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차여차
곽호 썰, 소설 올리는 블로그 @tarack_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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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재 완 결 단 편 기 타 방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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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남자고 튼튼해도 이렇게 목이 아프고 힘든데 가녀린 여인들은 이걸 어떻게 버티는 걸까. 

반나절 가까이 머리에 무거운 봉관하피를 올리고 있으니 목이 너무 아프고,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는 것조차 버거워 곱게 분을 칠한 얼굴이 자꾸만 찡그려져 수발을 드는 상궁에게 매번 꾸지람까지 들었다. 아니그래도 이미 타국에 시집와 모든 것이 낯설고 겁이 나는 정이는, 저보다 훨씬 작은 상궁의 뾰족한 눈에도 심장이 모래알만 해져서 붉은 연지를 바른 입술을 꾹 다물며 애써 표정을 풀고 고개를 내린다. 

정이의 신랑은 조금 전에 봤는데, 신랑인데 정이보다 작아서 어쩐지 김이 샜다. 그마저도 오래 볼 수가 없었지만. 머리를 짓누르는 것 같은 눈부신 금빛 머리장식에 목을 들 수가 없었고, 상궁들의 손에 이끌려 절을 하고 일어서고, 앉고를 반복하다보니 수련을 한 것도 아닌데 쉽사리 지쳐 굳이 아픈 목까지 들어 신랑의 얼굴을 볼 기운이 없었으니까.


“곧 전하께서 드실 겁니다. 어찌 모셔야하는지 잊지 않으셨지요?”

“네에..”


사실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렇게 말하면 혼 날 테니까 이번만 거짓말 해야지. 붉은 베일도 거추장스럽고 머리가 너무 아파서 정이는 그저 하루빨리 신랑이 와서 머리장식을 내려주기만을 바란다. 몽골에서는 긴 머리가 거추장스러워 짧게 잘라버릴까 고민 했는데, 이 곳에 와서는 상궁들에게 머리가 짧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머리의 절반을 틀어 올리고 손에 쥐기만 해도 묵직한 장식과 비녀를 수도 없이 꽂았으니 목이 아프지 않을 수가 없다. 여기서는 매일같이 이런 머리장식을 해야 하는 걸까. 1년만 살아도 목이 꺾여서 죽어버릴지도 몰라. 


소극적으로 대답하는 정이가 걱정되는지 상궁은 아침나절부터 내내 들었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더 반복한 후에야 자리에서 물러났다. 방안 곳곳에 켜진 호롱불을 가만히 보기만하다 아픈 목을 주무르며 슬금슬금 엉덩이를 빼어 벽에 머리를 기댔다. 하아.. 살 것 같다. 뻐근한 목이 절로 비명을 지르는 것 같지만 어서 신랑이 와서 내려 줄 때 까지는 누워서 잘 수도 없고 정이 스스로 추계를 내려서도 안 된다. 명나라는 너무 복잡한 것들이 투성이야. 몽골에서는 수련만 열심히 하면 됐는데. 몽골을 떠올릴 때 마다 혼자계실 어머니가 걱정이 되지만, 사부들이 잘 보살펴 주신 댔으니까 괜찮겠지.


빨리 오셨으면 좋겠는데.

하루 종일 굶어서 배도 고프고, 얼른 자고 싶은데 잘 수가 없다. 습관적으로 입술을 깨물려다가도, 상궁이 나가기 전에 입술에 발라준 연지 때문에 다시 곱게 입을 다문다. 제 몰골이 어떻게 되어 있을지 감히 상상도 가지 않았다. 분명 이상한 모습일 거야. 신랑한테 소박맞을지도 몰라. 설마. 혹시 그래서 아직까지 오지 않는 걸까.


