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차여차
곽호 썰, 소설 올리는 블로그 @tarack_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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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재 완 결 단 편 기 타 방명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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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혼 외전1 발췌 비밀번호는

goo.gl/S866Mj 이 책의 isbn 뒤에 4자리입니다! 후방주의..



소장본 예약 안내 글은 이번주 내로 올라옵니다.





*수정전 글입니다.









“명대랑 너한테 정이 맡기려니 더 걱정 돼.”

“말이 너무 심하네. 내가 뭐 어때서? 명대는 좀 걱정되긴 해.”


건화가 보기엔 명대나 후거나 거기서 거기 같은데. 후거는 스스로 이제 좀 육아를 잘 한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는데 아직도 가끔은 정이가 눈물을 안 그치면 자기도 울려고 하고, 분명 글자 공부시키기로 했는데 둘이서 모래 놀이 하는 데에 너무 심취해서 쉬지 않고 네시간 내내 모래 놀이만 하기도 했지. 집에 돌아왔더니 놀이방에 온 서랍과 선반마다 놀이용 모래로 만든 성들이 하나씩 있는데 한숨부터 터져 나왔어. 큰애와 작은애. 거기에 명대가 끼면 놀이방뿐만 아니라 집 전체가 모래로 점령당할 것 같은데.


“...알았어. 일단 출근은 해야 하니까.. 문제 있으면 전화해. 알았지?”

“응. 잘 다녀와. 사랑해.”


뒤로 내민 손만 살랑살랑 흔들고 고개는 베개에 파묻은 채로 영혼 없는 ‘사랑해’ 소리를 하는데 그마저도 좋으면 나도 병이 심각한가. 3년째 병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있는 건화는 그대로 허리를 숙여 뽀얗게 드러난 뒷목에 키스하곤 아쉬운 걸음으로 방안을 빠져나갔어.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베개에 쑥 묻힌 후거의 고개가 들렸지.


“창피하게 왜 목에다 뽀뽀해...”


그러면서 손으로 키스당한 뒷목을 쓸며 뺨을 붉혀. 하여간 온 몸에 뽀뽀하는 거 좋아한다니까. 어제도 발목을 엄청 핥고 뽀뽀해대서 그거 피하다가 허리 삐끗한 거 같은데. 


“으익.”


상상하니까 괜스레 창피해지는 것 같아 이불을 가득 끌어안고 웅크려. 드러난 뒷목과 귓바퀴가 보기 좋게 익어있었지.




정이 돌보는 걸 도와주겠다며 집에 찾아온 명대는 들어오자마자 바로 소파에 드러누워 리모컨부터 찾아. 이게 도와주려는 건지 집안 점거하려 온 건지. 기가막혀서 쳐다만 보자 후거의 다리를 붙들고 서 있던 정이가 오랜만에 보는 명대 삼촌을 보곤 손을 뻗었어. “며,엉대.” 작게 튀어나오는 어눌한 목소리에 피곤하다며 늘어져있던 명대의 허리가 불쑥 들렸지.


“어. 정이네. 우와 이제 정이 걸어 다니네?”

“미친. 걸음마 한지 몇 달 됐거든. 전에도 봤으면서.”

“요새 기억력이 너무 안 좋아.”


걸어 다닌지 한참 지났는데 뭘 이제 와서 걸어 다닌다고 놀라. 어이없어 웃고는 아들의 뒤를 잡아주며 걷는 걸 도와주려다, 허리를 굽히니 더 아픈 것 같아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일어섰어. 혼자서 알아서 잘 걷는데 뭐. 일단 저 놈도 손님은 손님이니 주스라도 내와야겠다 싶어 주방으로 향했고, 정이는 후거의 도움 없이도 아장아장 천천히 안정적으로 명대 삼촌에게 걸어갔어. 정이가 한 발짝씩 다가 올 때 마다 누워있던 명대의 몸도 완전히 일어서고, 곧 손을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워지자 정이의 집중력도 떨어졌는지 순간 몸이 휘청이고, 명대가 바로 손을 뻗어 넘어지기 전에 붙잡아 안아 올렸지.


“정아 명대 삼촌 보고 싶었어?”

“으응.”

“진짜?”

“으으응.”


