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차여차
곽호 썰, 소설 올리는 블로그 @tarack_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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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재 완 결 단 편 기 타 방명록



   여차여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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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했던 일은 우선 부모님들께 임신소식을 알리는 일이었어. 어쩌다보니 건화부모님께 먼저 알려드리게 됐는데, 두 분 다 이걸 좋아해야하나, 말아야하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반응들이셨어.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건화도 아직 젊고, 후거는 젊은 것 보단 어리다는 나이인지라 둘이 벌써 아이가 생긴 게 그리 달가운 일은 아니었지.


“초기니까 몸조심하고...”

“네에..”

“어휴.. 무슨 말을 해줘야할지 모르겠다. 엄마도 건화 가졌던 게 한참 전이고... 남자는 또 다를 거 아니야. 건화 네가 신경 많이 써줘.”

“그럴게요.”


욕 한바가지 얻어먹을 각오를 하고 왔는데 생각보다 일이 쉽게 끝났어. 후거도 긴장을 풀고 사르르 녹아내렸지. 시부모님 댁에 한 달 전부터 들어와 함께 살기 시작한 강아지 머리를 매만지면서 웃었어. 눈을 반달처럼 휘고 접으면서 웃는 얼굴이 마냥 어리게만 보여서 건화도, 건화의 두 부모님도 양심의 한 구석이 콕 찔렸어. 저 어린 것이.. 애를.... 그 것뿐만 아니라 이미 유산해본 적이 있는지라 걱정은 더 컸지. 쉽사리 입 밖에 꺼낼 만한 일은 아니라 두 분다 그 말씀은 없으셨지만. 갑자기 말수가 준 두 분 때문에 후거도 대충 눈치 채고 일부러 더 밝은 척을 했어. 강아지 이름이 뭐였더라? 얘가 그 포메라니안이죠? 엄청 귀엽다.





건화네 부모님께는 그렇게 말씀드렸고, 문제는 후거네 부모님이었어. 후거야 뭐 엄마랑 아빠 별 생각 없을 거라고 빨리 말하자고 했는데 건화는 아니었지. 말씀드린다는 상상만을 해도 등언저리가 서늘해지는 것 같아. 미룰 수 있는 만큼 미루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애석하게도 어젯밤 장인어른이 저녁 들러 오라고 하시는 바람에 그럴 수도 없게 됐어. 저녁 먹으러 오라는 말을 들었을 때 곽건화의 심장이 내핵까지 떨어져서 파고들었지. 혹시나 알고 계신 걸까봐... 그리고 찔리는 게 많은 남자인 곽건화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처가댁의 현관에서부터 그 가벼운 무릎을 아래로 치박았어.


“곽서방! 뭐하는 건가!”

“아으, 아저씨 왜 그래! 일어나!”

“잘못했습니다...”

“아니, 무, 뭐, 뭐가? 뭐가 잘못했...”


건화가 무릎을 꿇자마자 후거가 펄쩍 뛰었어. 두 분은 갑자기 사위가 무릎 꿇고 사죄를 하니 무슨 일인지 도통 이해를 못하셨지. 그야 아무 말도 안했으니까. 뭘 잘못했길래 집에 들어오자마자 무릎을 꿇는 건지.. 우선 됐고 일어서라고 하려는데.


“아저씨 혼자 만든 것도 아닌데 왜 그래! 빨리 일어나요!”

“뭘 만들어?”

“응? 응? 그게...”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제가 더 신경을 썼어야하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설마, 설마 후거 너 임신했니?”

“임신?”


눈치로 둘째가라고 하면 서러울 후거의 엄마는 고작 그 몇 마디로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했어. 임신.. 임신...


“응.. 나도 얼마 전에 알았어.”

“아니, 아니... 식 올린 지 몇 달 됐다고 벌써 임신이야..!”

“음.. 두 달?”

“하이고...”

“몰라. 이미 임신한 걸 어떡해. 아저씨 일어나. 응? 이제 됐잖아.”


장모님은 뒷목 잡으시고, 장인어른은 뒤로 넘어가는 아내 붙드느라 여념이 없었어. 그 와중에 후거는 아직도 무릎 꿇고 있는 건화가 마음에 안 들어서 코가 찡그려질 정도로 입을 크게 부풀고 건화의 팔을 잡아당겼어. 뭘 잘못했다고 무릎을 꿇어! 일어나! 무릎 꿇은 건화도 내심 언제쯤 일어나야하는지 타이밍을 재고 있던 상황이라 후거가 당기자마자 거절없이 바로 일어났지.


“우리도 어른인데 괜찮잖아.”