소박맞는다는 생각에 얼굴이 하얗게 질려 창호지가 발린 창문으로 눈을 돌렸다. 분명 창밖이 새카매서 아무런 빛도 들지 않는데, 아직도 안 오신다는 건 정말 소박 맞히려고 그러신 걸까. 오늘 정이가 분을 칠해서 얼굴이 너무 이상해서... 소박맞으면 안 되는데... 총애를 받아야 하는데.. 머릿속에서 걱정이 솟아나고 혹여나 이대로 신랑이 오질 않아 몽골에 계실 어머니께 도움이 안 될까봐 전전긍긍이다. 분명 사부님께서 정이가 총애를 받아야 어머니도 편하게 사실 거라 했는데. 오기 싫었는데도 억지로 명나라까지 시집온 것은 다 그 때문이었다. 정이가 명나라 황자의 총애를 받게 되면 그간 고생하고 사셨던 어머니가 편하게 사실 수 있을 거라고.

어떡하지..

하지만 걱정이 되면 무어하리. 이 곳에서 정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저 기다릴 뿐. 가만히 기다리는 건 수련을 통해 내성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불편한 옷들을 겹겹이 입고 앉아있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결국 벽에 머리를 기댄 채로 두 손을 소매 안으로 감춰 몸을 말고 이성이 점점 잠들기 시작한다. 꾸벅꾸벅 고개를 까딱이다 깨고, 까딱이다 깨고를 반복하던 정이가 후다닥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킨 것은 달이 선명하게 뜬 한 밤 중에 정이의 처소로 든 5황자 주기진 때문이었다.


주기진은 신랑의 이름이었다. 그러나 정이가 절대 입에 올려서는 안 될 존함. 정이는 그를 ‘전하’하고 불러야만 했고 예를 갖춰야하며 어쩌면 장차 황제가 될 귀한 신분이니 최선을 다해 보필하는 것에만 신경을 써야한다.


하지만 그런 것과 거리가 먼, 자유로운 몽골에서 살아왔던 정이는 요 며칠간 상궁들이 복잡하고 어려운 이야기만 읊었던 것을 미처 다 떠올리지 못했다. 우선은 졸음에 들어 정신이 혼미했던 것이 하나였고, 둘은 혼례식을 끝 마친지가 언제인데 이제 나타난 신랑이 미워서 깊게 생각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었다. 서둘러 일어나 절을 하며 맞이해야하는데, 정이는 그저 감은 눈을 반쯤 뜨며 그를 올려다본다. 잠깐 연 문에서 새어든 바람이 호롱불을 위태롭게 만들었다.



잠깐 잠든 사이, 정이는 꿈속에서 몽골을 향해 뛰었다. 정이가 뜀박질을 하는 발아래는 찰나의 순간에 바람이 휩싸여 허공으로 작은 발을 띄워주었고, 명마로도 며칠의 시간이 필요한 몽골까지의 여정을 순식간으로 단축해주었다. 단숨에 몽골로 향해 어머니가 있으실 곳으로 가려 했으나 그 순간 신랑이 들어오는 바람에 꿈에서 깼다. 혼인한지 반나절. 정이는 벌써 신랑이 미워졌다. 이럴 바엔 그냥 확 총애 같은 거 받지 말아버렸으면.


수십 년을 지낸 제 집인 황궁에서도 어쩐지 어색한 발걸음으로 들어선 기진은 저를 보고도 아무 말도 없고, 어딜 감히 무엄하게 눈을 마주치고 있는 정이를 보고도 쓴 소리 하나 없다. 어쩌면 베일에 가려져 정이의 두 눈을 보지 못한 것일 수도 있고.

긴장이 역력하게 드러나 꾹 다물린 입가를 움찔대곤 곱게 차려진 주안상 앞, 상석에 자리를 잡았다. 정이가 온갖 치장에 괴로움을 표하고 있는 것처럼, 그도 평소에 걸치는 의복보다 훨씬 불편하고 화려한 혼례복을 여직 입고 있었다. 어서 새로 맞이한 시첩께 가시라는 내관의 재촉에도 퉁명스런 얼굴을 꾸며내고 한가로이 정자에 앉아 평소에는 눈에도 두지 않던 시를 달달 읊고 있었는데, 대체 무얼 하고 계시냐는 내관의 물음에는 “기쁜 날이나 내게도 운율을 즐길 시간은 필요하지 않느냐.” 하고 답했으나 사실 주기진의 머릿속에는 휘날리는 필체로 쓰인 시는 먹물 한 방울만큼도 들어차지 않았고 오로지 혼례식 도중 잠깐 보게 됐던 신부의 어여쁜 얼굴에 잠식 되어 제대로 된 사고가 불가능했다.