보고싶었다는 의미일까 아니라는 의미일까. 알쏭달쏭한 대답이긴 하나 명대의 품에 안기자마자 크게 웃음 짓는 얼굴을 보니 요 이쁜 녀석이 싫다는 말을 할 리가 없지. 도로 소파에 앉은 명대는 정이를 옆에 앉혀두고 오늘은 늙은 네 엄마 대신 내가 돌봐줄게. 하고 말간 눈을 쳐다보며 말하는데, 정이는 명대의 얼굴을 흘끗 보다 자그하만 손을 그대로 뻗어 명대의 배 위에 올렸어. 그리곤 입을 오물대다 작게 말했지.


“정이 완자님.”

“어? 그런 말도 할 줄 알아?”

“응.”


왕자님이란 말도 알고 대단한데. 가는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말했어. 그러고 보니 후거가 정이 머리에 핀 꽂고 다니던데. 걔는 왜 아들한테 자꾸 머리핀을 꽂고 다니나 싶은데, 솔직히 리본 핀 꽂은 정이는 좀 귀엽긴 해.


“정이 삼촌 좋아하는 구나?”

“응. 정이 서방님.”

“와, 니네 부모가 대체 뭘 가르치는 거야? 벌써부터 그런 말을 어떻게 알아?”


두 살 밖에 안 된 게 어떻게 서방님이란 단어를 알아? 신기한 건 신기한 거고, 일단 정리는 해야겠지. 나중에 정이가 커서 명대 삼촌이랑 결혼 못한다고 울면 어떡하겠어. 김칫국부터 마신 명대는 정이를 안아 올리며 웃음기 단 얼굴로 대꾸했어.


“정아, 근데 삼촌은 정이 서방님 아니야. 삼촌의 서방님은 따로 있어.”

“으응. 정이 서방님.”

“삼촌은 서방님이 따로 있다니까? 삼촌 왕자님 따로 있어.”

“으으응, 으응 아니야. 아니야아-.”


명대의 이야기를 들은 정이는 답답한지 한참은 아니라고 고개를 젓다가 눈 끝을 찌푸린 채로 몸을 흔들어 명대 품에서 내려온 후에, 얇은 점퍼에 가려진 명대의 배 위를 손바닥으로 톡톡 가볍게 두드렸어. 여기이. 정이 완자니임. 요기이. 자꾸만 명대의 배 위를 만지며 여기에 왕자님이 있다고 말해. 여기에 왕자님이 있다고. 내 배에? 내 배엔 왕자 없어. 복근 없는데.


“정아, 뭐라고? 왕자님?”

“여기, 왕자님 여기, 며엉, 대 배, 왕자님..”

“.....”


하고 싶은 말은 있는데, 할 수 있는 말은 한정 되어있으니 의사소통이 안 돼서 정이는 답답해 온 팔과 다리를 버둥대고, 그런 정이가 떨어지지 않게 잘 붙잡은 명대는 자꾸 정이가 자신의 배를 만지는 것을 물끄러미 내려다봤어. 정이가 시답잖은 아저씨 개그를 할 리가 없으니, 정이가 말하는 왕자는 말 그대로 ‘왕자님’이겠지. 내 배에, 왕자님이 있다고? 그 순간 단어 하나가 뇌리에 스쳐 지나가. 


“...잠깐..”

“야, 너 오렌지주스 먹을래 아니면 블루베리 갈아줄까? 아니다. 귀찮으니까 그냥 물이나 마셔.”


뭐 마실 거 없나 해서 주방에 가서 뒤적여보는데 명대의 입안을 망칠만한 음료가 없네. 저번에 아저씨가 사온 이상한 음료수 버리지 말고 그냥 둘 걸. 냉장고 안을 한참 보다 도로 나오며 물었는데, 명대는 어딘가 얼이 빠진 얼굴로 후거를 불렀지.


“야.”

“엉?”

“너 임신테스트기 있어?”


테스트기? 뜬금없는 테스트기는 왜 갑자기. 


“어? 왜 그건? 갑자기 왜?”

“급해. 있냐니까?”

“잠깐만, 몇 년 전에 사둔 건데 있긴 한데 잠깐만..”