“그게 괜찮을 일이야? 너 애 낳는 게 얼마나.. 아니 낳고나서는 또.. 곽서방이 애 둘 키워야해. 둘.”

“...죄송합니다.”

“아니, 우리한테 죄송할 게 아니라 곽서방을 걱정하는 거지.”

“왜 애가 둘인데? 왜? 왜?”

“그걸 설명을 해야 아니?”


짧은 대화에서만 봐도 이미 애가 하나 있는데. 혀를 찬 장인어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아내를 부축하며 소파에 앉았어. 후거도 삐진 표정을 한 채로 건화의 손을 잡아 이끌었지. 소파에 나란히 마주보고 앉은 네 사람 중에 둘은 입에서 한숨만 터져 나오고, 후거는 삐져서 아무 말도 없고, 건화도 눈치 보느라 입을 꾹 다문 상태였지.


“그래... 몇 주인데?”

“삼주.”

“그래... 어휴.. 그래 네 말대로 이미 생긴 걸 어떡하겠어. 몸조심 좀 해. 또 설치고 다니지 말고.”

“설치다니.”

“엄마 말 들어. 이제 홀몸도 아닌데 너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못사니까 자제하는 법도 배워야지.”

“아빠도 진짜 너무해 내가 무슨 초등학생이야? 자제를 모르게?”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듣자 듣자하니 너무하네. 지금 나 빼고 셋이서 완전 나 애 취급하는 거잖아. 참나. 저도 산모거든요? 곧 있으면 애도 낳을 거거든요?

토라진 티가 역력한 채로 다리를 꼬고 부러 고개를 팩하니 돌리는데, 자기 딴엔 지금 화났다고 표시하는 거지만 그게 더 애 같아. 건화가 후거의 허벅지 위를 톡톡 치며 말을 걸어도 대꾸도 안 해.


“학교는 어쩌고?”

“방학까지 한 달도 안 남았으니 그냥 다니기로 했습니다. 다음 학기부턴 휴학해야죠.”

“일 년 정도는 휴학 해야겠네. 곽서방 자네는 언제 알았어?”

“저도 며칠 전에.. 면목이 없습니다. 후거 대학 졸업 할 때 까진 아이는 안 가지기로 했는데...”

“어려도 결혼한 사인데 뭐 괜찮아. 자네가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냥.. 자네 앞으로 힘들 거 생각하면 우리가 미안하지. 후거 저거 철도 안 들었는데..”


삐진 척 귀만 쫑긋 세워 모든 이야기를 낱낱이 듣고 있던 후거는 ‘철’이야기에 발끈했어.


“사람 앞에 있는데서 욕하지 마.”

“욕이 아니라 사실이잖아.”

“아저씨 우리 집에 가자. 응? 나 여기 있기 싫어.”

“저녁은 먹고 가야지.”

“집에 맛있는 거 더 많아.”


여기 있어봤자 엄마랑 아빠가 아저씨한테 내 욕만 왕창 할 것 같아서 손해 보는 기분이야. 시댁에 있을 때가 분위기가 더 좋았어. 볼에 심술보가 그득한 얼굴로 건화를 붙잡고 가자고 했지만 건화는 처갓집에 발 들인 순간부터 후거 편이 아니라 엄마편이라서, 후거의 가자는 조름에도 꿈쩍도 안했어. 남편이 이래서 남편이야. 내 편 아니라니까?


“아이고 좋으시겠다. 더 많아도 오늘은 엄마가 해준 거 먹고 가. 임신도 했다면서.”

“그럼 내 욕을 하질 말던가!”

“알았어, 알았어. 어휴 너만 오면 정신 시끄러워.”

“씨이. 불러놓고는.”

“임산부가 말조심 좀 해라. 뱃속에 애 다 들어.”

“아. 아아.. 아아아... 여기 태교에 완전 안 좋아.”


말 한마디 마다 꼬투리를 잡으니 살 수가 있나. 입을 꿈틀거리고는 눈에도 안 들어오는 책을 잡아 펼쳤어. 월간 낚시. 아빠 낚시도 더럽게 못하면서. 세 시간 동안 한 마리도 못 잡으면서. 흥.





어찌됐든 그렇게 걱정한 거에 비해서는 큰 탈 없이 잘 지나갔어. 어려운 문제 해결했으니 다행이었지. 후거의 입덧은 아주 잠깐 찾아왔다 금방 가버린 줄 알았는데 건화와 함께 산부인과에 들려서 이야기 듣고 나서부터 다시 입덧이 찾아왔어. 전엔 냄새가 심한 음식 앞에서만 입을 가리더니 어젠 주스냄새에도 기겁하고 도망가더니 헛구역질을 했어. 입덧은 후거가 하는데 곽건화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지.