몇 달 전, 황상께 몽골의 사내와 혼인을 하라는 명을 처음 들었을 땐 제 처소에 틀어박혀 삼일 밤낮을 울었다. 황상이 제일 아끼는 황자니 어쩌니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폐하께서 나를 제일 아끼시면 이러실 수가 없는 것이다! 약관을 넘어선지 수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장독대를 깨부수던 천방지축 꼬마 황자처럼 섧게 울던 기진은 폐하께서 하사품을 한가득 내리신 후에야 울음과 혼자만의 근신을 벗어나 기운을 차렸다. 그러나 귀한 하사품으로 만든 새 비단옷을 지어 입고 돌아다니면서도 사내놈과 혼인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황궁 안의 궁녀들을 모두 홀리게 만들었다는 그 잘난 얼굴을 잔뜩 구기며 골똘히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해야 이 혼례를 물릴 수 있을까 하는 것 밖에 없다.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며 태황태후마마께 문안인사를 드리는 것도 이틀째 미루고 어전회의에도 나타나지 않았던 기진은 결국 폐하께 크게 혼이 나고 난 뒤에야 모든 것을 포기했다. 황상이 주기진을 불러 앉히고 2시진이나 역정을 내시더니 혼인하지 않으면 폐위시키겠단 말씀을 꺼내시자 내내 축 쳐져있던 기진의 어깨가 바싹 굳었다.


어찌됐든 그리 싫었던 혼례였는데, 사내가 한번 뱉은 말을 이리 쉽게 뒤집으면 안 되는데. 정작 혼례를 치르며 보게 된 제 신부는 꼭 하얀 호접란을 품에 가득 안은 선녀 같았다. 몽골 인이니 거칠고 지저분할 거라 생각했던 기진의 철없는 상상을 완전히 깨부수는 모습으로. 


얼마나 못생겼는지 봐주려고 고개를 들었던 기진은 전혀 다른 이유로 정이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머리에 오른 커다란 봉관하피가 괴로운지 목을 조금 비틀며 습관처럼 아랫입술을 내밀던 정이는 바로 건너편에 선 기진과 베일 너머로 눈이 마주치고 바로 쑥 고개를 내려버린다. 겨울의 하얀 햇빛에 부서지듯 빛나는 금빛 머리장식 때문에 눈이 부셔 주기진도 어쩔 수 없이 눈을 돌려야 했는데, 흐뭇한 얼굴로 웃고 있는 내관을 보면서도 투명한 천위로 신부의 얼굴이 덧그려지는 것 같아 숨을 삼켰다. 내가 이만큼 그림을 잘 그렸으면 폐하께서 날 업고 다니셨을 게다.


호접란 같은 선녀 좀 봤다고 내 이리 심장이 뛰어서 될 일인가. 어여쁘긴 하나 세상에 둘도 없는 미인까진 아니었다. 당장 태자비도 세기의 미녀라고 불렸고 기진의 정실도 미모로는 둘째가라고 하면 서러울 사람이었다. 그리고 굳이 남을 거론하지 않아도, 명나라 내에서 5황자가 여심을 울리는 미인이라 소문이 자자한데, 기진은 아무리 거울을 봐도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 요동치는 마음을 좀 진정해 보겠다고 시도 읽고 공자의 글도 읽어보지만 번뇌만 쌓인다. 내관의 재촉을 피해 이런저런 핑계를 대다가 이러다 신부가 잠들어버릴까 싶어 겨우 왔더니, 이미 잠들어 있었다. 다행히 그가 들어와 깨긴 했지만, 살가운 성격은 아닌지 곽정은 멀뚱멀뚱 눈만 뜬 채 그를 바라본다. 술도 좀 따라주고 말도 붙여야하거늘. 못 마땅하단 표정으로 긴 속눈썹으로 눈동자를 감춘 기진은 제 스스로 술을 따랐다. 묵직한 술병을 들어 술잔에 투명한 백주를 흘리자 다물린 정이의 입술이 벌어진다. 술. 한 번도 먹어보지 못 했는데.