예에전에.. 정이 가지기 전에 산 거라 되는 진 모르겠는데. 저번에 청소할 때 보긴 했어. 명대가 너무 급하게 달라고하니까 후거도 덩달아 마음이 급해져 안방으로 뛰어가 서랍을 뒤졌어. 다행히 두 번째 서랍 깊은 곳에서 발견한 테스트기를 명대의 손에 쥐어주고, 명대는 바로 화장실로 들어갔지. 그러고 정이와 단 둘이 거실에 남게 되자 얼빠진 정신이 좀 돌아오는 것 같아. 바지를 꼭 쥐고 버티고 선 아이를 안아들고, 소파에 앉아 고개를 좌우로 갸웃댔어.


“임신 테스트기는 왜 갑자기 우리집에서 찾아. 쟤 임신했나.. 사고친 거아냐?”


근데 왜 우리집에서 그걸 찾냐니까. 희한하네.


“정아. 이상하다. 그치?”

“이상해요.”

“맞아. 이상해요.”


통통한 뺨에 제 뺨을 부비며 입술을 길게 다물었어. 쟤 사고 친 거면 어떡하지. 후거가 알기론 아직도 교수님이랑 명대 교제하는 거 허락 못 받은 거 같던데.


당사자도 아닌데 걱정 돼 죽겠어. 후거도 어린 나이에 아이를 가져서 고생하긴 했지만, 그래도 사고치고 결혼한 건 아니란 말이지. 결혼 후에 아기 가진 걸.. 그 거랑, 사고 쳐서 임신하고 허락 받고.. 그 과정은 너무 다르지 않을까. 생각만 했는데 쉽지 않을 미래에 벌써부터 질리는 것 같아. 하긴 뭐.. 그 고청명 교수님이 명대랑 2년 넘게 사귀고 있는데 그 까짓 반대야... 2년 동안 사귀게 내버려 두는 거 보면 사실 명대랑 교수님네 가족들도 반쯤은 허락한 거나 다름없지 뭐.


혼자서 속으로 명대 걱정을 하다 배고프다는 정이 말에 끌어안아 주방으로 걸어가던 도중, 닫혀있던 화장실의 문이 열렸어. 그리고 그 안에서 나온 명대 새끼의 표정이...


“....너 복권 당첨됐어?”


임신테스트기를 꽉 쥐고 나온 명대는 꼭 환희에 찬 표정이야. 깊은 산중에서 팔뚝만한 산삼을 발견한 심마니의 표정이 이럴까. 아르키메데스가 목욕탕에서 순금을 판별하는 방법을 떠올리고 ‘유레카!’하고 탄성을 내질렀을 때 표정이 이랬을까. 


“복권 당첨이지. 미친. 고청명 이제 빼도 박도 못하게 나랑 결혼해야해.”

“........축하해.. 교수님 인생도 이제 끝이구나.”


고청명 교수 인생에 자기 제자와 사고 쳐서 결혼한다는 게 가당키나 할까. 명대에게서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흙빛이 될 교수님 얼굴이 눈에 선해. 안 그래도 예전에 후거가 아이를 가졌을 때 그 이야기를 듣고 거의 경악을 하셨거든. 그 때 뭐라고 하셨더라...


‘너.. 명대랑 동갑이잖아.’


명대랑 동갑인데 벌써 애를 가졌다는 말에 놀라서 굳은 표정으로 후거를 쳐다보는데, 순간 후거는 눈빛으로 꾸지람을 듣는 기분이었지. 물론 뭐라고 하진 않으셨지만 그 이후로도 내내 신경이 쓰이셨는지, 가아끔 명대 때문에 교수님을 보게 될 때 마다 몸은 괜찮냐, 남편이 육아는 도와주냐 물으셨어. 그 물음에 미묘하게 담긴 후거 남편에 대한 질타를 느낄 수 있었지. 


쟤가 테스트기 어디 있냐고 호들갑 떨 때부터 예상은 했지만.. 진짜 임신이라니까 되게 기분 이상하네. 후거가 임신 사실 알고 절망 했을 때도 떠오르고.

 

“어떡하긴 뭘 어떡해. 나랑 결혼해야지. 하... 언제 어떻게 말하지. 나 지금 가야겠다. 결혼식장 알아볼래.”


테스트기를 소중하게 싸들고 현관으로 향하는 명대의 뒷덜미를 빠르게 붙잡아 당겼어. 이게 어딜 도망가려고.


