이 나서서 구해주다가 다친 거잖아. 안 그래도 우리가 그게 너무 미안하고 감사해서 지금 몇 년 째야. 십 년 넘게 고의원 정계 활동이랑 그쪽 사업에 손해 보더라도 각오하고 투자하는데 지금 그걸로 너한테 헤어지라고 한다고?”
명대가 제 아들에 비해 모자라서 헤어지라고 하는 것도 말이 안 되지만 고청명이 다친 것 때문에 반대하는 건 더 말이 안 돼. 물론 고청명이 명대를 구해준 건 아직도 감사해. 그 생각을 하면 고청명에게 백팔배를 해도 모자라지 않지. 하지만 그 사고 때문에 명대를 반대한다는 건 잘못됐잖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고의원에게 실망감만 커질 뿐이라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저은 명루는 거의 비어 수색이 옅어진 차 위에 티포트를 들어 따르곤 맥주를 마시는 것 마냥 한꺼번에 삼키다 좀 전에 명대처럼 혀를 데이곤 잘난 얼굴을 사정없이 찌푸리며 잔을 도로 내려놨어. 잔 받침 위에 거칠게 내려진 찻잔 안에 남은 차들이 넘칠 듯 말 듯 위태롭게 흔들렸어.
“그래서 넌 뭐라고 했는데.”
“아무 말도 안 했어.”
명루에게 손수건을 건네주며 아성이 묻자, 명대는 고개를 돌려 거실에 크게 난 유리창 너머로 시선을 두고 가만히 말해. 바람이 많이 부는지 말라비틀어진 나뭇잎만 조금 달고 있는 앙상한 나뭇가지가 크게 흔들리고 있었어. 아성은 명대의 대답에 신빙성이 없는지 “네가 정말 아무 말도 안 했다고?” 하고 떠 봤으나 명대는 고개만 끄덕였지. 아무 말도 안 한 건 사실 거짓말이지만. 형이랑 누나한테 말하고 싶지 않아. 엄청 슬퍼할 걸. 그리고 나중엔 교수님을 미워할 거야.
“나는 의원님 그러는 거 이해가.”
“네가 그걸 왜 이해를 해?”
“교수님 말론 안 아프다고 하는데 아직도 꾸준히 병원 다녀. 물리치료도 계속 받고. 비 오면 허리 아프대.”
“비 오면 아픈 건 나이 먹으면 다 그런 거야.”
“우리 교수님 늙은이 취급하지 마. 아직 서른밖에 안 됐어.”
서른둘이겠지. 아성이 한마디 거들자 창밖을 보던 명대가 고양이 눈매를 하곤 아성을 찌릿 노려봤으나 지금은 작은 형이랑 길게 싸울 기분도 안 나서, 금세 꼬리를 내리곤 다시 쿠션이나 세게 끌어안았어. 엄마가 보고 싶거나 불안할 때마다 인형을 끌어안고 침대 구석에 처박혀 있던 게 버릇이라.
고청명 곰인형이 필요한 시점이야. 몇 번 세탁해서 처음의 그 보들보들함은 사라졌어도 그거 끌어안고 자면 기분 좀 나아지는데. 몸은 거실에 앉아있지만 머리는 이층의 자기 방 침대 위에서 곤히 잠들어있을 회색 곰인형에게 가 있었지.
“아까 그 말은 농담이고. 너 구하느라 고청명 희생이 컸던 건 형들도 알고 누나도 알아. 왜 몰라. 하지만 그게 네 잘못은 아니잖아.”
명루가 손을 뻗어 명대의 무릎 위를 문지르며 말해. 명대의 얼굴은 점점 쿠션 속에 파묻혀 이제 눈과 콧등만 조금 보일 정도였어. 시선도 조금씩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그의 말에 대답을 않던 명대는 큰형 손에 청바지 무릎이 다 닳겠다 싶을 때쯤,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지. 소극적인 반응에 누나와 형들의 마음은 속이 타고 미어질 것 같은데, 명대가 그 마음을 이해나 할지.
“교수님도 그랬어. 내 잘못 아니라고.”
“고교수야 그런 사람이니까 걱정 안 해. 고의원이야 말로 기가 막힌다. 널 그렇게 마음에 들어하더니, 정말 좋은 게 아니라 좋은 척을 하는 거였네. 그런 앞뒤 다른..”
“그런 거 아냐. 여전히 나는 좋다고 했어. 그냥...”
명경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해명을 하려 했으나 이야기를 하자니 길어질 것 같고, 아까도 참았던 이야기라 이제 와서 말하면 안 될 것 같아. “그냥...” 하고 말을 줄여버리니 듣는 사람은 답답해 미칠 노릇이지. 최대한 말을 줄이고 있던 아성이 고개를 까딱이며 명대에게 물어. 그냥 뭐? 그냥.. 그냥 별 말 안 했어.
“긴말 필요 없으니 그냥 헤어져.”