“술..”

“....”


그의 앞에서 처음으로 정이가 목소리를 내었다. 야살스런 연지가 발린 도톰한 입술 사이에서 뱉어진 말이 “전하.”도 아니고 “전하를 뵈옵니다.” 도 아니고 “전하, 이제 그만 잠자리에 드시어요.”도 아니고 고작해야 “술.”이라니. 김이 새도 한참을 샜다. 이 추운 겨울밤에 호숫가를 돌아다니며 어린 시절 외우느라 혼쭐이 난 공자의 말을 수십 번을 돌이키며 문란한 상상을 접으려 노력했건만, 그 노력이 무색하다.


“부인도 마시겠소?”

“네?”


주기진의 물음에 잠이 홀딱 달아다는 것 같다. 부인이란 말을 들으니 어딘가 석연찮다. 느낌이 이상해. 별로 좋진 않아. 부인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하려고 했지만 굳이 대들었다가 또 혼날 것 같아 그건 조용히 다물고 대신 술을 마시겠냐는 물음에는 대답했다. 고개를 끄덕이다 아직도 머리에 오른 장신구에 목을 가누질 못할 것 같아 머리를 붙들며 상에 가까이 몸을 당긴다. 혼주가 아슬아슬하게 담긴 귀한 잔을 든 손은, 정이가 조금씩 다가 올 때 마다 저도 모르게 이리저리 움직인다. 덕분에 잔에 담기기만 할 뿐, 목구멍 안을 뜨겁게 태워야 할 술은 기진의 손가락 아래로 흘러내렸다. 남자답게 뻗은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려 입에 대지도 않은 당과에 뚝뚝 떨어지는 것을 먼저 발견한건 정이였다. 크게 다른 이유는 없고, 그저 졸음이 쏟아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와중에도 주안상에 차려진 당과는 먹고 싶었던 기억이 떠올라서였다. 아.. 술이 흘렀어. 이 상태로도 먹을 수 있을까.


“술이 흘러요.”

“뭐?”

“술이 흘러요.”


정이의 신랑은 말도 여러 번 해야 알아듣는 모양이다. 사부들이 정이에게 늘 그랬었는데. 넌 왜 한 번에 알아듣질 못하냐고. 사부 생각을 하니 또 몽골이 그리워져 침울해진 정이는, 뺨을 손등으로 쓸고 텅 빈 잔을 들었다. 정이가 재차 대답을 한 후에야 술을 줄줄 흘리고 있는 잔을 내린 기진은 과도한 몸짓으로 술병을 들어 정이의 잔을 채운다. 그러면서도 연신 헛기침을 했다. 술을 따라주면서도 눈은 다른 곳을 보고 있고, 마치 온 몸으로 나는 너를 보고 넋을 놓은 게 아니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물론 주기진이 그러든말든 곽정의 관심은 오로지 술 밖에 없었다. 신랑이 술 잔 밖으로 넘치게 따르기 전에 술병의 입구를 들어올리곤 기진이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홀라당 술을 목구멍으로 훌훌 넘겨버린다.


“독한 술인데..!”


기진이 하려던 말은 그것이었다. 약관을 넘기도 전에 술부터 배워 술이라면 독으로도 비울 수 있는 기진과 달리 정이는 술에 호기심을 보이는 것을 보니 필시 이전에 마셔본 적 없을 터다. 한 번도 마셔보지 않은 사람이 독한 술을 마시면 좋지 않을 텐데. 그래도 겨우 한잔 마신 것뿐인데 벌써부터 전전긍긍 앓는 기진은 눈을 댕그랗게 뜨고 술잔을 내다보는 정이에게서 잔을 빼앗는다. 정이는 손쉽게 그에게 잔을 내어줬다. 처음 먹어보는 술이 굉장히 맛이 없다. 아마 정이에게 금은보화를 쥐어주고 술을 먹으라 하여도 한참을 고민할 것 같은 맛이었다.