“미친, 야. 가긴 어딜 가! 나 도와주러 왔잖아.”

“아, 맞네. 아. 어떡하지. 야 컴퓨터 어디 있어?”

“...안방 침대에 있어.”

“좀 빌릴게.”





-중략-




“명대 너 어디 가니?”
“응. 교수님 만나러.”

어제 오늘 영 기운이 없어 보여서 오늘 병원 데리고 가려 했는데. 그걸 어떻게 안 건지 명대가 쪼르르 도망 갈 생각을 하네. 아침도 안 먹고 점심도 안 먹고 우유한잔만 달랑 마시고 나가려는 명대의 팔을 붙잡아 이마에 손을 올려봐. 딱히 열은 없는데. 목덜미에 손을 대도 유독 뜨겁거나 하진 않아.

“안 아파. 누나 음, 밤에 올게. 자고 올 일은 없을 거야.”
“알았어. 조심히 잘 다녀오고.”
“응.”

누나의 볼에 가볍게 뽀뽀하고 가방도 챙겨 집을 나서는 명대의 표정은 썩 밝지는 않아. 어젯밤을 새가며 내내 고민 했지만 시원한 해답은 안 나왔지. 어쩔 수 없이 말은 해야 하지만.. 시간을 끌어서 될 일이 아니니 그냥 빨리 해버리고 말자 싶어도 사실 걱정은 돼. 교수님 얼굴 볼 자신이 없다.

대문 앞에 서서 나갈까 말까 망설이다 머리와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조심스레 대문을 열어 빼꼼 머리만 내다 봤어. 어, 아직 안 오셨네. 운동화 앞코로 바닥을 툭툭 치고 주머니에 넣은 휴대폰을 빼서 보자 아직 1시 50분이야. 아. 어떡하지. 보면 무슨 말 하지. 어제 하루 연락도 거의 못하고 얼굴 못 봤다고 진짜 힘들어 죽는 줄 알았네. 밀당을 이래서 하는 거구나. 예전에 후거가 밀당이 최고니 어쩌니 했던 게 다시 떠올랐어. 이 번엔 밀당 하려고 한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교수님한테 전화하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침대에 틀어박혀서 내내 고민했어. 원해서 생긴 아이가 아니니까 교수님이 마냥 기뻐하지만은 않을 것 같아서. 후거네 집에서는 이제 교수님이랑 결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온전히 행복하기만 했는데 교수님 집에 가는 길에 그 생각이 틀어졌어. 만약에 ‘교수님, 저 임신 했어요.’ 하고 말했을 때 교수님의 얼굴이 절망스러운 표정이라면 난 어떻게 해야 하고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무서워져서, 막상 갔을 때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지.

진짜 쉬운 게 하나도 없다. 콘돔에 구멍이라도 뚫을까 농담하긴 했지만 이렇게 얼떨결에 임신 한다고 쳐도 뭐 하나 고민 없이 되는 게 없네. 대문에 쿵쿵 머리를 박으며 괴로워하는데, 순간 이마에 손 하나가 닿았어. 놀란 명대의 고개가 들리고, 대체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는지 대문 옆에 서 있던 청명이 다급하게 손을 뻗어 명대의 이마를 막은 거야. 혼자 뻘짓 하고 있던 걸 들킨 기분에 뒤로 물러선 명대는 두 손으로 이마를 붙잡으며 입술을 깨물었어.

“왜 그러고 있어?”
“그러는 교수님이야 말로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어요? 차 없던데.”
“차 저기 옆에 세워뒀어. 혹시 형님들 있으실까봐.”
“형들 일하러 가서 없어요.”
“머리 아파?”
“아무 것도 아니에요...”