명대 저 녀석이 말 못하는 거 보면 이유 있겠지. 나쁜 쪽으로. 팔짱을 낀 아성이 소파 등에 기대며 한마디 뱉자, 옆에 앉은 명루가 더 좋아해. 크게 주억이며 작은 형 말 들으라고, 안 그래도 나이 많은 남자랑 사귀는 거 마음에 안 들었다고 물들어 왔다고 노 젓는 사공처럼 열렬히 발언했으나 명대는 눈 하나 꿈쩍 안 해. 가늘게 뜬 채로 형들 어깨 사이, 그 너머 아무것도 아닌 곳에 눈길을 두고 툭하니 뱉었지.
“싫어.”
“헤어져.”
“싫다니까.”
형들이 이렇게 헤어지라고 나설 때 누나가 내 편이었는데. 오늘은 누나도 명대의 편이 아니었어. 원래 이럴 때쯤 무슨 철없는 짓이냐며 형들을 꾸짖었을 텐데 아무 말 없이 명대만 쳐다보고 있으니까.
설령 누나까지 완전히 명대의 연애에 반대해도 명대는 못 놔. 절대 못 헤어져. 그 속마음을 눈치챘는지, 명루가 뒷목을 감싸 쥐며 미간을 좁혔어.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누나랑 형들 마음 아프게 하면서 까지 사귀겠단 말이야?”
“누나랑 형들이 마음 안 아프면 되는 거잖아. 우리 축복해주면 해결되겠네.”
“이게 정말.. 억지 부린다고 될 일이 아니잖아! 우리가 축복하면 뭐 해. 저쪽에서 이렇게 나오는데! 다 떠나서 네가 그쪽에서 그런 취급받으면서 고청명이랑 만나는 거 반대야. 정말 말 안 들으면 프랑스 유학...”
“싫다니까! 내 인생인데 내가 알아서 해!”
“명대!”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바로 위층으로 올라갈 걸 그랬나 봐. 누나와 형들의 나무람에 속이 상해 쿠션을 떨어뜨리고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손이 붙잡혔어. 말 다 안 듣고 어딜 가려고 해?
“네 생각만 하지 말고 가족들 생각 좀 해라 명대야. 너 그런 취급받는데 우리가 어떻게 발을 뻗고 자. 고청명 좋아한다고 따라다니면서 냉대받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는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헤어져.”
“싫어. 못 헤어져.”
“너 정말...”
방으로 올라가려 했으나 아성에게 붙잡혀서 다시 소파 위에 강제로 앉혀졌지. 명대는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헤어지란 명주의 말에 거세게 고개를 내저으며 거부했어. 바보 같은 말 하지 마.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게 어딨어. 나는 이미 이년 전에 시작했거든. 그만두려고 했으면 이미 한참 전에 그랬어야 했어.
“도대체 고청명이 뭐라고 그렇게...”
“좋아하니까 그렇지!”
뺨을 감싸는 누나의 손을 뿌리치고 내뱉었어. 울먹이는 목소리가 위태위태하게 귓가에 닿아. 명대는 절대로 울지 않으려 이미 빨개진 눈가를 비비며 말문을 잃은 형을 보며 이었어.
“형은 날 생각한다면서 왜 내 마음은 이해를 안 하려고 해?”
“..명..”
“못 헤어져! 나 교수님 좋아. 좋단 말이야. 교수님이 나 싫다고 무시하고 거들떠도 안 볼 때 내가 얼마나 괴로웠는데!”
“그러니까, 그런 짓을 한 놈을 왜..!”
답답한 건 명루야. 명대가 그렇게 쫓아다니고, 심지어 대학까지 고청명 쫓아갔지. 제 점수로 택도 없는 대학에 들어가고 싶다며 잔디나 좀 깔아달라고 당당히 말했을 때 얼마나 어이가 없던지. 그래도 이 녀석이 학교 졸업할 생각 하니까 공부해야겠단 마음이 들었나 보다 싶어 기특해서 대학 총장과 기부입학 이야기 끝내고 집에 왔더니 고청명 아직도 그 학교에서 교수하는 거 맞냐 물었었지. 그때 그 허탈함과 은연중에 감출 수 없는 질투.
“근데 지금은 나한테 잘해준단 말이야. 사랑한다고도 했어. 지금은 예전에 교수님이 못되게 굴었던 거 다 잊을 정도로 좋아. 헤어지기 싫어. 안 헤어질 거야. 형이 아무리 헤어지라고 해도..”
“명대야. 형은 너 나쁘게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형들이랑 누나만큼 좋아해. 그리고 솔직히..”
눈을 질끈 감은 명대는 숨도 쉬지 않고 빠르게 말하며 주먹을 세게 말아 쥐어. 막내 동생의 감정이 격해지는 게 보여 진정시키려던 명경도 자신들 만큼 좋아하단 말에 등을 쓰러 내리는 손이 잠깐 멈칫했어. 건너편에 아성은 대놓고 얼굴을 찌푸렸지.
“솔직히 누나랑 형들 다음으로, 날 제일 아껴주는 건 교수님 맞잖아.”
나 구해준 것도, 내내 걱정해준 것도 가족 빼곤 교수님이 유일한데.
그런데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어.