“배가 타는 것 같아요...”


배에서 불길이 치솟는 것 같다. 윽. 목안에서도 이상한 향이 나는 것 같아 상궁이 누누이 젓가락을 이용해 정갈하게 음식을 먹어야한다 그리 귀에 닳도록 말한 것을 잃고 손부터 내밀어 술이 닿지 않은 끄트머리의 당과를 집어 입안에 넣는다. 아직도 쓴맛이 나는 것 같아 달게 부서지는 당과를 꼭꼭 씹는데, 아무렇게나 소매를 걷어붙인 제 손이 눈에 들어와 흠칫 놀랐다. 건너편에 앉은 신랑의 눈도 정이의 손에 닿아있어서 그게 부끄러워 이제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척 소매를 내려 손을 감췄다. 몽골에서 와서 지저분하게 먹는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명나라 사람들은 몽골 인을 야만인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아닌데. 하지만 정이가 아니라고 해명한들 들어주지 않을 게 분명하다. 정이의 몸을 씻기고, 머리를 빗겨주고, 곱게 단장해주는 상궁들과 궁녀들도 다를 것은 없었다. 황자와 혼인하게 되니 저들보다 훨씬 윗사람이라 예는 갖추지만 은연중에 드러나는 무시가 느껴졌다. 그런 것들이 모두 정이를 주눅 들게 만들었다. 애초에 곽정은 자신만만한 사람이 아니다. 


입가에 묻은 술도 손가락 끝으로 조심스레 닦아내고 다시 가만히 있으려 했는데, 급하게 먹은 당과가 입에 맞아 자꾸만 시선이 간다. 생각해보니 오늘 일어나서 아무것도 안 먹었구나. 간간히 물만 마시고 요기가 될 만한 것은 하나도 먹지 않은 걸 떠올리니 더 배가 곯는 것 같아 작게 한숨을 쉰다. 나름대로 안 들리게 한다고 했는데, 맞은편의 신랑의 눈이 닿아있으니 괜히 불편하다. 두 손을 맞잡아 소매 안으로 감추고 꿈지럭 대는데, 그 때 기진이 입을 달싹였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먹어도 되오.”

“....”


먹으라는 말에도 망설여진다. 이렇게 먹어도 되는 걸까. 식사예절은 많이 배웠는데 그래도 실수하면 어떡하지. 아니, 그전에 배가 고픈 것도 고픈 거지만 머리를 내리는 게 우선인 것 같아 큼, 큼. 제 걸걸한 목소리를 어떻게든 곱게 내기 위해 목을 가다듬은 후에 소맷자락을 꽉 붙잡으며 그에게 말한다.


“전하.”

“그래.”

“머리.. 좀 내려주세요..”


주세요가 아니라, 주시어요? 주시길 망극하옵나이다.. 머리를 내려주시오소서? 주시옵소서? 좀 전에 했던 말이 실수 일까봐 걱정이 되는지 무거운 머리를 숙인 채 다시 웅얼거렸다. “내려 주시어... 아니, 주시옵소서...” 그 마저도 병아리가 앓는 듯, 귓가에 간지럽게 닿는다. 주기진은 다 들었으면서도 머리에 들어오는 것이 없는지 멍하게 되물었다. 뭐라고?


“머리가...”

“...”

“무거워서...”