아까 벽에 머리를 찧고 있던 것에 대해 묻는 거야. 창피해진 명대는 다시 이마에 닿는 그의 손을 붙잡아 내리곤 고개를 저었지. 그대로 집에서 빠져나와 청명의 차에 올라타고 안전벨트를 매주는 그를 충동적으로 세게 끌어안았어. 청명은 갑작스레 명대가 끌어안자 두 눈을 크게 뜨고 어쩔 줄 몰라하다, 한참이 지나서야 명대의 등을 끌어안고 뺨에 자신의 뺨을 비볐어. 둘 다 밤을 새고 고민해서 닿는 뺨이 거칠해. 영 자세가 불편해 몸을 조금 당긴 청명은 손을 뻗어 명대의 앞머리를 들어올려 동그랗게 모양 좋은 이마를 확인했지. “괜찮다니까요.” 명대가 투덜대며 피하려고 해도 꽉 잡아 다시 한 번 확인 한 후에야 미끈한 이마 위에 짧게 키스하곤 명대의 뺨을 손등으로 쓸어. 교수님 은근히 스킨십 많아. 예전으로 돌아가 냉담하던 교수님만 알았다면 몰라도, 다정한 교수님까지 알게 된 이상 이젠 교수님이랑 못 헤어져. 울컥한 마음에 시동을 걸기 위해 다시 고쳐 앉으려는 청명의 손을 붙잡았어. 눈가가 뜨거워지는 것 같아.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내렸지. 만약에 지우라고 하면 어떡하지. 교수님은 결혼 생각 전혀 없어 보이는데.

“한 시간은 넘게 걸리니까 좀 자고 있어.”

자신의 손을 조심스레 빼낸 청명은 명대의 어깨를 부드럽게 밀어 등받이에 기대게 하곤 뒷좌석에 있던 담요를 들어 무릎에 올렸어. 아마 한 시간 반.. 거의 두 시간 걸릴 거야. 점심은 먹었어?

“먹었어요.”
“그럼 조금만 자고 있어. 도착하면 깨울게.”

무릎 위에 담요를 가지런히 펴주던 손길이 멀어지자마자 불안감에 옷에 달린 자수 패치를 만지는 척 배 위를 매만졌어. 아직 임신이란 실감은 전혀 안 나지만.. 낳고 싶은데. 교수님이랑 똑같이 생긴 아들 낳으면 어떤 기분일까. 감은 눈을 슬그머니 뜨고 눈동자를 굴렸어. 운전에 집중한 청명은 명대가 쳐다보는 것도 느끼지 못하고 앞만 보고 있었지. 그가 시선을 느끼기 전에 다시 고개를 돌린 명대는 한숨처럼 눈을 감으며 배 위를 만지작대. 생각보다 밀리는 차에 잠깐 집중을 풀던 청명이 마침 명대의 손에 눈길이 닿았지. 배 위를 만지는 손. 가만히 길게 뻗은 손을 보다 고개는 다시 앞으로 돌아가면서, 뇌리에는 명대의 흰 손이 계속해서 남았어. 



두 시간이면 넉넉히 도착하겠거니 생각했는데 두 시간 반이 지나서야 겨우 도착했지. 출발했을 땐 한낮이었는데 도착하고 보니 하늘이 흐릿한 빛이야. 비가 온다고 한 적은 없는데. 
깨어난 명대는 눈을 뜨자마자 배가 고프다고 아우성이었어. 급기야 배에서 꼬르륵 소리마저 났지. 창피한지 인상을 찌푸리곤 생리적 현상이라고 변명하는데, 누가 뭐랬어?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말이야.

“점심 먹었다며.”
“우유 한 잔 마셨어요.”
“그건 먹은 게 아니지. 식사하러 가자.”
“교수님은 안 먹었어요?”
“나도 대충 때웠어.”

점심 먹었다길래 그런 줄 알았더니 우유 한잔이 뭐야. 바로 정색한 청명은 차를 끌어 근처 식당에 들어갔어. 명대도 청명도 주는 건 그냥 다 먹으니 식사 할 곳 정하는 건 오 분도 안 걸려. 한적한 식당에 들어가 가벼운 가정식을 주문하고 나오기만을 기다리는데 둘 다 말없이 침묵하고 있지. 고교수의 머릿속엔 언제쯤 말을 해야 할까 언제 고백해야 로맨틱함이 느껴질까 고민이었고 명대는 말을 해야 하는데, 해야 하는데. 하고 갈등만 할 뿐이지. 평소엔 잘 튀어나오는 말들이 왜 오늘만큼은 힘든지. 언제 말하지. 그냥 오늘 말하지 말까? 어차피 당장 내일 애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배도 아직 안 나와서 초기인데... 내일 말한다고 세상이 무너지는 건 아니잖아. 한참을 변명거리를 늘어놓으며 자기 합리화를 할 때 였어.