***
회사 마치기 한 시간 하고도 삼십 분 전. 사지육신이 멀쩡한 것을 넘어 아직 4개월이 되지 않았으니 성관계는 자제하라는 담당 의사의 말 때문에 반은 좌절, 반은 안도했으면서도 머릿속에서 야한 생각이 떨쳐지지 않은 팔팔한 20대 곽건화는 돌연 머리가 아프고 어지러워 세상이 노랗게 보인다는 이유로 병원에 가겠다며 일찍 퇴근했어. 당연히 그의 목적은 병원이 아니었지. 삼십 분 전에 후거가 KFC 치킨이 먹고 싶다고 문자를 보내서 그걸 사러 갔어. 원래는 제시간에 퇴근해도 충분한데 오늘따라 1분이 10분 같고 의자 앞에 앉아 모니터만 뚫어져라 쳐다보기엔 너무 괴로워서 성실하기론 두입으로 설명하는 걸로도 부족한 곽건화가 오늘은 좀 불성실하게 굴었지. 사실 버티고 앉아 있는 게 힘든 것도 힘든 거지만 후거가 임신하고 나서부터는 걱정도 더 많이 들고, 더 많이 보고 싶고, 더 많이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라 어쩔 수 없어. 감사하게도 회사 사람들도 배려해줘서 건화가 야근하는 일은 거의 없지만..
“우와, 치킨!”
회사 근처 KFC에 들러 치킨이랑 음료를 사서 집에 왔더니 후거는 건화의 얼굴보다 손에 들린 치킨이 더 반가운가 봐. ‘자기야 왔어?’나 ‘여보 퇴근했어?’ 같은 말은 바라지도 않아. ‘왔어?’ 한 마디만 해주면 될 걸 거실에 누워서 티브이 보다가 문 잠금 풀리는 소리에 쪼르르 달려오더니 건화의 손에 들린 비닐봉지를 낚아채더니 살랑살랑 가벼운 발걸음으로 바로 주방으로 걸어갔지. 들뜬 뒷모습을 보니 어지간히 치킨이 먹고 싶었나 보다 싶어서 뿌듯한 마음 반, 아직 애는 낳지도 않았는데 외면받는 가장 중 하나가 되는 건가 싶어 걱정이 앞서는 게 반이야.
“치킨은 그렇게 반겨주면서 왜 나는 안 반겨줘?”
“응? 내가 인사 안 했었어?”
“나 보자마자 우와. 치킨 하던데.”
“그랬었나? 뭐야. 삐졌어? 애걔, 인사 안 한 걸로?”
“삐지긴 누가 삐졌다고..”
식탁에 쪼그리고 앉아서 포장을 풀어내는 후거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하자 후거는 고개를 양 옆으로 까딱까딱하며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어. 그랬어? 내가 인사를 왜 안했지?
“알았어. 알았어. 퇴근했어요. 잘했어요.”
마치 퇴근하는 게 건화의 숙제인 것처럼 칭찬하면서도 눈은 동그란 통 안에 든 치킨에 가 있었지. 연신 비닐이 부스럭대느라 사실 후거 목소리도 제대로 전달이 안 됐어. 더 말해서 뭐하나 싶어 콜라를 꺼내는 걸 도와주고 손에 기름 묻을까 키친타월을 몇 장 뽑사오니 후거는 이미 양손에 다리랑 날개를 들고 먹고 있었지. 앞 매가 길게 뻗은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뭐하러 그걸 들고 있냐는 얼굴로 쳐다보기에 별 것도 아닌데 머쓱해져서 아니. 그냥. 좀 닦으려고. 하고 닦을 것도 없는 싱크대 위를 키친타월로 닦고는 맞은편에 앉았어. 한 달 전만 해도 먹을 수 있는 것도 거의 없어서 마음이 아팠는데 잘 먹는 거 보니까 좋긴 하네. 테이크아웃 잔에 빨대를 꽂아 후거에게 내밀자 튀김옷이 다 먹혀 살만 남은 치킨을 야금야금 뜯어먹던 후거가 눈을 감으며 웃었어. 눈동자가 거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환히 웃는 걸 보니 건화는 치킨에 손도 안 댔는데 벌써 아무것도 안 먹어도 될 것 같았지.
치킨은 거의 다 후거가 먹고. 건화는 아무래도 튀긴 건 잘 못 먹어서 닭가슴살 부분만 두 조각 먹고는 콜라만 쪽쪽 빨아댔어. 후거는 완전히 치킨에 정신이 팔려서 건화가 몇 조각을 먹었는지, 왜 그렇게 금방 손 떼고 음료만 마시는지도 모르고 이따금씩 말을 하는 것도 없고 세상에 치킨과 본인 둘만 있는 것 마냥 집중해서 해치웠지.