“괜찮아?”

“우윽. 안 괜찮아.. 나 죽어... 이러다 죽나봐..”


고작 헛구역질 두어번 했다고 죽는다고 엄살을 피면서, 결국 가서는 침대 위에 누워 힘이 다 빠진 사람 마냥 굴었어.


“엄청 힘들어.. 주스도 못 마시고...”

“물 마실까? 물은 괜찮아?”

“물 싫어.. 주스 먹고 싶어.”


주스를 못 마시는 게 무조건 주스를 먹고 싶대. 건화의 베개를 끌어안으며 혼자 중얼중얼 댔지.


“망고주스.. 오렌지주스.. 토마토주스.. 사과주스... 그리고 또, 또...”

“잠깐만 기다려. 주스 사올게. 하나 정돈 먹을 수 있겠지.”


주스 한 잔 못 마셔서 죽기 직전의 위기에 처한 아내를 두고 급하게 자켓과 지갑을 챙겨 방을 빠져나가. 후거는 여전히 축 쳐진 눈으로 슬프게 눈을 깜빡였어.


아.. 갑자기 주스 말고 사이다 먹고 싶다...





앞으로 몇 개월간 음식 배달 노예의 서막을 알리는 건화는 뒤로하고, 명대 같은 경우엔 정말 큰 위기에 처해있었어. 저번에 청명의 집에서 금운과 마주 했을 때만큼.

하루 더 외박하고 집에 돌아오자, 명루가 은근히 명대가 청명과 사귀는 걸 반대하는 눈치더니 누나가 일주일 출장 간 틈을 타서 명대의 발을 명공관에 죄었거든. 학교 갈 거 아니면 나가지 말라는 거야.


“좀! 아, 형 왜 그래!”

“난 반대야. 고청명 말고도 세상에 좋은 양인은 넘치고 흘러. 너랑 나잇대도 비슷하고..”

“됐고 나갈래. 나가게 해줘! 계속 이러면 경찰에 신고한다!”

“경찰 오면 돈 쥐어주면 돼.”

“와, 미치겠네! 고청명은 그런 짓 안 하거든?”


경찰 부른다는 말에 당연하다는 듯 튀어나오는 말에 명대가 뒷목을 부여잡았어. 와. 진짜.. 암 걸리겠다.


“명대 너 정신 차려. 너 서른이면 고청명은 사십대야! 서른이면 아직 젊은데 고청명은 아저씨라니까?”


답답한 명루가 도망가려는 명대를 붙잡고 타이르듯 이야기하는데, 아저씨 고청명 이야기에 명대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화했지. 쫑알쫑알 불만을 토해내던 입술이 다물리더니 눈초리가 예사롭지가 않아. 불안한 마음에 명루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어.


“사십대 고청명 생각하니까 장난 아니다. 완전 섹시할 것 같은데.”

“형님. 아무래도 미친 거 같은데 병원부터 데려가야 하지 않을까요.”

“...하..”


정신 차리라고 아저씨 이야기를 꺼냈는데 거기다대고 섹시할 것 같다니. 잠자코 둘이 싸우는 걸 지켜보던 아성이 한마디 거들었고, 명대가 그 말에 빽빽댄 건 당연한 일이었어. 아성에게 매달려서 내가 어디가 미친 거냐고 밖에 안 보내주는 형이 미친 거 아니냐고 목에 헤드락 걸고 대들다가 역으로 아성에게 팔이 붙잡혀서 아프다고 칭얼거려. 하아. 정신이 하나도 안 든다. 고작 몇 마디 했는데 두통이 도지는 것 같아 고개와 팔을 내저은 명루는 소파로 가 앉았고 명대는 여전히 아성과 몸부림을 치며 싸우고 있었어.


“집에 먼지 날린다.”

“학교 갈래!”

“기사 데리고 다녀.”

“진짜 이거 완전 아동학대 아냐?”

“넌 아동 아니잖아.”

“누나한테 다 이를 거야!”

“일러라, 일러.”


씨이. 아, 이걸 어떡하지.