“공부는 할만 해?”
“네?”
“공부. 요새 열심히 하잖아.”
“아... 졸업해야 하니까 하는 거죠 뭐. 그나마 형이 가르쳐줘서 꾸역꾸역 하는 거예요.”

일주일에 서너번정도 아성이 명대가 모르는 부분을 가르쳐주는데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누나한테 개인 교사를 붙여달라고 하고 싶어. 형은 못하면 때린단 말이야! 등짝이 진짜 남아나질 않아. 

“교수님은 어때요?”
“뭐가?”

형이 자꾸 때린다고 청명에게 이르다가, 물 한 모금을 마시곤 갑자기 눈을 빛내며 물었어. 정확한 내용 없이 튀어나오는 질문에 그가 무심히 대답했지.

“저 이번학기에 졸업하잖아요. 저 졸업 하고나면 이제 자주 못 보는데 기분 어떨 것 같아요? 쓸쓸할 것 같아요?”

졸업 후.
생각도 못해본 이야기라 바로 대답이 안 나와. 오른쪽 눈썹을 들어 올린 그는 고민하는 듯 입매를 꾹 다물며 눈가를 좁혔어. “글쎄...” 전혀 궁금증 해소가 되지 않는 질문에 답답해. 좀 시원하게 대답해주지. 어떨 것 같아요? 외로울 것 같아요? 이제 일주일에 두 번, 세 번 못 보잖아요. 재촉되는 질문에도 청명의 눈은 느긋하게 끔뻑였어. 긴 속눈썹이 눈동자를 완전히 가렸지.
그렇네. 졸업하면 자주 못 보겠네. 명대도 취업을 할 테고, 지금보단 바빠질 테니까. 왜 딱히 거기까지 생각을 안 해 봤을까. 그러다 자연스레 생각은 결혼으로 넘어갔어. 어차피 결혼하면 매일 볼 텐데. 그래서 묻는 건가? 고개를 슬쩍 들어 명대를 쳐다보니, 어쩐지 명대의 얼굴이 좀 굳어있는 것 같기도 하지. 청명은 “잘 모르겠는데. 생각해본 적 없어서” 하고 대꾸하곤 휴대폰을 들어 시계를 봤어. 다섯 시. 언제 다섯 시나 됐지.

“지금 생각하고 대답해줘요. 왜 대답 안 해줘요!”
“음식 나왔다.”
“아, 뭐야-.”

치사하게 왜 대답을 안 해줘. 보고 싶을 거다, 외로울 거다 말 한마디 해주는 게 뭐가 그렇게 힘들다고. 에이씨. 오늘은 임신한 거 말 안 할래. 뭔가 일진이 안 좋아. 원래도 살가운 말 잘 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오늘은 좀 기분이 그래. 나중에 할래. 나중에. 언젠간.. 언젠간 하겠지. 애 낳기 전까진..



“생각보다 사람들 없네요?”
“그러게. 많을 줄 알았는데.”

요즘 날이 많이 풀려서 바다에 나온 사람들도 많은 줄 알았는데 드문드문 있네. 느긋하게 식사를 마치고 카페에서 차까지 먹고 나오니 이제 하늘이 완전히 짙은 빛깔로 변해서 회색 구름만 얼룩져있었어. 카페에서 차를 마시는 내내 혹여나 명대가 먼저 이야기할까봐 마음을 졸였지. 근데 명대는 말할 생각이 없는지 다른 이야기들만 떠들어댔어. 발표수업이 힘들다는 둥, 청명이 과제를 너무 많이 내준다고 너무하다고 하기도 했고. 이제는 과에도 제법 친한 애들이 생겨 친구들과 있었던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명대의 속닥대는 이야기를 듣는 동안 청명은 자켓 주머니 속에 넣어둔 반지를 떠올리며 입술을 씹었어. 로맨틱한데에는 소질이 조금도 없어. 분위기가 깨지만 않으면 다행이지. 소설책을 꺼내 읽기도 하고 시집을 사서 보기도 했지만 보는 그 순간 괜찮네. 하고 생각은 하지만 막상 입 밖으로 꺼내기엔 부담스러웠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고작해야...