순식간에 먹어치우고 씻고 나서는 후거가 아까까지 보고 있던 영화를 이어 보기로 했는데, 티브이를 다시 켜기 전에 무료로 해서 그냥 보는 거라고 하더니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아. 웬만하면 가리는 거 없이 잘 보는 건화도 영 재미가 없어서 10분 집중해서 보다가 금세 흥미를 잃고 후거에게 관심을 옮겼어. 따뜻하게 난방이 된 집이라 얇은 티셔츠만 걸치고 비스듬히 누운 후거의 배가 조금 완만한 곡선을 이루는 걸 빤히 쳐다보다가 손을 내려서 배 위를 천천히 쓰다듬었어. 그가 배를 쓰다듬는 게 예삿일이 된 지 오래라, 건화가 배를 만진다고 해서 딱히 별 다른 반응을 않던 후거는, 티브이 속 재미없는 무료 영화가 절정으로 치닫는 와중 여자 주인공 와 남자 주인공이 뜬금없이 키스하는 걸 보곤 얼굴을 콱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어. 어제저녁에도 잘생겼고 오늘 아침에도 잘생겼었는데 역시나 지금도 잘생긴 남편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보다가 잊고 있던 게 떠올라 건화의 팔을 툭 치며 말했어.
“맞아. 아저씨, 우리 태명 정하자.”
후거는 그냥 툭 건드린 건데 정작 맞은 건화는 아픈지 맞은 부분을 문지르며 미간을 찌푸린 채로 후거가 하는 말을 듣는데 태명 이야기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어. 맞네. 태명은 생각도 못했네. 책에서 봤는데 왜 태명 지을 생각을 못했을까.
“태명?”
“응. 아까 낮에 엄마가 왔을 때 태명 이야기해서..”
“생각해둔 거 있어?”
“으음.”
태명 지어야지라고만 생각했지 딱히 뭘 할지는 고려 안 해봤는데. 팔짱을 끼고 턱을 아래로 당겨 이리저리 고민 하는데, 퍽 진지한 모습으로 생각 중이라 머리가 데굴데굴 굴러가는 소리가 날 것 같아 웃음이 튀어나올 것 같았으나 주먹으로 입을 꾹 막은 건화는 시침을 뚝 떼고 후거의 어깨 위에 팔을 두르며 옆으로 더 밀착해 앉았어.
“뭐가 좋을까. 태명 잘 지으면 아기 태어나도 그 이름으로 짓는 경우도 있던데.”
“나는 쑥쑥이 건강이 이런 건 싫어.”
“그럼 뭐로 하지.”
“으음. 음. 으음..”
“아직 성별 안 물어봤으니까 중성적인 거 하는 게 좋겠다.”
“절대 물으면 안 돼! 약속이야! 알았지?”
“알았어.”
요샌 아기 성별도 알려주는데. 후거는 부득불 절대로 안 듣겠대. 자기도 내심 궁금해하면서도 아기 성별은 태어났을 때 알고 싶다고, 본인도 이유를 모를 고집을 부렸어. 그래서 덩달아 건화도, 둘의 부모님들도 정작 자기 손자의 성별을 태어날 때쯤 알게 될 것 같은데.. 사실 건화는 전에 이미 의사한테 귀띔받았는데.. 후거가 화장실 간다고 먼저 나간 사이에 초음파 사진을 한 번 더 보더니 나갈 준비를 하는 건화에게 딸이 좋겠냐, 아들이 좋겠냐 물어서 딸이든 아들이든 상관없어서 그냥 다 좋다니까 웃으며 초음파 사진을 건네주더니 “달렸네요.” 하는 거야. 그 당시에는 무슨 말인지 몰라서 아, 예. 감사합니다. 하고 나왔는데 집에 와서 생각해보니 아들이란 이야기였어. 하필 그 직전에 후거가 자긴 아기 성별 태어났을 때 알고 싶다고. 너무너무 아프다던데 애 성별이라도 그때 알게 되면 좀 위안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하니 거기다 대고 달렸다던데. 하고 말할 순 없어서 결국 원치 않는 비밀이 됐지.
“뭐가 좋을까.”
“나 이런 거 진짜 자신 없어.. 이름 짓는 게 세상에서 제일 힘든데.. 그래서 과제로 글 쓸 때도 사람 이름 그냥 친구 이름 조합해서 하는데..”
과제로 쓰는 글이라 그게 가능 한 거지. 내 아기 이름을 그렇게 할 순 없잖아. 몸을 뒤척이며 깊게 고민하는데도 영 안 떠오르네. 링링.. 얀얀.. 이런 거. 아냐. 이런 거 말고..
두꺼운 겨울이불을 위로 당겨 끌어안고는 입술을 길게 늘이며 눈만 데르륵 굴리는데, 때 마침 하나가 떠올랐어.
“정이 어때?”
“정이?”
“괜찮은 거 같아. 이름 두 개 갖다 붙이는 거 난 별로야. 정이 마음에 들어. 쑥쑥이는 진짜 싫으니까.”
“나도 괜찮은 거 같은데 그냥 정이 할까?”
“너무 급하게 정하는 건가?”
“태명인데 뭐.”
갑자기 번뜩 떠올라서 후다닥 정한 거 긴 하지만 마음에 들어. 정이 예쁜데. 내 이름보다 예쁜 것 같아. 최근 들어 하루 종일 집에 틀어박혀서 놀기만 하니까 사람이 사람이 아닌 거 같고 아무것도 안 하고 하루를 보내면 죄책감 들고 그랬는데. 이름 하나 정한 거뿐인데 그래도 오늘 하루는 뭐라도 한 것 같아 뿌듯해서 이불을 꽈악 끌어안은 채로 크게 웃자 건화는 그게 그렇게 좋냐며 두꺼운 이불로 감싸인 후거의 허리를 끌어안고 턱 아래에 입맞췄어.