제풀에 나가떨어진 명대는 괜히 아성에게 발을 툭 차며 시비를 걸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어. 힘으로 형들 못 이기는데. 사실 학교야 가든 말든 상관없는데 집을 못 나가면 고청명이랑 데이트를 할 수가 없잖아. 어제부터 지금 거의 감금 상태인데. 명루를 보아하니 명대가 고청명과 헤어지지 않으면 집 밖에 안 내보낼 기세야. 이제 와서 왜 저러냐고. 내가 고청명 좋아한 거 하루 이틀이 아닌데. 그러고 보면 형은 내가 고청명이랑 사귈 수 있다고 생각을 안 한게 분명해. 아. 자존심 상하네. 괜히 눈을 부라리며 두 형을 노려보다 좀 더 일을 도모하고 생각해야겠다 싶어 위층으로 올라갔어. 일부러 화난 티를 내려고 목재계단을 쾅!쾅!쾅! 밟으며 올라섰지. 삐걱대는 소리와 함께 쾅쾅 찧는 소음에 아성의 짙은 눈썹이 찌푸려져.


“집 다 부서지겠다!”

“부서지든 말든!”


명루의 목소리에 크게 고함친 명대는 혀를 쭉 내밀어 메롱-하곤 제 방으로 도망가 버렸지. 아성도 명루도 어린애나 다름없는 그 모습에 한숨만 나와. 하아.. 저걸 어떻게 해야 하나. 말 안 들은 역사가 너무 길어서 답이 안 보여.




벌써 고청명 못 본지 이틀째야. 그러니까 집 밖에 못 나간 지 이틀째란 이야기지. 그 말은 명대가 학교를 가지 않은 지도 이틀째란 거고.

거의 매일같이 청명을 보다가 이틀간 못 보니까 온 몸에 가시가 돋는 것 같고 금단 증상에 손발이 떨리는 것 같아. 큰 문제야.. 큰 문제라니까..


“미쳤다...”


보고 싶어 죽을 것 같아. 고청명은 내가 보고 싶을지 모르겠지만. 아니. 아니. 나는 이렇게 보고 싶은데 자기는 어제 저녁에 전화해서 하는 말이..


─  학교는 왜 또 안 나와?


아니. 내가 갑자기 학교에 안 나가면 걱정을 해야지. 왜 또 말 안 듣고 학교 안 나오냐는 듯이 혼내려고 하는 거야. 저번에 내가 하루 학교 빠진 게 아파서가 아니라 그냥 빠졌다는 걸 들켜서 그런가. 요즘 들어 좀 다정하다 싶었더니 또 원래대로 딱딱한 고청명으로 돌아와서 마음에 안 들어.


마음에 안 든다고 하면서도, 명대는 바로 휴대폰을 켜서 청명에게 문자를 보냈어. 뭐해요? 아침 먹었어요? 수업 중이에요? 한 번에 세 가지를 묻고 휴대폰 화면을 노려보는데 답장이 안 와. 진짜 수업중인가. 보낸 지 몇 초 지났다고 답장이 안 오는 거에 안절부절못하다 제 성미에 못 이겨 그대로 휴대폰을 침대 위로 집어던졌어.

나 진짜 정신병인가 봐.


갇혀있으니까 휴대폰 만지는 거 말곤 할 것도 없고 저 망할 형들은 집 밖에 내보내주질 않고. 확 창문에서 뛰어내릴까 고민했는데 떨어져서 다치면 아프니까 그건 안 할래. 하지만 고청명이랑 데이트 하고 싶은데.


책상에 앉아서 교재를 펼쳐서 읽으려고 노력하지만 눈에 안 들어와. 필기자국 하나 없이 깨끗한 새책 같은 교재를 다시 한 번 주루룩 넘기고 도로 덮었어. 이대로 서점에 가서 몰래 꽂아 넣어도 중고 책이라고 아무도 생각지도 못할 새 책 같은 교재 말이야.


하아.. 뭘 하지. 게임도 이틀간 할 거 다 했는데. 집 기물이나 다 부셔버릴까.

책상 의자에 늘어져서 무슨 짓을 해야 명루가 학을 떼고 자신을 집에서 쫓아 보낼지 고민했어. 쫓겨나면 바로 고청명 집에 살림 차릴 건데.

음. 으음.. 으음... 그러다 창 밖에서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열어 고개를 내밀었지. 아성이랑 명루가 출근하고 있었어. 둘이 나갔다고 집을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닌 게, 대문 앞에 경호원들이 버티고 서 있어서 그 경호원들 때려눕히고 나갈만한 힘은 없어 머리를 굴려야했지. 명루형이 학을 떼고.. 날.... 그러다 번뜩 드는 생각에 살금살금 발꿈치를 들어 소리가 나지 않게 아래층으로 내려갔어. 다행히 거실엔 아무도 없었지. 주변 상황을 다시 한 번 살피고 명루의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어. 순간 문이 열리며 삐걱하는 소리가 났는데, 다행히. 아무도 듣지 못했어. 애초에 거실에 아무도 없긴 하지만. 명루를 닮아 깨끗하고 군더더기 없는 방 안에 들어선 명대는 역시나 소음이 나지 않게 문을 걸어 잠그곤 그 때부터 대담한 걸음걸이로 걸어 옷장 문을 벌컥 열었어.