“바다는 좀 시원하네요. 어제부터 갑자기 더워져서 에어컨 틀고 싶은 지경이에요. 근데 누나가 감기 걸린다고 틀지 말라고 하고.”
“아직 에어컨은 이르지.”
“그래도 더운 걸 어떡해요. 교수님은 안 더워요?”
“난 더위 안타서.”
“부럽다. 난 더위도 추위도 많이 타는데.”
“추위를 많이 탄다면서 한겨울에 얇은 코트 하나만 입고 다녀?”

하긴. 생각해보면 그렇게 입고 다니면서 춥다고 하루에 천 번은 말하지. 덕분에 매번 청명이 데이트 할 때마다 명대에게 장갑이나 목도리나, 많이 추운 날은 외투까지 사다 바쳐. 그러는데도 데이트 할 때 마다 보온은 되는지 모를 얇은 가죽 장갑에 코트만 달랑 입고 나와. 

“교수님한테 예뻐 보이려면 당연하죠. 패딩 입으면 뚱뚱해 보이잖아요.”
“하나도 안 뚱뚱해.”
“알아요. 나 정도면 날씬하지.”
“그리고 뭘 입어도 예뻐.”

앞서 걷던 명대는 이어진 말에 우뚝 멈춰 섰어. 모래알이 운동화 앞코에서 잔잔히 부서지지. 그리곤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 오묘하게 부정하는 듯한 얼굴이야.

“아까는 쓸쓸할 거란 말도 안 해줬으면서 예쁘다는 말은 해줘요? 좀 전에 커피 마셔서 기분 좋아져서 그렇죠?” 

교수님은 카페인 중독이니까. 팔을 앞뒤로 흔들며 모래사장 위를 성큼성큼 걸어갔어. 목덜미가 괜히 뜨겁네. 후드티 입고 올 걸 그랬다. 그러면 목덜미 빨개진 거 안 보일 텐데. 귓가에 계속 뭘 입어도 예쁘다던 교수님의 목소리가 반복 되는 것 같아 바다는 보지도 않고 돌멩이와 사탕껍질 따위가 섞인 모래만 보고 걸었어. 뒤에서 청명이 천천히 걸으라고 붙잡는 목소리에 누가 쫓아올 새라 빨리 걷던 걸음이 조금 늦춰졌지. 지금 말할까. 교수님 카페인 때문에 기분 좋아졌을 때 말할까. 그냥 확 말하고 치워버릴까. 싫다고 하면 그냥 나 혼자 낳아도 되잖아. 지금 말할까. 지금..

“명대야.”
“네?”

긴 보폭으로 걷던 걸음도 멈추고 서서 고개를 푹 숙인 채 갈등할 때, 한 뼘 건너 멈춰 선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명대를 불렀어. 생각 속에 빠져 있던 명대는 뒤늦게 몸을 돌리며 그를 쳐다봤지.

“우리 결혼하자.”

순수한 궁금증만 보이고 있던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어. 내가 잘못 들었나. 다문 입술이 열려 달싹이고, 저도 모르게 “무슨..”하고 작게 뱉자 한 발작 떨어져있던 청명이 한 뼘 더 가까워졌어. 그리곤 허벅지에 닿은 명대의 손을 잡아 올렸지.

손가락에 뭔가 닿아. 교수님 손 말고, 다른 거. 천천히 고개를 내린 명대는 제 손에 느리게 끼워지는 반지에 눈을 크게 떴다, 감고, 다시 떠. 몇 번이나 눈을 감았다 떠도 반지는 사라지지도 않고, 오히려 서서히 손가락을 더 깊게 감싸지.

“밤마다 널 데려다주는 게 점점 힘들어져. 네가 집에 들어가고 난 뒤에, 너희 집 앞을 떠나는 것도 점점 시간이 들고.”

손가락 끝을 완전히 삼킨 반지처럼. 명대는 꼭 제 머리가 청명에게 삼켜진 것 처렁 몽롱하고 부유 하는 기분이야. 교수님의 목소리가 웅웅 귀에서 울리는 것 같아. 무슨 말을 하는지 다 들리는데,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움직이는 교수님의 입술을 보다 눈을 내려 반지가 끼워진 제 손에 닿아. 네 번째 손가락에 꼭 맞게 닿은 반지.