“이제 그럼 아기라고 안 부르고 정이라고 부르면 되겠다.”
“그치. 불러봐.”
“정아, 아빠야.”
“아, 하지 마. 괜히 닭살 돋아.”
솜이불에 가려진 배 부근을 톡톡 두드리며 건화가 일부러 더 꿀 떨어지는 소리로 입을 열었는데 후거는 괜스레 어깨가 바르르 떨리고 좀 창피한 기분이 들어서 아래로 내려가는 건화의 얼굴일 밀어냈지.
“아빠가 아, 아기한테 말 거는 게 뭐가 닭살 돋아.”
“아기 아니고 정이거든.”
“그래 정이.”
사실 잘못 해서 아들이라고 부를 뻔하다가 바로 수정했어. 다행히 후거는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한 듯 오히려 건화한테 이제 아기 말고 정이라고 부르도록 하라며 꾸지람을 줬지. 그래. 알았어. 고개를 끄덕인 그는 후거를 침대 위로 눕히곤 깜빡이는 눈꺼풀 위에 입술을 대며 손을 이불속으로 슬그머니 집어넣어. 그리곤 바로 누운 후거의 티셔츠 아래 맨살을 부드럽게 매만졌지. 커다란 손이 배 위를 천천히 만지고는 곧 짓궂은 웃음을 띠더니 배 위에 머리를 대고 속삭였어.
“정아. 있잖아.”
“말 걸지 마. 말 걸려면 나 없을 때 해.”
“후거 없이 어떻게 말을 걸어. 듣기 싫으면 귀 막고 있어.”
“귀 막아도 다 들린단 말이야.”
배에 말 거는 거 왜 이렇게 부끄럽고 창피하지. 옆에 건화의 베개를 끌어안고 베개 위에다 주먹질을 하며 오글거림을 꾸욱 견뎌내고 있을 때, 건화는 부끄러운 것에 면역력이 약한 임신한 아내를 위해 마음속으로 조곤조곤 속삭였어. 혼자만 비밀을 가지고 있으려니 너무 힘들어서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에게 조금을 양보했지.
‘아빠는 네가 아들인 거 알아.’
‘근데 엄마는 안 듣겠다고 했으면서 내심 네가 딸이길 바래. 아직 사 개월도 안 됐는데 집에 머리핀만 다섯 개야.’
‘그래서 이왕이면 네가 딸 같은 아들이면 좋겠어.’
드물게 외출을 할 때마다 아기용품을 하나씩 사 모으는데 어찌 된 게 사는 것마다 핑크색, 레이스인 걸 보면 후거의 바람이 어느 쪽으로 향해 있는 진 안 봐도 비디오였지. 건화는 10개월도 채 안 될 후거의 즐거움을 위해 아들의 아자도 이젠 꺼내지 말아야겠다 다짐했어. 방금도 후거는 “나는 배 아픈 것도 덜한 거 보면 얌전한 공주님인 것 같아.” 하고 말했거든.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네.”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동의한 건화는 배에 손과 얼굴을 대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아예 이불 아래쪽으로 기어가더니 체구에 비해 자그마한 후거의 발을 쥐었어. 간지러워! 다리를 흔들며 벗어나려는 후거에게 얌전히 있으라고 말하곤 이 방에서 저 방까지 걷느라 수고한 후거의 발을 조금씩 마사지해줬지.
“안 해도 되는데.. 집에서 놀기만 하는데 무슨 마사지를 해줘.”
“노는 것도 얼마나 힘든데. 그리고 임신하면 쉬는 게 당연하지.”
“치.. 나도 해줄까?”
“됐어. 그 손으로 무슨 마사지를 해줘.”
“지금 내 손 무시했어?”
“아니. 너무 고우니까 차마 마사지를 시킬 수가 없다는 뜻이지.”
작은 손을 쫙 펴서 건화의 코앞에 대고 투덜대자마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 손바닥에 키스한 건화가 입꼬리를 당겨 웃고는 후거가 닭살 돋아 죽겠다고 할 법한 이야기를 꺼냈어. 이제 꽤 면역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어깨를 바르르 떤 후거는 귀를 틀어막을 준비를 해. 곽건화가 닭살 돋는 멘트를 한 번만 하고 끝낼 리가 없어. 그리고 역시나, 그간 오글거리는 대사를 차곡차곡 쌓아둔 건화가 섬섬옥수니 어쩌니, 얼굴만큼 손도 예쁘니 이야기를 꺼내자 세상에 둘도 없이 괴로운 사람이 되어 이불로 머리를 감싸고, 베개 밑에 들어가 귀를 틀어막아도 아예 딱 달라붙어 귓가에서 속삭이는 소리를 듣지 않을 수는 없어. 내일 마트 가서 귀마개라도 사야 할까 봐. 부끄러움에 몸서리치는 몸의 배 아래쪽을 부드럽게 감싸 안은 건화는 뜨겁게 열이 오른 후거의 귓바퀴 위에 입술을 내리며 아직 태어나지 않은 정이도, 후거도 어엄청 사랑한다고 소곤소곤 이야기하자 결국 귀를 꽉 틀어막고 있던 후거도 한숨처럼 웃음을 흘리곤 “나도.” 하고 대답했지. 언젠가 정이도 태어나서 대답할 날이 오겠지.