“허, 참.. 나한테는 무슨 옷을 매일같이 사냐고 하면서 자긴 넥타이만 오십 개가 넘네.”


이거 완전 과소비 아냐? 어? 넥타이 그 까짓 거 한 일곱 개 사서 월화수목금토일 돌려막기 하면 되지 뭐 하러 이렇게 많이 필요해? 어? 히드라야? 목이 여러 개야?


언젠가 명루가 명대의 수십 켤레 신발을 보고 지네냐고 신발이 왜 이렇게 많이 필요하냐고 했던 것이 뒤끝이 남아 한참 욕하다 옷장에 넥타이 걸이에 하나하나 바르게 정돈 된 넥타이들을 냅다 잡아 빼냈어. 명대의 가는 손가락에 넥타이 수십 개가 딸려 나왔고, 손안에 든 어두운 톤의 넥타이를 대충 하나씩 집어 보는데 딱 봐도 명대 신발 가격이랑 별 차이도 안 나는 브랜드 꺼잖아. 이래놓고 왜 나한테만 잔소리야.


“흐으음..”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어떻게 해야 우리 명장관님을 골려줄 수 있을까. 넥타이에 낙서를 할까. 아니면 가위로 난도질을 할까. 뭘 해도 명장관님 뒷목에 힘줄 생길 거 같긴 한데. 그 걸론 부족해. 내가 지금 얼마나 괴로운데 말이야. 내가 한 살만 어렸어도 청소년 학대로 확 신고해버리는데..


“어.”


넥타이를 한참 감상하다 짙은 회색에 파란 얇은 세로 줄무늬 넥타이를 들었어. 이거 교수님이 하면 예쁘겠는데. 그 넥타이만 허공에 들어 쳐다보는데... 어젯밤에 고청명과 한 대화가 떠올라 명대의 한쪽 볼이 빵빵해졌지.


“저 집에 감금 됐어요.”

─ 감금?

“형이 안 내보내줘요. 빨리 구하러 와요, 교수님.”

─..형님이 그러시는 데엔 다 이유가 있겠지.

“그래서 구하러 안 온다는 거예요?”

─ 형님의 결정을 존중하는 거야.

“내가 내 발로 내 나라 땅 밟겠다는 존중은 왜 안 해줘요? 너무하다. 삐질 거예요. 내일 전화도 하지 마요.”


아니. 애인이 감금당했다고 말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평온할 수가 있어? 어? 고청명 완전 족욕하는 사람 마냥 편안하고 느긋하고 한 치의 망설임 없이 ‘형님의 결정을 존중하는 거야.’ 라고 하는데 열 받아서 휴대폰 반으로 부서뜨릴 뻔 했잖아. 몇 달 전에 새로 바꾼 거라 부수진 않았지만. 거기다 지금 까지 진짜 전화도 안 왔어. 사람이 왜 이렇게 말 안 들어야할 건 잘 듣고 그러냐고.

아직도 내가 고청명을 더, 더, 더, 더, 더 좋아하는 것 같아. 아니.. 내가 더 좋아하는 거야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고청명이 날 좋아하는 감정이 내가 고청명을 좋아하는 감정에 반은 될까 싶어. 그냥 불쌍해서 만나주는 건 아니겠지.


“....푸후우우.”


며칠 전에 사랑해 소리 못 들었으면 엄청 땅 파고 들어갔을 텐데. 그래도 교수님이 나 좋아하긴 할 거야..


이랬다, 저랬다. 일분 만에도 감정이 수십 번씩 롤러코스터를 타고 있었지. 확실히 갇혀 있다보니 원래도 그 다지 평범하지 않았던 명대의 정신이 하늘나라로 떠나고 있었어. 이게 다 명루형 때문이야. 아성이형도 왜 말리지도 않고 큰형이 못 나가게 할 때 옆에서 웃고 있었냐고. 얄밉기론 아성이형이 최고인데... 아성이형 건드리면 얻어맞기 때문에 아성은 나중에 어떻게 하기로 하고. 일단 큰 형 부터야.


넥타이란 넥타이는 다 끄집어내 둘둘 말아서 위층으로 잽싸게 올라왔어. 거실엔 여전히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야. 심장이 격렬하게 뛰는 와중에 방에 도착한 명대는 침대 위에 넥타이 뭉치들을 내려놓고 침대보 위에 일렬로 정리 후에 좀 전에 집어던졌던 휴대폰을 들어 카메라를 켰어. 찍는다. 사진. 올린다. 명품 거래 카페.