고개를 들지도 못하겠어요. 이어진 말은 목구멍 안으로 삼켜진다. 그저 정이는 ‘무거우니 내려달라.’는 의미였으나 머릿속에서 문란한 상상을 미처 다 지우지 못한 기진은 정이가 그에게 ‘어서 꽃잠을 자자.’고 재촉하는 것 같아 귓바퀴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래서 아직도 ‘주시오소서.’가 맞는지, ‘주시어요.’가 맞는지 헷갈려 고민하고 있는 정이 앞에 가지런히 놓인 주안상을 옆으로 물렸다. 데굴데굴 굴러가던 머리가 멈춘다. 아픈 목을 들어보니 촛불 때문이지 얼굴이 빨갛게 된 신랑이 정이에게로 손을 뻗었다. 물린 주안상덕에 더 가까워져 뻗기만 해도 손끝에 머리 장식이 닿는다. 드디어 이 무거운 것들에게서 해방 될 수 있단 기쁨에 작게 웃음 지으며 고개를 내밀자 내밀어진 기진의 손끝이 파드드 떨렸다. 속이 쿵쿵 뛰어 도저히 살 수가 없다. 그래서 기진은 몸을 더 앞으로 당겨 정이의 앞에 바짝 붙어 앉았다. 큰 손으로 조심스레 베일을 걷자 그동안 옅게 드러나던 정이의 흰 얼굴을 보곤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곱게 내려가 있던 눈이 들려 그와 정면으로 눈을 마주치자, 기진은 어디선가 난꽃 향이 나는 것 같아 입술을 꿈틀댄다. 정이는 바로 눈을 아래로 떨어뜨리곤 얌전히 두 손을 마주잡는다. 밉보이게 되면 평생이 힘들 것이라고 했으니 밉보이지 말아야지. 아니다. 밉보여서 몽골로 쫓겨나면 어떨까. 몽골을 떠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그 곳이 그립다. 몸을 휘감는 바람. 끝이 없는 들판.


신부가 벌써부터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기진은 가느다란 백옥 비녀를 하나 뽑는데도 손이 부들거렸다. 땅속에 깊이 박힌 것도 아닌데, 뽑는데도 오래 걸린다. 한참을 걸려 겨우 봉황의 모양을 한 화려한 머리장식과 비녀 두 개를 빼내고는 아, 이럴게 아니라 관 모양이니 그저 머리에서 들어 올리면 된다는 것을 뒤늦게야 깨닫고 내내 정이를 괴롭힌 봉관을 들어올렸다.


“아으...”


거의 어린 아이 무게 정도는 나갈 관이 머리에서 사라지자 찌뿌듯한 목이 살아나는 것 같아 절로 목에서 신음성이 흘렀다. 덕분에 기진이 바닥에 관을 내려놓으려다 실수로 떨어뜨렸는데, 정이는 혹시나 저렇게 귀해 보이는 것이 깨졌을까 노심초사 하는 마음에 손을 뻗어 기진의 손아래의 관을 매만진다. 만지는 것은 저가 아니라 머리장식인데,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기진은 오히려 정이의 손을 덥석 잡고는 자신의 품안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정이는 쑥, 안겨 오질 않는다. 아무리 뻗어도 당겨지지 않았다. 대신 물끄러미 저를 쳐다보는 말간 눈만 보일뿐.


“네?”

“머리를 내려 달라 했으니 이제.. 꽃잠을 자야하는 것 아니냐.”

“...꽃잠?”


쑥스러운 얼굴을 한 신랑을 보며, 정이는 가만히 눈썹을 좁혔다. 꽃잠이 무어더라. 분명 들었던 것 같다. 발음이 굉장히 익숙하다. 하지만 무슨 뜻이었는지 잊어버렸다. 꽃잠. 꽃잠. 잠은 자는 것이니까.. 꽃을 옆에 두고 자야하는 걸까. 첫날밤이니까 꽃을 주변에 놓아두고 그 안에서 자는 것일까? 아니면 겨울이니까.. 얼른 이 추위가 가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꽃을... 점점 상상력은 깊어지고, 어디가 끝인지도 모르게 파고 들어가는 순간, 기진이 다시 한 번 정이를 잡아당겼다. 그 때는 생각에 빠져있는 터라 정이도 그에게 딸려간다. 그리고 궁녀들이 곱게 펴준 두터운 요 위로 몸이 눕혀졌다. 몸이 뉘여지자 마자 꽃잠의 의미가 떠올랐다. 새신랑과 새신부가 동침하는 것이다. 