***
밤늦게 까지 건화랑 속닥속닥 이야기하고도 12시가 넘어서 까지 도통 잠을 잘 수가 없다고 이리저리 뒤척이는 탓에 건화도 잠을 잘 수가 없었어. 한시가 다 되어가자 결국 건화가 억지로라도 재우겠다며 책 읽어주면 잘 거라고 했지. 기가 막혀서. 내가 여섯 살인 줄 알아? 그래서 뭐 읽어줄 건데? 용 나오는 거?
그러나 건화가 가져온 책은 용이 나오는 동화책이 아니라, 후거 전공 관련 참고서였지.
“표지 보니까 벌써 잠 오는 것 같아.”
“어디서부터 읽을까?”
“아냐. 아저씨 나 졸려서 잘래. 읽지 마.”
하필 제일 힘들었던 과목 책을 꺼내올 게 뭐람. 나도 그거 시험 나오는 부분만 읽었는데.
책 읽어주면 잠들 거란 걸 비웃은 게 민망스러울 정도로 정말 거짓말 안 하고 표지만 봤는데도 엄청난 졸음이 몰려오는 것 같아 힘 없이 손을 내저은 채로 이불을 목 아래까지 잡아당기고 머릿속에서 양을 하나둘씩 세기 시작했어. 차라리 양 세는 게 낫지 저거 들을 바엔.
중간에 자꾸만 양을 세다 딴생각으로 새어서 다섯 번 정도 처음부터 양을 불러와야 하긴 했지만, 다행히 천마리까지 가기 전에 잠들었어.
그래도 두시 전에 잠든 거 같은데 눈 떠보니 건화는 출근하고 없지. 아침에 일어날 때 같이 깨우지. 그때 깨도 난 아저씨 출근 후에 자면 되는데. 11시 30분이 되어 일어난 후거는 그대로 침대에서 단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한 시간 반을 휴대폰 게임하며 버티다가 화장실에 가고 싶어 져서 어쩔 수 없이 일어났어. 그리고 가볍게 씻고 난 뒤 다시 하루의 일과를 침대 위에서 해결했지. 낮엔 늘 식욕이 별로 없어서 대충 끼니를 때우고 휴대폰이 뜨거워서 손이 데일 것 같을 때쯤 꿈지럭 꿈지럭 침대 밖으로 빠져나왔어. 사실 마음 같아선 더 있고 싶은데 오늘은 사 온 음식 말고 직접 요리하고 싶어서... 엄마 말대로 배가 더 나오면 꼼짝도 하기 싫을 것 같고, 움직이기도 힘들 것 같으니까 지금이라도 해야지. 아저씨 맨날 음식 사 오고 그러느라 피곤했을 테니까 오늘은 내가 해줄래.
제일 쉬운 게 볶음류니까 집에 있는 재료로 해야지 싶어 비틀비틀 말라가기 직전인 가지를 꺼내 구제해주기로 했어. 가지랑.. 어제 마침 양파도 사 왔으니까.
재료부터 꺼내서 손질하려고 할 때, 전화 벨소리가 들려서 깜짝 놀라서 애 떨어질 뻔했지. 예전엔 애가 없었지만 이젠 뱃속에 있단 말이야. 그러고 보니 이름도 지어줬지. 정이. 정이 떨어질 뻔했네. 놀래라. 원래 진동이나 무음 해놓는데 아까 게임하느라 소리 켰더니 진짜 깜짝 놀라서 손이 파들파들 떨려. 칼질하기 전이나 안 다쳐서 다행이지. 대체 누가 전화를 했나 보니까 곽건화야. 진짜 놀랐잖아. 미워서 안 받으려다가 그냥 받아.
-일어났어?
“지금 세시인데 당연히 일어났지.”
-하긴. 뭐 해? 점심은?
“먹었어. 아저씨는?”
-나도 먹었지.
애 떨어질 뻔 했다고 농담으로라도 이야기 하려다가 전에 유산한 게 떠올라서 이런 농담은 안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말았어. 식탁 위에 올려둔 재료들 하나씩 들고 싱크대에 가져오며 귀는 휴대폰에 열어뒀지.
-오늘 조금 늦을 것 같아서 전화했어.
“뭐? 왜? 회식 해?”
뭐야. 오늘 저녁 해주려고 했는데 늦으면 어떡해!
-아니야. 아버지가 퇴근하고 잠깐 보자고 하셔서. 오래 이야기 안 할 것 같아 그냥 어떻게 지내냐고 물으시는 것 같으니까 늦어도 한 시간? 한 시간밖에 안 걸릴 거야.
“아버님이랑 저녁 하는 거야?”
-어머니 오신단 말씀은 없으셨으니까 저녁은 안 할 걸? 집에 가셔서 드시겠지.