난 천재야.



***



매일같이 [아저씨 나 돼지고기 먹고 싶어. 나 딸기 먹고 싶어. 나 사과사탕 먹고 싶어. 나 치즈만 이마안큼 올린 피자가 먹고 싶어.] 하고 먹고 싶은 것들 산더미인데 막상 사오면 [나 갑자기 근데 양고기가 먹고 싶어. 양꼬치. 딸기 별로 맛없는 거 같애. 사과 사탕 너무 커서 먹기 힘들어서 안 먹을래. 치즈 먹으니까 느끼해서 먹기 싫어.] 하고 음식 배달 노예의 허탈함을 가중시키던 후거는 주말을 맞이하여 건화를 좀 덜 괴롭히기로 했어. 본인도 양심에 찔렸거든. 건화가 힘들게 구해왔는데 억지로 먹으려니까 넘어가지도 않고, 건화도 후거가 억지로 먹는 건 싫어서 도중에 빼앗았어. 진짜 미안한데 안 넘어가는 걸 어떡해. 아저씨가 현관문 열고 나갔다가 다시 현관문 열고 들어오는 순간 다른 음식이 먹고 싶어지는 걸 어떡해..


하여튼 그러다 보니까 건화도 피곤한 거 같고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어. 때 마침 감금 상태의 명대가 매일같이 전화해서 심심하다고 찡찡대서 명대네 집에 놀러가기로 했지. 건화가 태워다준다는 걸 거절하고 택시를 타고 명대네 집에 갔어. 두 번째 보지만 집 진짜 크다. 넷이서 살기엔 너무 큰 거 아닌가. 넷이 아니라 열둘도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하긴 우리 집도 둘이서 살기엔 크긴 하지만..


큼, 큼. 목소리를 가다듬은 후거는 초인종의 벨을 꾹 눌렀어. 대답이 없어서 다시 한 번 꾹 눌렀지. 그러자 젊은 여자 목소리가 누구시냐고 물어. 저 명대 친구예요. 오늘 집에 놀러오기로 했는데.. 미리 이야기를 들었는지 후거의 말이 끝맺어지기도 전에 지잉 하고 묵직한 대문이 열렸어.


정원에 돌담길을 하나하나 밟으며 현관에 도착했어. 여기서도 두드려야 하나 싶어 조금 고민하다가 손잡이를 잡았는데 후거가 열어달라고 하기도 전에 문이 안쪽으로 열려서 깜짝 놀라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어. 문을 연 사람은 후거만큼 키가 큰 남자였는데, 후거를 보자마자 두꺼운 눈썹을 한껏 찌푸리더니 무서운 표정을 지었지. 후거는 본능적으로 이 남자가 명대의 형이라는 걸 깨달았어. 왜. 무서우니까.


“명대 너 언제 나갔어. 아까 2층에 있었잖아.”

“네?.. 네?”

“명대? 명대 아까 자기 방에 있는 거 봤는데.”


아성의 말에 놀란 명루가 현관문으로 다가오는데 아성의 말대로 명대가 현관 밖에 서 있었어. 거기다 못 본 옷을 입고 있었지. 이게 뭐야. 분명 오 분 전에 위에 있는 걸 봤는데 언제 내려갔어. 창문에 커튼이라도 달아서 오르내리는 건가. 기가 막힌 표정으로 명대를 보는데 후거는 지금 상황이 이해가 안 가. 어쨌든 인사부터 해야 할 것 같아 멈칫멈칫 눈치를 보며 고개를 숙였지.


“안녕하세요..”

“수작부리지 마. 그래도 안 내보내줘.”

“네?”

“네가 얌전히 말 잘 듣고 버텼으면 내일은 학교 보내줬을텐데 넥타이 다 갖다 판 건 너야. 두 달간 국물도 없어.”


덕분에 명루는 명대가 넥타이를 모조리 명품거래 사이트에 초특가로 올려서 하루 만에 다 팔아치운 나머지 다음 날 아성의 넥타이를 빌려 출근해야했어. 어쩐지 명대가 자꾸 택배를 싸더라.


“저기, 저는 명대가 아니라..”

“명대 연기 많이 늘었구나. 그래도 안 돼. 빨리 위로 안 올라가?”