“어...”

“걱정할 것 없다. 내가 다 알아서 하마.”

“어어...”


몽골에서는 희한한 요괴까지 봤었는데도 동침은 무섭다. 신랑의 잘난 얼굴을 보고 있어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기진의 손에서 불편한 옷들이 하나 둘 벗겨나가자 마음이 더 조급해진다. 그래서 속곳에 닿은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기진은 유독 화들짝 놀라며 정이를 본다.


“왜, 왜, 왜... 싫으냐?”


싫다면 억지로 할 생각 없다. 그게 아무리 첫날밤이라 한들. 전적으로 신부의 기분에 따라 줄 수 있다. 다만, 정이가 싫다고 그를 내친다면 조금 울기야 하겠지만. 이미 5황자가 잘하는 것 중 하나가 우는 것이라고 궁 안을 넘어 궁 밖까지 소문이 자자하니 더 이상 창피할 것도 없다.

싫어도 황자를 어떻게 밀어낼까. 정이는 연지가 발린 입술을 오물대다 중얼거린다. “전하께선 다른 부인이 계신 거죠?” 싫다고 말 할까봐 노심초사 했는데 정이에게 나온 말이 나 말고 누가 있는 게 아니냐는 물음이라 당혹스럽다. 기진은 더듬더듬 그렇다고 대답하자마자 뾰로통해지는 정이의 얼굴에 심장이 짓이겨지는 것 같다. 숨 쉬는 게 버거웠다. 뾰로통해졌다는 건 주기진의 생각일 뿐이었고 실은 곽정은 그저 “그렇구나.” 하는 표정일 뿐이었다. 그저 나는 처음인데 저 인간은 처음이 아니라 좀 억울한 기분도 들고.


“내가 어찌할까. 너를 정비로 올릴까?”

“네?”

“아니.. 당장은 그리 힘들다.. 당장은 힘들고... 네가 아이만 하나 낳아준다면..”


그러나 자연스레 아이 이야기를 꺼낸 기진은 눈앞에 통통한 입술을 한 호접란 선녀가 선녀가 아니라 남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세상이 무너진 얼굴로 좌절한다. 명나라에 온 이후로 내내 위축되어있던 정이는 갑자기 신랑이 낭패한 표정으로 이마를 짚는 것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랑은 바보가 아닐까. 정이는 남자라 아기 못 가지는데. 아무리 꽃잠을 자고 꽃씨를 뿌려도 아기는 안 생긴다. 그리고 정비가 될 생각도 없다. 정이는 시집온 초반엔 총애를 받아 어머니께 많은 금은보화가 상으로 내려질 때 쯤 밉보여 궁 구석에 혼자 처박혀 살고 싶었다. 나아가서 몽골로 내쫓기면 훨씬 더 좋다. 그러나 기진의 정실이 되면 밉보여 내쫓기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정이는 처음으로 단호하게 내뱉었다.


“싫어요.”

“뭐..?”

“정실 되기 싫어요.”

“...아니 그럼.. 나더러 어쩌란 말이냐?”


그건 정이가 묻고 싶은 말이다. 왜 갑자기 나한테 정실이 되고 싶으냐고 하는 거지. 그런 말 꺼낸 적도 없는데. 신랑에게 말이 통하질 않으니 답답하다. 정이에게 늘 답답하다고 하는 사부들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았고, 동시에 속상해졌다. 나는 아직 한참 멀었나보다. 노력 많이 했는데.. 어차피 이제는 수련을 할 일도 없겠지만. 마음이 아파오고 쿡쿡 찔리는 것 같아, 기진의 팔을 잡아당기며 그를 재촉했다. 이렇게 된 이상 얼른 꽃잠이라는 것을 끝내버리고 잠에 들고 싶다. 동이 트기도 전에 일어나 새카만 밤이 될 때 까지 쪽잠만 겨우 자고 내내 쉬질 못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