“음.. 알았어. 저녁 먹지 마.”
-왜?
“오늘 내가 저녁 차려 줄테니까 저녁 먹고 오면 안 돼. 알았지?”
-귀찮을 텐데 하지 말지.
“어차피 오늘 하고 한 여덟 달 정도는 안 할 생각이니까 그런 걱정하지 마시죠.”
귓가에 닿는 건화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미리 재료를 살짝 데칠 생각으로 물 살짝 넣고 냄비를 불 위에 올렸어. 최대한 빨리 가겠다는 답변을 듣고 통화를 끊자마자 불현 듯 양고기랑 파를 넣어 볶은 요리가 먹고 싶어져서 갈등에 쌓였지. 양고기 없는데. 근데 엄청 먹고 싶어.
생각해보니까 가지 볶은 거만 달랑 주는 건 너무한 것 같아. 막상 곽건화가 와서 실망하면 어떡해? 저녁 차리겠단 말을 하지 말았어야...
보글보글 끓는 물을 보며 고민하다 그냥 양고기 말고 돼지고기로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한주먹 밖에 없지만 돼지고기 남은 거 있으니까 그냥 이거 하지 뭐. 양고기가 먹고 싶지만 마트 나가는 거 너무 귀찮은 걸. 좋아. 식욕보다 귀찮음이 이겨서 그대로 집 밖으론 조금도 안 나갈 생각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전화가 오더니 택배를 경비실에 맡겼다는 거야. 아니 집에 사람 있는데 왜 경비실에 택배를 맡기고 가. 바쁜 건 알지만 너무하잖아.
“근데 나 택배 시킨 거 없는데.”
아저씨가 택배 시켰나? 요즘 하루가 멀다 하고 육아용품 지르는 재미로 사는 건지 퇴근할 때마다 하나씩 뭐 사 오던데 택배까지 시켰나 봐. 이런 거 잔소리해야 해. 씀씀이 너무 크다고 잔소리해야 한다니깐. 가스불을 끄고 어쩔 수 없이 주섬주섬 두꺼운 패딩이랑 지갑을 챙기고 나갔어. 이따 건화 퇴근할 때 들려서 가지고 오라고 할까 고민도 했지만 그냥 지금 들고 오는 게 낫겠지. 멀리도 아니고 바로 아래인데.
너무 춥다. 현관문을 나오자마자 복도에서부터 싸늘한 한기가 느껴져서 종종걸음을 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랐지. 오늘따라 엘리베이터가 왜 하필 1층에 있는지. 평소엔 운 좋게 나갈 때마다 우리 층에 있던데. 하긴 그거 올라오는데 몇 초 걸린다고.. 점점 올라가는 층계 숫자를 올려다보다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며 휴대폰을 꺼냈어. 건화는 후거 보고 휴대폰 중독이라고 놀리는데 중독 아니거든. 내 친구들도 다 이정돈 하거든. 인터넷 들어가서 최근에 드라마 방영하면서 인기 많아진 배우 스캔들 터진 이야기를 보다 보니 금방 1층에 도착해. 여전히 휴대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열린 엘리베이터를 나오는 순간 누군가 후거의 뒷목을 잡아챘어. 놀란 후거의 손에서 힘이 빠져 휴대폰이 아래로 떨어지고,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과 부딪친 휴대폰을 모서리에서부터 길게 화면에 금이 쫙- 가버렸지. “윽.” 짧게 낸 신음은 휴대폰이 부서지는 소리에 가려져 들리지 않았어. 그리고 이어 비명을 내지르기도 전에 두꺼운 테이프가 뒤에서 나타나 후거의 입술을 틀어막고, 목을 꽉 졸라매는 팔에 바둥대는 몸에도 점점 힘이 빠졌지.
한 명 아니야.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던 후거는 마구잡이로 흔들리는 제 팔과 다리를 붙잡는 손들에 비명을 목구멍 속으로 삼키며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어.
안, 안, 안..
사지가 붙들려 있다 해도 키가 큰 후거라 끌려가지 않으려 몸부림치고 발악하자 후거를 붙든 사람들도 일이 쉽게 진행되지 않아 화가 나는 것 같았지. 조금만, 조금만 더 버티면 누가 나올지도.. 우악스럽게 잡은 팔을 깨물려 이를 벌렸을 때, 후거의 입을 테이프로 막아버린 손으로 추정되던 것이 욕을 지껄이더니 곧 허벅지가 뜨거워졌어.
아. 처음 느끼는 타는 듯한 고통에 버둥대던 온몸에 힘이 쭉 빠져나가고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져. 눈을 내린 후거는 짙은 회색 바지가 점점 검붉은 색으로 물들어가는 걸 보며 숨이 가빠지는 걸 느꼈어.
“어디 갔지.”