무서운 두 형의 목소리에 겁먹은 후거가 어깨를 떨며 눈꼬리를 아래로 내렸어. 뭐야. 뭐야 나 왜 갑자기 혼나는 건데. 집에서 살면서도 부모님한테 혼난 적이 별로 없어서 처음 보는 두 남자한테 잘못하지도 않은 일로 훈계를 들으니 언성이 높아질 때 마다 목이 움찔움찔 거려. 후거가 잔뜩 겁먹은 채로 쳐다보자 그제야 두 형도 뭔가 이상한 걸 느꼈지. 명대가 이렇게 까지 연기를 잘하던가. 배우 시켜야할 정도인데.


“형, 나 여기 있거든. 어떻게 동생도 못 알아봐?”


지폐 뭉치를 팔랑팔랑 흔들면서 계단을 내려오며 명대가 말했지. 명대의 두 형님들은 눈앞에 명대가 있는데 뒤에서 명대 목소리가 또 들린다는 거에 깜짝 놀라 빠르게 몸을 돌렸어. 지폐 여러 장을 손에 들고 느적느적 걸어온 명대는 불퉁한 얼굴로 현관문을 잡아 더 넓게 열었지. 그러자 명대와, 또 다른 명대가 한 눈에 들어오는데, 그제야 둘의 차이가 보였어. 헤어스타일이나, 약간 다른 눈매 같은 것들이. 그래봤자 따로 보면 분간도 안 될 것 같지만.


“얘 내 친구야. 후거. 대학교 친구. 전에 누나는 봤는데 형들은 처음 보는 거일걸.”

“안녕하세요. 후거라고 합니다... 명대랑 과는 다른데 어쩌다가 친하게 돼서...”


명대가 딱히 형들이 무섭다고 확실하게 이야기 한 건 아니지만, 문 열자마자 처음 보는 형들에게 공격당해서 자기도 모르게 점점 목소리가 작아졌어. 어쩐지 너무 무섭다.. 너무너무 무섭다.. 그냥 나 집에 갈까봐...


“우리 명대 친구라고?”

“네? 네에.. 친구예요.”


조금 전 까지만 해도 무섭게 눈썹을 치켜뜨며 후거에게 뭐라고 하던 명루는 친구란 이야기에 화색하며 최대한 인상 좋은 형님 흉내를 냈어. 후거에겐 무서운 아저씨가 무서운 표정을 짓는 걸로 밖에 안보였지만. 후거가 그렇게 겁을 먹거나 말거나 명루는 눈앞에 심약하고 착한 명대가 있으니 기분이 좋지 않을 수가 없어. 지폐 손에 쥐고 팔랑팔랑 흔들며 당분간 용돈 없어도 난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고 어필하는 못된 동생을 버려두고 후거에게 밥부터 먹으라며 주방으로 안내했지. 내가 저럴 줄 알았어. 명대는 슬쩍 이를 갈며 지폐로 아성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어.


“이거.”

“왜.”

“이거 형 줄게.”

“고맙다.”

“아이씨. 그냥 받지 말고.”


명대가 돈을 내밀자마자 아무런 물음도 의문도 없이 바로 받아 챙기는 아성을 노려본 명대는 지폐 끝을 꽉 쥐며 인상을 찌푸렸어. 왜 주냐는 말도 없이 받는 게 어디 있어.


“나 내일 나갈 수 있게 해줘.”

“생각해볼게.”

“이거 액수가 얼마인지 알아? 큰형 넥타이 다섯 개 팔아서 번 돈이야. 그러지 말고 내일 좀 확실하게 나갈 수 있게 해줘. 나 데이트하고 싶단 말이야.”

“얼마 안 되는데.”

“아오. 진짜. 동생한테 돈을 받아먹고 싶냐?”


명대가 액수를 보라며 칭얼대도 무표정한 얼굴로 냉정하게 값을 매기는 아성에 뿔이 난 명대가 발을 구르며 발악해도 아성은 여전히 무표정했어. 내민 지폐에서 오히려 손도 떼며 말했지.


“싫으면 말고.”

“아니, 아니. 형님. 이 정도면 될까요?”


뒤돌아서는 아성에 애가 탄 명대는 주머니에서 지폐 여러 장을 더 꺼내 위에 올렸어. “이 정도면 되나요, 형님? 네? 네?” 눈을 크게 뜨고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어보이자, 아성이 흐음. 하고 미간을 좁히며 고민하는 척을 하더니 이내 힘겹게 승낙했어.


“좋아. 내일 아홉시 반에 출근하니까 그 뒤에 네가 알아서 해. 경호원은 내가 빼돌릴 게.”

“역시 작은형이 최고야. 최고. 제일 잘생겼어. 멋있어. 화끈해.”

“알아.”


동생에게서 지폐 뭉치를 받아 챙긴 아성이 시크하게 몸을 돌려 주방으로 향하는 걸 보고 명대는 뒤늦게 어금니를 꽉 깨물었지. 이 놈의 집구석...




“우리 명대랑은 언제부터 친하게 지냈는데?”

“어.. 한 한달? 아.. 아 두 달 정도 된 것 같아요.”

“그래? 아. 점심부터 어때요? 명대 너도 밥 먹었냐?”

“먹을래. 나 밥 해줘.”

“네가 퍼와.”

“진짜 취급 너무한다. 누나 오면 진짜 다 이를 거야.”

“네가 네 죄를 알렸지. 네가 그 짓만 안했으면 나도 너한테 안 이래.”


넥타이 몽땅 팔아치운 사건을 말하는 거지. 솔직히 명대도 잘못한 건 알아. 그치면 다 큰 동생 나이 많은 남자랑 사귄다고 집에 가두는 것도 잘못 된 거잖아. 아니 애초에 교수님이 나이가 뭐가 많아? 서른둘이면 한창이지? 어? 완전 정력도..


“저, 죄송한데.. 제가 지금 임신을 해서 못 먹는 게 많아요.”

“임신?”

“네. 입덧을 좀 해서..”

“임신...”


세상에 명대 친구가, 그것도 동갑이 임신을 했다는 말을 할 줄은 몰라서 명장관의 입이 크게 벌어졌어. 냉장고에서 주스를 꺼내오던 아성도 임신 소리에 뒤를 돌아봤지. 그 사이에 혼자 태평하고 모든 게 편한 명대는 식탁 위에 팔을 올려 턱을 괴면서 큰일 날 소리를 해.


“부럽다. 나도 임신하고 싶어.”

“너 이게 정말!”

“아, 왜. 뭐. 어쩌라고, 뭐.”

“할 말 못 할 말 가려야지. 너 그러다 진짜 큰일 나는 수가 있어!”

“진짜 큰일 만들어줄까? 내가 마음만 먹으면 임신 정도는.. 아!! 왜 때리고 그래! 뇌세포 죽어!”


명대의 임신하고 싶단 말에 펄쩍 뛴 명루가 한소리 하자 명대는 역시나지지 않고 대들었어. 따박따박 말대꾸 하다가 아성에게 뒷머리를 맞고 으르렁 댔지. 쉬지 않고 싸워대는 형들과 명대 사이에 끼여서 난처해진 후거는 괜히 왔다고 후회 하며 입술만 안으로 말고 눈치를 봐. 내가 여길 왜 왔을까.. 집에서 잠이나 잘 걸.


“죽을 뇌세포나 있긴 해?”

“역시 형들이랑 말이 안 통해.”


아예 의자를 반대편으로 조금 돌려 등을 지고 휴대폰이나 켰지. 아성은 고개를 저으며 다시 냉장고 문을 열었고 명루는 또 두통이 오는 것 같아 이마를 쥐었어. 후거는 입술 말고 눈치를 봐대고, 삐진 명대는 휴대폰을 켜서 메시지 란으로 들어갔지. 그리고 고청명과의 메시지를 켜서 검지로 키패드에서 하나만 눌러. 딱 하나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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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뭐해? 게임 해?”

“아니 문자.”

“문자를 뭘 그렇게 해.”

“그런 게 있어.”


중요한 손님인데 주스 말고 차를 우려 주겠다는 명대의 형의 말에 눈치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그래도 그나마 편한 명대 쪽으로 의자를 살금살금 옮기고 보는데, 명대가 열정적으로 휴대폰 화면을 계속 터치하기에 게임하는 줄 알았는데 문자래. 싫어하는 애한테 폭탄 문자 보내나. 저거 걸리면 진짜 짜증나는데. 역시 명대새끼 사람 피 말리는 데엔 소질 있어.




그리고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라 너무 좋아서 탈인 남자인 고청명 교수는 수업 도중에 교탁에서 쉼 없이 울려대는 휴대폰에 커다란 두 눈동자가 방황하고 있었지. 어디까지 말 했는지도 깜빡했어. 학생들도 한둘씩 진동소리를 거슬려하는 것 같아 헛기침하며 휴대폰을 들었어. 그 와중에도 화면에는 명대의 하트♥♥♥들로 가득차고, 웅웅 손바닥 위에서도 울려대는 휴대폰이 감당이 안 돼서 종료시키는 수준이 아니라 배터리를 아예 분리하고 나서야 마음이 좀 놓였지.


어제 구해주러 간다고 안 해서 괴롭히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