정확히 7시에 집에 도착한 건화는 주방에만 불이 켜져 있는 집안을 보곤 의아함이 들었어. 왜 불도 안 켜놨지. 주방에만 켜놓고. 신발을 벗어 불이 켜진 주방 안으로 들어가는데 요리를 하다 말았는지 도마 위에 껍질을 깐 양파와 칼이 그대로 놓여있고 가스레인지 위에도 냄비가 올라가 있었어. 안을 보니 맹물만 있는 거 보니까 시작도 제대로 안 한 거 같은데. 물끄러미 주방 안을 훑어보던 건화는 고개를 갸웃하며 바로 안방으로 들어갔지. 요리하다 졸려서 자는 건가. 혹시나 후거가 깰까 봐 발소리도 죽이고 조용히 방문을 열고 더듬더듬 벽을 매만지며 전등을 켜는데, 침대 위에는 구겨진 이불 밖에 없어.
“집에 없는 거 같은데...”
아니면 씻고 있는 건가 싶은 마음에 안방에 화장실과 거실에 있는 욕실에도 들어가 봤는데 없어. 이층에 올라가고 서재에도 가봤지만 역시나 후거는 없지. 아래로 내려간 건화는 소파 위에 던져둔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후거에게 전화를 걸었어. 신호는 계속 가는데 전화를 안 받아. 세 번째 전화를 걸고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진위와 명대에게 전화를 걸었지. 진위는 방학하고 나서 후거를 본 적이 없다고 하고, 명대도 오늘은 만나지 않았다고 했어. 불길한 마음이 스멀스멀 건화의 다리를 타고 올라 와. 소름 끼치는 감각으로 조금씩, 조금씩, 건화의 몸을 죄이며 커지고 있어.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그는, 수동적으로 공기를 들이쉬고 뱉으며, 그의 장모에게 전화를 걸었어. 그러나 그가 후거가 혹시 그곳에 갔냐고 묻기도 전에, 장모님이 먼저 후거 벌써부터 자냐고, 전화를 안 받는다고 말씀하셨어. 그 말을 들은 건화는 이어지는 장모님의 말을 먼저 끊고는 다시 후거에게 전화를 걸어. 뚝. 뚝. 뚝. 신호음이 지날 때마다 건화의 심장이 아프게 쥐어 짜이는 것 같아 숨소리는 점차 가빠졌지. 휴대폰을 쥔 손에는 점점 힘이 빠져 늘어지고, 무거운 발걸음을 툭툭 내디딘 그는 아주 느리게 고개를 돌려 거실 벽에 달린 달력을 눈으로 좇았어.
‘17..18...19... 건화야 오늘이 며칠이지?’
‘오늘은 5월 10일이에요.’
‘그렇죠. 자 여기에 맞추자.’
얼마 전에 11월을 뜯어내 12월이 된 달력 위에, 숫자가 다시 짜 맞춰 지는 것 같아. 5월. 10일.
스물여섯의 곽건화는, 다시금 다섯 살의 곽건화로 돌아갔어. 좁아지는 세상.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낭떠러지로 떨어져버릴 것만 같은 고립된 공포. 겁에 질린 두 눈이 크게 확장 되고, 벌어진 입술과 아래턱은 부서질 듯 떨려왔지.
아. 아.
목구멍이 틀어 막힌 것 같아 괴롭게 목을 쥐며 억지로 목소리를 내는데, 아무것도 나지 않아. 공기만 토해내며, 결국 건화의 온 몸이 무너지고 휴대폰도 아래로 툭 떨어졌어. 모서리를 바닥에 부딪치며 떨어진 휴대폰은 까만 화면을 드러내며 또박또박 건화에게 말을 걸었어.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소리샘으로 연결되오니..
쓰러진 몸을 팔로 지탱하며 겨우 몸을 들어보려 하지만 되지 않아. 상체를 버티고 있는 팔마 애처롭게 떨려왔지. 빨리, 신고를 해야.. 내가.. 내가...
아, 윽.. 후거...
미끄러운 바닥 위에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리고, 건화는 스물다섯의 그가 아니라, 희미한 달빛 한점 들어오지 않는 축축한 폐공장 속에 갇힌 다섯 살이 되어 옴짝달싹을 못했어. 숨을 쉬는 것조차도 마음대로 되지 않고 울음소리를 내는 것조차도 원하는 대로 할 수가 없어. 후거. 후거.
힘겹게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손을 뻗은 그는 떨어진 휴대폰을 겨우 잡아당기고 후거의 아버지 번호를 느리게 눌렀어. 바들바들 떨리는 손가락은 그 마저도 완전히 수행하지 못하고 수도 없이 지우는 것과 다시 쓰는 것을 반복해 겨우 전화를 걸었고, 이제는 듣기만 해도 몸이 죄이는 것 같은 신호음을 들으며 몸을 웅크려. 굽은 그의 등은 조금만 건드려도 꼭, 조각조각, 부서질 것, 같,아.
'완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건화후거] 신혼인 두 사람 보고싶다 43 (1) | 2016.09.11 |
---|---|
[건화후거] 신혼인 두 사람 보고싶다 42 (1) | 2016.09.04 |
[건화후거] 신혼인 두 사람 보고싶다 40 (2) | 2016.08.22 |
[건화후거] 신혼인 두 사람 보고싶다 39 (3) | 2016.08.15 |
[건화후거] 신혼인 두 사람 보고싶다 38 (0) | 2016.08.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